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소리 없는 눈물

by 권희일

매서운 추위가 계속된다. 온천하가 꽁꽁 얼어붙어 있어서 사람들 마음마저도 얼어붙게 만든다. 친정어머니의 10주기 제삿날 (동짓달 열여드레)이다. 서울 천안에서 사는 여동생들과 함께 친정에 갔다. 올케 두 분만이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주신다.


건넌방에 짐을 풀었다. 벽에 걸린 아버님 어머님의 흑백사진 속에서 환한 미소로 너희들 왔느냐! 하시며 반기시는 듯하다. 어머님이 쓰셨던 백통 장롱이며 이불들이 그대로 있어서 어머님의 체취가 배어있는 것 같아 어머님과 마주한 느낌이기도 했다.


불현듯 첫아이 출산하고 친정에 와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삼복더위인데도 방이 차가우면 안 된다 하시며 어머님은 하루에 한 번씩 불을 때셨다. 나는 더위를 이기지 못해 온몸에 얼굴까지 빈틈없이 땀띠가 돋아났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하더니 화농이 되어 따끔따끔 화 젓갈로 지지는 것 같아 고문당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열을 식혀 주려고 어머님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찬 물수건을 번갈아 얼굴에 대주셨다. 따끈한 밥과 미역국을 참참이 챙기시느라 밤잠도 설치셨고, 한시도 나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셨다.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주셨기에 땀띠도 잦아들고 몸이 조금씩 회복이 되었다. 한 달이 지나서야 어머님이 아이를 안고 시댁에 돌아갈 수 있었다.


시어님 어머님 두 분 겸상한 밥상에서 친정어머님이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눈물은 빠른 속도로 전염되는가 보다 나도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얼른 자리를 피해 부엌으로 갔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숭늉을 들고 들어왔다. 두 분은 아무 말씀도 없이 느린 식사를 하신다. 시어머님 안색을 살펴보았다. 어머님의 눈물을 보셨다면 오해라도 하실까 싶어서다. 안색은 담담하시지만 뭐라 말씀드릴 수도 없고 몹시 민망스럽다. 그때 나의 모습은 바짝 마른 명태처럼 볼품이 없었고 땀띠로 심하게 앓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이 흉측스러웠다.


시댁에는 3대가 함께 살았고 시동생 시누이들, 농사일로 또는 방앗간 일로 고용한 식솔 모두 20여 명이나 되어 대식구였다. 조석 챙기는 일만도 벅차다. 아이까지 생겼으니 힘든 것은 뻔하다. 내 꼴 보아하니 측은해 보여 어머님이 눈물을 흘리셨던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아이 넷을 낳았는데 둘째 아이 때만 빼고는 세 아이는 어머님이 산바라지를 해주셨다. 둘째 아이 떼는 남편이 교편생활을 하던 때여서 마침 여름방학에 출산하게 되어 시댁에서 시어머님이 해주셨다. 막내딸을 출산하였을 때는 시댁에서 식량을 갖다 먹을 때였다. 이제나 저제나 쌀을 기다려도 쌀이 오지 않으니까 어머님이 답답하셨던지 친정집에 가셔서 쌀을 머리에 이고 오셨다. 그 시절에는 차편도 불편하고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았다. 높은 산도 넘어야 했는데 무거운 쌀을 머리에 이고 오셨던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자식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렵사리이고 오신 쌀로 때때로 새 밥을 지어서 미역국과 수시로 챙겨 주셨다. 알뜰살뜰하게도 한 달 동안 보살펴주신 덕분으로 몸은 회복이 되었다. 어머님의 따스했던 손길과 사랑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린다.


어머님께서 11남매를 낳아 기르시며 힘들고 고달팠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흰 광목 치마에는 늘 애기 똥이 노랗게 묻어있었다. 밤낮없이 자식들 챙기시랴 많은 식구 빨래에 낮에는 밭일도 하시며 대식구 먹거리에도 온갖 힘을 기울이셨다. 기제사도 일 년에 10위 이상이 되다 보니 피곤함을 더해주었다. 일이 많아서 피곤함이 쌓여서 입병이 끊이지 않고 몸살도 자주 앓으셨다.


아버님께서는 한학을 하신 선비이셨다. 농사일은 잘 못하시어 어머님 몫이었다. 봄에 논 갈기를 두세 차례 할 때마다 소죽도 어머님이 머리에 이고 나르셨다. 소죽을 내려놓자마자 소는 단숨에 먹어치우고 지그시 어머님을 바라본다. 어머님은 소에게 한 말씀 건네주신다.

“소야! 고맙다. 너의 밥은 내가 잘 챙겨 줄 것이니 일만 열심히 해다오” 이렇게 소와 교감을 나눈 어머님은 머리 밑이 화끈거림도 다 잊으셨다. 어머님은 소죽뿐 아니라 밭에 있는 곡식 참외 푸성귀도 많이이고 나르셨다. 장날이면 자식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더 힘들게 머리에 이셨다.


어머님의 힘든 삶이 열 한 자식을 위한 희생이셨고 자식들에게 다 바치셨다. 교육열도 남달라서 동리에서 최초로 유학생 대학생을 5명이나 만들어내신 장한 어머님이시다. 평생 호미자루 벗 삼아 전답 일구시며 불경에 주문 외우듯이 입버릇이 되어버린 기도는 “11남매 수명장수 복 장수하라”라고 하셨다. 또한 어디에서든지 꼭 필요한 사람 으뜸이 되라는 기도 일념으로 사셨다. 그래서인지 11남매 오롯하게 성장했다.

어머님의 많은 자식 사랑은 오랫동안 자식들 가슴속에 그리움과 아쉬움만이 가득 채워져 있어 오늘 제사에 어머님과 함께 한 마음이기도 하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증손자들까지 각처에서 모여들었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몰라보게 자란 아이들을 보면 대견하기도 했다. 정겹게 마주한 얼굴들 오랫동안 끈끈한 정을 지속하기를 어머님도 간절히 바라실 것이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제사가 끝난 후에도 우리 가족들은 꼬박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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