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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나에게 눈부시게 빛나던 너의 환한 그 빛을..."

by 돌아보면

처음엔 후련했다. 밥 먹듯이 하는 야근에 뜬금없는 출장에 바쁘다고 사람 없다고 다른 부서 일 시키기는 이미 일상이었다. 이런 식으로 부려먹을 거면 돈이라도 많이 주던가. 신입 사원은 왜 안 뽑는데?


직장 상사들의 그게 사회다, 다른 데 가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직장 생활이란 게 다 그렇다 라는 식의 이야기는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나는 예정보다 1년이나 빠르게 이직을 준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구직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결국 더는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사장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기도 하셨고. 나는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사장님이 나한테 이럴 줄은 몰랐으니 서로 비긴 셈 치자고 속으로 생각하며 들어올 후임을 위한 인수인계 작업을 해야 한다며 회사에서 대충 시간을 때웠다


회사를 그만두고 2주 정도는 천국 같았다. 보고 싶었던 전시회, 영화, 드라마를 다 봤고 바쁘다고 못 만났던 친구들도 시간을 내서 전부 만났으며 가족들하고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퇴직금도 들어왔고, 한동안은 나만을 위해 살았다. 면접에서 떨어진 경우도 있었지만 퇴직 전에 몇 군데 정도 면접도 보러 다녀왔고 연락 온 곳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가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취업 정도야!'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퇴직 후 4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백수다.


바로 얼마 전, 퇴직금이 다 떨어졌다. 수입이 없어도 핸드폰 요금, 카드값 등 지출은 꾸준히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계좌를 따로 만들어 매월 조금씩 입금해 두었던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며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여자친구였다.


"뭐야~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아 미안. 진동 울리는 걸 늦게 봤어."


"자는 줄 알았잖아. 오늘 볼 거야?"


사실 그동안 돈도 별로 없고 자신감은 자신감대로 뚝뚝 떨어져서 여자친구를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면서 안 만났었다. 처음엔 취업도 잘 안되는데 여자친구 보고 있으면 그래도 기분은 좋으니까 만났었다. 돈이 떨어지기 전까진.


"아 몰랐는데 오늘 저녁에 할아버지 제사래. 그래서 이따가 가족들이랑 큰집 가야 될 것 같아.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래, 혼나겠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할아버지 제사 지지난달에 했었잖아."


아차.


"아. 외....할아버지 제사."


임기응변의 신이 있다면 지금 나에게 빙의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진짜 믿은 건지 믿어주는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여자친구는 알겠다고 했고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그날은.


문제는 다음 번 데이트였다.


"오빠 너 요즘 이상해."


"뭐가?"


"아니 요즘도 아냐 사실. 왜 자꾸 나 피해?"


"내가 언제 피했어?"


"무슨 각종 제사에 결혼식에 장례식에 아주 연예인이세요? 매번 약속 잡은 날만 딱딱 골라서 그렇게 맞춤형으로 바빠?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


"아냐 그런거..."


"그럼 뭔데? 왜 말을 못하는데? 뭐 때문인데?"


나도 그렇지만 남자들은 참 쓸데없는 자존심이 있다. 곧 죽어도 내 여자 앞에서 약한 모습, 약한 말하기 싫은 거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고 좋은 말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내 마음 같지 않고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나는 날이 갈수록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여자친구에게 소홀해져만 갔던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느라 한동안 말없이 있었는데, 갑자기 여자친구가 울기 시작했다.


"...오빠는 이제 내가 싫어진거야?"


"응? 아냐 내가 그럴 리가 있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요새 나 좀 살쪘다고 내가 싫어진거야?"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팔목이 이렇게 가느다란 애가 살이 찌긴 뭘 쪄? 너가 살쪘다고 하면 다른 여자들 다 반성하고 런닝머신 앞으로 뛰어가야 돼. 아니야."


"그럼 왜 내가 싫어진건데?"


"아냐 오빠 유진이 안 싫어 누가 그래 누가?"


위와 같은 심문... 아니 대화를 30분 정도 이어간 끝에 나는 결국 유진이에게 요즘의 내 상황을 사실대로 다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어이가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내가 유진이라도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었냐고 내가 고작 그 정도였냐고, 정떨어졌다고 헤어지자고 할 것 같았다. 그동안의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유진이는 그동안 본 적 없는 화난 얼굴을 하고 내게 말했다.


"겨우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그래, 예상대로의 반응이야. 그래서 말 안한다고 했는데...


"나는 뭐 다른 여자가 생겼거나, 내가 싫어졌거나 그런 줄 알고 요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근데 뭐? 돈이 없어서? 오빠한테 나는 고작 그 정도야? 돈 주고 나 만나? 우리 관계 겨우 이정도야?"


니가 무슨 마음일지 나도 알아. 표정관리가 잘 될지 모르겠지만... 각오는 돼 있으니까 빨리 말해.


"내가 그런 것 때문에 오빠 좋아서 만나는 줄 알아?"


???


"나는 뭐 큰 이유가 있어서 오빠가 좋기보다는... 그냥 누구보다 내 걱정 내 생각 많이 해주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보여주는 진짜 행복해서 웃는 그런 웃음 나한테만 보여주고, 내가 밤에 무섭다고 하면 잠들 때까지 통화해주고, 그런 사소한 마음들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오빠가 좋았던 거야. 돈? 그런 거 없다고 우리가 못 만나? 내가 언제 돈 펑펑 쓰면서 데이트 하재?"


"..."


"데이트하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 오빠랑 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요새 날씨도 좋은데 지난번에 나랑 한강공원 갔던 거 기억 안 나? 아침 좀 늦게 가서 거의 해질 때까지 재밌게 놀다 왔던 거 기억 안 나? 우리가 그래. 말도 잘 통하고 같이 있으면 너무 즐겁고 힘이 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해. 굳이 거기가 아니더라도 우린 언제 어디서라도 그랬어. 대답해봐 기억 안 나냐고!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 너무 좋아한다는 거 아니냐고!!!"










