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흐리고 비

"지금 넌 어디서 내리는 이 비를 맞을까..."

by 돌아보면

※ 먼저 이 편을 읽어 주시고 다음 편도 함께 읽어 주세요.

이게 1편이고, 다음에 이어지는 '역'이 2편입니다.



매 년 겪는 건데도 불구하고 기억이 잘 안 난다. 장맛비가 언제부터 내리는 거였더라? 5월 말부터였던가 6월이었나 7월이었나. 모르겠다.


나는 여름에 절대 뛰지 않는다. 빨리 걷지도 않고 조바심을 내거나 화를 내지도 않으려고 노력한다. 저만치서 신호등이 바뀌어도 다음번에 건너면 된다며 느긋하게 걷는다. 여름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다 싫다. 특히 비가 싫다. 나는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 겨울에는 참 좋지만 여름에는 덥고 습하고 그냥 온 우주가 날씨를 이용해 내 화를 돋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겹다. 매 년 겨울이 되면 여름이 안 왔으면 하지만 계절이 왜 계절인가. 때 되면 다시 돌아오니까 계절 아닌가. 그렇게 여름엔 모든 게 싫었지만 딱 하나 좋았던 게 있었다.


"너는 어? 그렇게 돈이 많아? 자선 사업가야? 사랑의 우산 뿌리기 운동이야? 무슨 우산을 사면 잊어버리고 사면 놓고 내리고 사면 두고 나오고 사면 망가뜨리고 사면... 어휴 답답해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비 올 때마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미안... 그래도 오빠가 이렇게 데리러 와 줘서 만날 수 있잖아?"


"뭐래. 안 그래도 만나려고 했었거든? 바로 옆 건물이거든?"


"헤헤. 오빠 봐서 좋다."


"어차피 이따 집에 가면 볼 거잖아."


"그래도... 수업시간 내내 보고 싶었는데! 오늘 공강도 별로 없어서 힘들었단 말야."


"실없기는...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응 오빠 나는 파전!!"


"아니 밥 먹자니까?"


"응 오빠 나는 파전에 막걸리!!"


"...닭똥집 추가."


"콜!!"


그러면서 그녀는 내 어깨에 찰싹 붙었다. 나는 그녀가 비를 맞지 않도록 슬쩍 우산을 돌려주고는 오른팔에 그녀를 매달고 후문가의 전집으로 향했다. 계절이 바뀌어도 포지션은 그대로고 입는 옷만 바뀌었다. 반팔 티셔츠, 남방, 니트, 터틀넥 셔츠, 야상, 레인코트를 포함한 모든 내 옷의 한쪽 팔 부분에서는 항상 그녀의 냄새가 났다.



대충 이런 일상이었다. 대화에서 짐작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같이 살고 있다. 처음 각자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우리는 교제를 시작하고 200일 정도 지났을까, 방을 하나로 합치기로 했다. 그만큼 보증금을 포함해 여윳돈이 많이 생겼고, 우리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방을 구했던 이 돈을 헛되이 쓰지 않고 미래를 위해 모아둘 종잣돈으로 하기로 했다.


사실 처음부터 같이 살 생각은 없었다.


"아 이번 달도 빠듯하네. 안 그래도 과외 해달라고 연락 온 거 있는데 그거라도 해야겠다."


"나두... 역 근처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 구하던데 그거 해볼까?"


"역 근처? 역 근처면 엄청 바쁜 거 아냐? 너 어리바리 해가지고 잘 할 수 있겠어?"


"에이 오빠. 내가 이래 보여도 일 할 때, 공부할 때는 확실하다니까?"


"그럼 평소에 그러는 거 인정하는 거네."


"으..."


"하... 이렇게 돈 가지고 스트레스받을 바에야, 다정아. 우리 같이 살까 그냥?"


"어?!!"


"얘는... 싫으면 말지 무슨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아니야!!아니에요!!!완전!!좋아요!!!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정이와 같이 살게 되었다. 양가 부모님께서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네 분 다 생업에 종사하시느라 바빴고 가끔 굳이 학교 근처까지 오신다고 하면 우리는 집 대신 근사한 맛집으로 안내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끝끝내 집에 모시고 오지 않거나, 한 사람이 친구의 자취방으로 피난을 가서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치곤 했다. 지금도 부모님은 우리가 같이 살았었다는 사실을 모르신다. 멀더와 스컬리만큼은 아닐지라도 아마 우린 FBI에 들어갔어도 잘 했을 거다.


