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행 버스를 타고.
여행의 시작
그리고 남부행의 마지막 날, 그 날은 학교의 체육대회였는데 남부행은 내게 땡땡이치고 도장포에나 가자고 했다. 내가 했던 첫마디는 니 달리기 해야지,였다. (중략) 그런데 그날은 도저히 못 뛰겠다는 거였다. 버스 타고 어디 놀러나 갔으면 좋겠는데 도장포엘 가보고 싶다고 했다. 거기까지 가서 뭐하게? 그냥, 버스 타고 갔다가 다시 오게. 바람의 언덕도 보고. 바람의 언덕? 뭐 그런 게 있다더라, 거 가면 바람이 막 불 것 같고 왠지 좋잖아. 가자.
김상,『삼십』반얀 출판, 2012, 86p <남부행 버스> 중
모든 여행의 시작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다. 나는 침대 위에, 있었다. 과업이 없는 빨간 날이었고, 반쯤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읽고 있던 책이 여행에 관련된 책은 아니었다. 정보를 제공하는 목적으로 쓰인 책도 아니었다. 그저 사소한 이야기들이 가득 담긴 에세이집이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그만 정보를 얻고 말았다. 다음 여행의 목적지를 정해버린 것이다. 군부대 안의, 침대 위에서. 그래서 내가 향할 목적지는 '바람의 언덕'이었다.
바람의 언덕이 어디인지는 몰랐다. 남부행 버스를 타고 가는 곳이랬으니, 남부겠지. 그런데 나는 군인이었으므로 곧장 나갈 수는 없었다. 다음 휴가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고, 남아 있는 시간 덕에, 잠시 잊고 살았다. 바람의 언덕을. 그러다 문득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다 바람의 언덕, 이 보였다. 거제도 바람의 언덕. 어쩔 수 없이 나는 거제도로 향해야만 했다. 따로 찾지도 않았는데 바람의 언덕이 눈 앞에 나타나기도 했거니와, 그날 침대 위에서, 바람의 언덕으로 출발, 을 외쳐 버리기도 하였으니.
허둥지둥, 헐레벌떡
휴가를 나왔다. 하루 동안 검색을 해보고 내일, 여행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당장 떠나버렸다. 2015년의 마지막 날을 가족들과 보내려 하니 당장 떠나야 했다. 2015년 12월 29일, 휴가를 나온 당일이었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출발을 정해버려서 시간은 늦은 오후. 짐은 당연히, 아무것도 챙겨져 있지 않았다. 흡사 모 방송사의 청춘들이 해외로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채로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처럼 허둥지둥, 헐레벌떡 떠났다. 얼마 전 전역한 친구 녀석과 함께 가려했지만, 내가 그만 허둥지둥 오늘 바로 떠나버린다는 말에 친구와 함께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혼자서, 떠났다. 우선은, 통영으로.
깜깜한 어둠이 감싸 안은 버스에 올랐다. 어떤 이유로 일지는 모르겠지만, 나처럼 통영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버스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행을 가는 걸까. 아니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남부행 버스였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우선은 하루를 묵을 곳이 필요했고, 통영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가 묵을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정해버린 통영의 한 게스트하우스. 그렇게 첫 번째 나의 목적지는 게스트하우스가 되어버렸다.
첫 번째 게스트하우스
게스트하우스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사진을 남기진 못했다. 도착한 시간은 오후 8시 20분경, 게스트하우스 1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모여서 간단한 술자리를 펼치고 있었고, 그 옆에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이 있었다. 우선 방키를 받아 들고 2층의 방으로 가서 짐을 먼저 정리. 6인실이었지만 우선은 2명의 자리만이 채워져 있었다. 나까지 3명. 그리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 본 1층. 혼자 온 여행객인지라 따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기다리거나 할 상대가 없었기에 어정쩡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사장님의 배려와 이미 술자리를 즐기고 있던 다른 여행객들의 배려로 술자리에 뒤늦게 합류. 이미 안주거리들은 없었지만 함께 대화할 상대들 사이에 끼일 수 있어 기뻤다. 하지만 역시나 사진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 이야기의 주제는 통영에 여행 온 여행객들이라고 해서 '통영 여행'에 국한되어 있진 않았다. 하다못해 짝사랑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그런데 어쩌면, 여행 와서 처음 본 사람들이기에 더욱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이야기해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만이니깐.