결혼 성수기는 아니었지만 웨딩홀이 으레 그렇듯 결혼식장 내부, 외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웨딩홀이 다른 웨딩홀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입구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단에는 하객들이 서 있지 못하도록 몇몇 직원들이 서 있었다. 하객들은 모두 계단 밑 공간에 있는 테이블에 앉거나 서 있었으며 다른 문이 있긴 했지만 잘 보이지 않았고, 밖으로 나가는 문이 가운데에 딱 하나라 나가게 되면 약간 어두운 결혼식장을 밝게 비추며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나갈 수 있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닌 그런 웨딩홀이었다. 웨딩홀 안에 있는 다른 홀보다 가격이 조금 더 비쌌지만 이 점 하나 때문에 연일 예약이 밀려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식장 한가운데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신랑만이 서 있었고 신랑의 손에는 마이크가 쥐어져 있었다.


"어...일단 이렇게 모여주신 하객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는 옆의 신부와 하객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웃음 지었다. 신랑의 열성적인 친구들을 시작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고 남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는 신부의 손을, 한 손으로는 마이크를 잡았다.


"흔한 주례사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서두가 꽤 길었죠? 오늘 굳이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하기로 한 건, 제가 언제부터 유진이랑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유진이에게도, 제 부모님과 유진이 부모님에게도, 그리고 하객 여러분에게도 알려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창 어렵고 힘들 때였는데, 끝이 없는 어두운 터널에서 빛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말을 마친 남자는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신부를 한번 보고는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준 후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뭐 저희라고 항상 달달하기만 했겠습니까. 별거 아닌 걸로도 다투고 목소리 높이고 싸운 적도 많습니다. 한 번은 카레에 글쎄 고구마를 넣었어요. 저한테 말도 없이! 저는 감자 좋아하니까 감자 넣어 달라고 했는데! 그래서 왜 고구마를 넣었냐고 물어보니까 그게 더 맛있다고 하더래요. 그런 얘기하다가 싸웠습니다."


하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구마 카레 레시피를 알려준 장본인인 신부의 어머님은 끅 끅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숙이고 웃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 울고 있던 신부도 입을 가리고는 웃고 있었다.


"유진아 너 울다가 웃으면 엉덩... 나중에 큰일 난다? 아무튼, 저희가 그렇습니다. 별거 아닌 거 가지고 되게 난리입니다. 하지만 별거 아닌 걸로도 되게 행복해합니다. 또, 저희는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의견이 틀어진 적이 없습니다. 만난 기간이 5년, 10년 이렇게 오래된 건 아니지만 우리는 서로를 그 누구보다 믿고 서로의 결정에 누구보다 강하게 힘을 실어 주곤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행복한 저희 모습 잘 지켜봐 주시고, 많이 응원해 주시고 많이 배 아파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남자는 마이크를 옆에 서있는 직원에게 넘겨주고 신부를 바라보았고, 신부도 신랑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처럼 따뜻하고 밝은 미소와 함께.




사실 남녀 간의 만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서로의 마음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런저런 현실의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도 사랑의 결실을 맺고 있을 이 세상 수많은 부부들의 앞길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기를.




https://youtu.be/D5Zz2T52QxA


[메이트(Mate) - 빛]


항상 나에게 눈부시게 빛나던

너의 환한 그 빛을 내가 비출게

끝이 없는 사랑을 너에게 줄게


쉽게 지나치기만 했던 이 곳에서

뒤돌아 보게 된 기억의 시간들

어린아이처럼 바보 같은 모습 속에

뜨겁게 타는 마음은 내일을 향해 흐르네


어떤 희망의 빛도 찾을 수 없어

어둡게만 느껴지던 많은 날들도

생각하면 헛된 것은 아니잖아

다시 찾아올 수 없을 것 같던

이렇게 펼쳐진 눈부신 내 하루는 꿈이 아니야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그곳에 내가 있을게


모두 끝난 거라 생각했던 날에도

언제나 내 곁에 함께 있어준 너

괜찮을 거야 너의 그 한마디 말에

몇 번이고 난 일어나 다시 걸어갈 수 있어


항상 나에게 눈부시게 빛나던

너의 환한 그 빛을 내가 비출게

이 목소리 내 눈빛을 느껴봐

따뜻한 너의 마음을 알았어

이젠 다시 너의 손을 놓지 않을 거야 나를 믿어줘

소중한 우리의 약속을 영원히 간직할게


어둠에 사라지는 지친 달처럼

또다시 밤으로 흐려진다 해도

새로운 아침이 너를 비춰 줄 거야


두려운 마음에 잠길 필요 없어

다시 해는 떠오를 거야


하루를 먼 곳에 있을 때도

이렇게 항상 너만을 생각하고 있어

변할 수 없는 나의 사랑은 나의 것


항상 나에게 눈부시게 빛나던

너의 환한 그 빛을 내가 비출게

이 목소리 내 눈빛을 느껴봐


다시 찾아올 수 없을 것 같은

하루를 이제 우리 함께 걸어가

꿈속에서 햇살이 비치는 그곳에


이제 너와 함께 꿈꾸며 날아가

앞으로 펼쳐질 눈부신 시간들을 생각해봐

영원한 사랑을 세상에 소리쳐

너와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

들어줘 함께 함께할 이곳에서


잊었던 꿈을 찾아서


잊었던 꿈을 찾아서


잊었던 꿈을 찾아서...

메이트.jpg 메이트(Mate) '명탐정 코난 8기 주제곡'(201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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