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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Nov 01. 2021

집을 나왔다. 반은 성공했다.

언젠가 과제로 4호선을 종단한 적이 있다. 어떤 주제의 과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고 글을 써내는 일이었다. 나는 주말 하루를 통째로 바쳐 4호선을 종단했다. 당고개에서 오이도까지.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까닭은 주말이면 집을 나서지 않고 무기력하게 잠만 자는 나에 대한 반성이었다. 어쨌든 집을 나서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집을 나서도 마땅히 가야 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울에 상경한 대학생이었지만 매일 다니는 기숙사-학교를 제외하면 가본 곳이 없었다. 그래서 거리를 늘리기로 했다. 등하교를 위해 매일 타는 4호선. 4호선의 끝을 달려보자고. 자리를 잡고 한참을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렸다가 탔다. 나는 잠을 잤다가 책을 읽었다가 멍하니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다시 잤다. 내 위치를 추적하겠노라면 계속해서 움직이겠지만 나는 도무지 움직일 생각일랑 없었다. 바깥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풍경의 색이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당고개에서 오이도까지, 딱히 목적은 없는 종단이 이어졌다. 오이도에 도착해선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다시 반대 방향의 지하철을 타는 일. 오이도역에서 어묵을 하나 먹고선 지하철을 탔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랐다. 합쳐서 4-5시간의 시간을 쓴 듯 했다. 나에게 남은 것 무엇이었더라. 고생했다는 기억이 선명하다. 그 이후에 나는 주말의 시간을 잘 보냈던가. 변화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고, 회사원이 되었다. 문득, 집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집에만 있고, 너무 갇혀 지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야겠다. 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디를 가야하지? 뭘 해야하지? 나는 일이 없다면 허무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일이 없는 외출은 허무한 하루의 반복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무작정 전시회를 검색했다. 그중 하나의 전시회를 보았다. 그래, 여기라도 가야겠다. 휴가를 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지. 아, 실패다. 실패하고 오후에 어렵사리 집을 나섰다. 지하철에 올랐다. 실패해도 아직 휴가인 오늘이 끝난게 아니었다. 몇 년 전의 지하철 종단이 떠올랐다. 집-회사만 반복하다 전시회를 가려 다니는 거리가 늘어났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집을 나섰다. 집을 나왔다. 반은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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