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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Nov 02. 2021

소실점(消失點)

툭, 툭, 수산시장의 고등어처럼 도막 나는 시간에 반하여

시간을 줄여 쓴다. 밤 11시에 잠들고 새벽 5시면 일어난다. 2년 전 한 운동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만들어둔 습관이다. 아니, 핑계다. 새벽 5시에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면서 기어코 밤 11시에 잠들며 시간을 줄인다. 그때는 5시에 일어나 새벽 운동을 하러 집을 나섰다. 첫 지하철을 타고 운동하는 장소에 도착하여 1시간여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 5시에 하루를 시작. 밤 11시엔 잠자리에 들어야 다시 다음 하루를 반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든 습관을 코로나와 함께 망가뜨렸다. 5시에 집을 나설 이유가 사라졌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밤 11시가 되기 훨씬 전에 하루를 마감해야 할 기분에 휩싸인다. 마땅히 무언가 하지도 않으며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11시가 되면 '내일 5시에 일어나야 하니까...'라 중얼거리며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5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지낸 지 1년이 되어간다. 확실히 핑계다. 분명 하루의 시간은 길다. 회사와 집을 제외하면 다른 일정은 없다. 퇴근하면 마땅히 모든 시간을 내가 쓸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시간을 뭉뚱 거려 덩어리로 날린다. 낮에는 낮잠을 자야 한다며, 퇴근 후엔 업무 중에 모니터를 너무 많이 쳐다보아 피곤한 눈을 쉬게 해주어야 한다며, 밤에는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면서 억지로 쉬는 시간이 많다. 그럴 때면 시간은 툭, 툭, 수산시장의 고등어처럼 도막으로 썰려 나간다. 굳이 쉬어야 할 때가 아닌데도 쉴 때를 철저하게 지킨다. 그리고 그 외의 시간은 도막과 도막이 잘려나가는 틈, 그뿐이다. 고등학생 때 들었던 수학 인강 중 '무한등비급수'인지 '무한 등비수열'인지와 관련된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래프나 도형에 일정한 규칙으로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때, 나의 인강 선생님이 하던 말이다. '이걸 무한대로 늘린다고(확대한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이 점이 어디로 가겠느냐 말이야.' 황당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생님의 방식대로 무한대로 그 선(혹은 도형)을 늘려내거나 줄이고,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상상 하면 어떤 한 점으로 시선이 향했다. 곧이어 식과 함께 선생님이 설명해주면 그게 곧 답이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던 이 방식은 문제를 접근하는 나의 독특한 방식이 되었다. 이 문제에서 요구하는 그림을 한없이 늘리거나 줄여서,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면 향하는 어떤 한 지점. 그 지점으로 향한다. 그 지점과 관련한 근거를 찾는다. 그러면 정답이 그곳에 있다. 시간도 그렇지 않을까. 한없이 늘리거나, 한없이 줄일 때 모이는 어떤 한 지점이 있다. 그런데 지금처럼 한없이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인다면 그 시간이 향하는 한 지점은, 고작 해봐야 지금 이대로가 아닐까. 그렇다면 반대로 시간을 늘려서 쓸 수는 없을까. 늘리고, 늘리고, 늘리다 보면 보이는 지점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시간을 늘리려면 박차고 일어날 필요가 있다. 곧장 문제의 규칙성을 찾고, 그걸 반복해내야 한다. 시선을 문제에 고정한다. 당장 그림을 한없이 늘리는 상상을 시작한다. 여태껏 내 모습을 그려온 방식이었다. 그러다 지금의 내가 되었다. 맞다. 그렇게 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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