미리 알아보고 떠난 여행이 아니었기에, 다음 날 행선지를 정해야 했다. 겨울바다가 보고 싶었으므로 배를 타고 섬으로 가려고는 하였다. 그런데 어떤 섬을? 여행객들과 이야기하며 들은 섬,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들은 섬 등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지는 거제 바람의 언덕이었으므로 바람의 언덕을 제외한 다른 선택지에선 가장 멀지 않은 곳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한 다음 날 첫 목적지는 통영의 섬, 한산도였다. 배로 30분을 타고 들어가야 했다.
한산도 - 제승당, 시 파라다이스호.
배를 타고 가야 하는 한산도였기에
배를 타러 가야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던 K형(29)의 차를 얻어 타고 터미널까지 왔다.
같은 곳으로 여행을 떠날 여행친구를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진 못했지만 이런 호의 정도를 얻을 수는 있었다. 이게 게스트하우스의 묘미겠지.
시 파라다이스 호
한산도까지 나를 데려다 줄 배였다.
해군이었지만,
해군이 되어서 처음 탄 배가,
그것도 현역 해군인 신분으로 처음 탄 배가,
군함이 아닌, 민간 여객선인 아이러니.
명확하지 않은 초점이,
명확하지 않은 내 여행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사실, 내가 한산도로 가겠다고 정해 버린 건 여객선터미널에서 한산도로 떠나는 배가 곧 출발이라는 방송이 흘러나오길래, 여러 섬 중에 고민하던 모든 게 사라지고 그냥 지금 출발하는 배를 바로 타 버리자고 정해버렸던 것이니깐.
이것 봐 근본 없잖아. 불명확하잖아.
같은 배를 탔던 여러 명의 초딩들.
체험학습을 가는 듯했다.
그런데 이 녀석, 배 타는 게 지루했던지
난관에 이렇게 매달려버리고 말더라.
나도 잠깐 배 타는 건데
뱃멀미가 나서 객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너를 본거라서
왠지 니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
너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으려나.
어쨌든,
그래도 너는
나보다 나은 게,
조금 있다가
여자친구가 데리러 오더라?
나는 혼자였는데,
부러운 자식.
저 문 앞을 얼마나 많은 한산도 사람들이,
한산도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왔다 갔다 했을까.
여행을 다니며
문 프로젝트, 어디로든문, 등등의 이름으로
문을 찍어 올리는 것을 하는데
이번엔 깜빡하고 안 찍어왔는데
이 사진이 있더라고.
배의 문이 바로 섬의 출입구, 문일 테니깐.
한산도 제승당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머물렀던 성지, 그리고 마침 내가 간 날은 무료관람으로 제승당이 개방되어 있던 문화가 있는 날. 그렇게 나는 성지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한산섬 달 밝은 낮에 수루에 혼자 누워 / 물통 옆에 차고 햇볕을 쬐는 차에...
날이 너무 좋았고, 제승당은 적막했다. 그래서 잠깐 수루에 누워 충무공의 기운을 받으며 햇빛을 쬐다가
금방, 일어났다. 나만의 공간이 아니었기에.
충무공이 활시위를 당기곤 했다는 사격장.
군인인데 사격을 몇 번 하지 않은 나는
절대로 저길 맞출 수 없다고 혼자서 단정 지으며
손가락으로나마 과녁을 조준해본다.
그리고, 나의 가장 큰 목적지는 거제 바람의 언덕이었기에, 바람의 언덕으로 향하려 통영 시외버스터미널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누님들을 다시 만난다. 목적지는 달랐지만 양쪽 모두 버스 시간까지 시간이 떠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때 나는 일부러 챙겨갔던 캘리그래피 도구를 꺼내서 글귀를 하나씩 선물한다.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 그리고 군인.
통영에서 거제까지 다시 버스를 탔다. 버스에 올라 탄 승객은 나 혼자. 왠지 혼자 기다란 버스를 타고 있으니 내 전용 리무진을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리무진에서, 나는, 잤다.
그리고 바람의 언덕에서 내렸다. 바람의 언덕 맞은편에는 신선대라는 곳도 있었으므로 나는 바람의 언덕에 도착했지만 신선대에 도착한 것과도 같았다. 그래도 바람의 언덕이 이번 여행에서 나의 가장 큰 목적지였으므로 신선대를 먼저 향했다. 바람의 언덕을 마지막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려고.
조금씩 해가 뉘엿뉘엿 질까 말까 밀당을 하려고 시작할 때였다. 아직까지 말까, 에 가까운 시간이었기에 빨강, 보다는 파랑, 이 눈에 더 많이 들어오는 신선대의 하늘이었다. 그리고 만일 저 언덕 위에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짓기만 한다면, 충분히 부엉이를 날려 편지를 주고받아도 될 곳인 것 같다, 고 생각했다. 개소리, 아니, 부엉이 소리다.
혼자 여행 와서 자유로웠는데, 자유로운 탓에 나를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으로. 그러다 나처럼 혼자 여행을 온 것 같은 한 명의 남자가 신선대를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용기 내어 그 남자에게 혼자 여행 왔는데 서로 사진 하나씩 찍어주는 것은 어떠냐 제안했다. 그 남자의 입장에서는 여자가 말 걸어주는 로맨틱한 여행 스토리를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물론 나도 나한테 그런 경우가 일어나면 좋겠다만) 어쨌든 남자인 내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서로 사진을 주고받았다.
대게 주위 사람들에게 사진을 부탁하면 대부분이 기대 이하의 사진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혼자 떠나온, 그리고 혼자 떠나온 남자에게서 사진 부탁을 받은 그 남자는, 괜찮게도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어린 95년생이었고, 10일 뒤면 군대에 입대를 한다고 했다. 나는 군인이었고, 군대 입대를 한다고 하니 뭔가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나마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손글씨를 하나 선물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해가 질까, 에 더 가까운 시간이었나 보다.
진짜 바람의 언덕
그리고 이제야, 진짜로, 바람의 언덕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지. 거 가면 바람이 불 것 같고, 그런 곳. 그래서 일부러 위랑 아래랑 전부 한 겹씩 더 껴입고 다가선 그 바람의 언덕. 그런데, 정작 바람의 언덕에 가서는 전화통화를 한다고, 근데 왜 하필 바람의 언덕에서 전화통화를 한 걸까. 나의 이번 여행의 종착지에 도착한 기쁨 때문이었나. 어쨌든 그 덕에 그리 감명 깊게 바람의 언덕을 감상하지는 못했다. 아니, 안 한 걸까. 기억에 남기로는 바람의 언덕은, 그냥, 바람이 부는 언덕이었나.
그래도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나 통화 중이었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지금 여행을 떠나왔고, 바람의 언덕이라는 곳에 왔어. 어, 휴가거든. 너는 뭐하고 있었는데? 뭐라고? 바람 소리가 너무 많이 들린다고? 여기 바람의 언덕이라서 그래. 거 바람이 많이 불 것 같고 그런 이름이지 않아? 생각보다 많이 바람이 부는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보다 잘 수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전해지는구나.
그래서 결론은, 바람의 언덕은, 일단,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구나,였다. 가장 큰 여행의 목적지였지만, 가장 가볍게 지났다. 뭐 어찌 보면 이것 역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들을 보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보고, 나중에 다시 오고 싶은 곳을 하나 추가하고. 아니면 지우고. 생각대로 움직일 수도 있지만, 생각대로 안 움직여도 보고. 생각대로만 할 순 없으니.
내가 처음 바람의 언덕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한 책에서는, 여행의 목적을 두 가지라고 이야기했다. 조금 극단적인 표현이었는데, 그건 책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가 보다. 여행은, 어쨌거나 보러 오는 것이다. 생각한 것과 생각지도 못한 것과 그리고 생각을. 그런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 그리고 다시, 여행의 끝은 침대로. 침대는 거 바람을 잘 막아줬다. 그래서 또, 잤다.
글을 쓰기도, 글을 그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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