같이 살게 되면 숨길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대표적인 게 아픈 거다. 나는 감기에 잘 안 걸리는 편이다. 거의 1년에 한번 꼴로 아프곤 하는데 그 해 가을은 최악이었다. 아주 독한 놈이 우리 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찾아와서 우리는 수업시간 외에는 자취방 근처 약국 사거리에 있는 죽집에서 사온 죽을 먹거나 밥할 힘이 없어서 매번 음식을 시켜 먹곤 했었다.


"오빠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너는?"


"나는 괜찮, 콜록! 콜록! 괜찮아!"


"그래. 퍽이나."


다정이가 덥다고 차버린 이불을 다시 덮어 주고 부엌으로 향했다.


"오빠. 저녁 뭐 시켜먹지?"


"아냐. 오늘은 내가 찌개 끓여줄게. 따뜻한 국물 먹고 얼른 나아야지 우리 둘 다."


냉장고에서 야채랑 된장, 국물용 멸치를 꺼내 찌개를 준비하는 내내 뒤에서 하트하트한 눈빛이 콕콕 느껴져서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혼났다. 돌아보면 아마 찌개를 못 끓이고 다른 걸 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틱틱거리는 내 행동 때문에 아마 다정이는 내가 이런 생각 하고 있는 줄 몰랐겠지만.


그 집에서 꽤 오래 같이 살았었다. 우선 깔끔했고, 학교랑 그리 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시끄럽지도 않았으며 월세도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그런 자취방이 실제로 존재하냐고 묻는다면 본인의 운을 시험해보는 셈 치고 발품을 팔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방 구하느라 며칠을 고생했는지 모르겠다. 이 방이 어떤 방인데...


내가 그 집에서 나가게 된 건 졸업한 지 두 달 후인 4월이었다. 다정이는 전 학과를 불문하고 가장 자퇴 욕구가 상승한다는 3학년 1학기를 보내고 있었고 각종 팀 프로젝트와 개인 과제에 치여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취직을 자기 일처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지만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의 거리가 2시간 40분이라 회사가 제공해 주는 기숙사로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주말에, 아니 금요일 퇴근 후에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다정이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바보같이.



"오빠 지금 어디야? 몇 시쯤 도착할 것 같아?"


"어, 나 아직 회사야."


"응? 오늘 야근해? 금요일인데?"


"과장님이 부탁한 게 있어서. 그리고 끝나고 다 같이 회식한다고 남으래. 일단 일은 이따 일곱시 정도면 끝날 것 같아."


"무슨 회사가 금요일날 회식을 잡아? 미친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가끔 보면 회식하려고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몇몇 있는데, 그 사람들 직급이 다 높아."


"휴... 알았어. 오늘 저녁은 서진이 불러서 같이 먹어야겠다."


"그래, 미안해. 회식 끝나면 늦게라도 갈 수 있으면 갈게."


"알았어. 못 올 거 같으면 연락하고. 이따 봐~"


당연하지만 나는 그날 다정이에게 가지 못 했다. 같은 지역 군부대를 나왔다며 우리 과장님이 나를 쓸데없이 이뻐해 주는 바람에 나는 과장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구석 테이블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앉은 남녀 입사 동기들이 눈빛으로 힘을 보내주고 있었다. 미안한데 니네 그 가증스러운 눈빛 그 졸렬한 응원 하나도 도움 안 되거든? 하나도 힘 안 나거든? 너네가 와서 대신 앉아줘야 내가 힘이 나겠거든?이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과장님의 술잔을 받았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그때 행보관 몰래..."


행정보급관과 포대 행정병 몰래 자기 포상휴가를 조작해 휴가를 나왔다 들어갔다는 공문서 위조 범죄를 뭐가 자랑스러운지 틈만 나면 떠들어댄다. 범죄가 자랑인가? 회사에서, 회식 자리에서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다. 11번째까지 세다가 관뒀다. '이야, 정말 대단하시네요. 좋으셨겠어요!'라는 영혼 없는 리액션이 반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이렇게 프로 사회생활러가 되는 거구나 싶다.


"자 그럼! 우리 신입들은 내가 쏠 테니까! 2차 가자고! 어서!"


요즘 같은 세상에 사람이 눈치도 없다. 동기들과 1차 끝나고 흩어진 후 역 근처에서 집결하기로 했는데 과장님의 말 한마디에 우리 모두는 조용히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속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같이 방을 쓰는 입사 동기가 날 부축해서 택시에서 방까지 데리고 왔다고 했다. 창밖을 보니 해가 중천이다. 아... 다정이가 걱정할 텐데. 연락해 봐야지.


"야 근데 내 핸드폰 어딨냐?"


"아 맞다 너 그거 찾으러 가야 돼. 어제 택시에서 너 핸드폰 계속 찾았는데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우리 어제 갔던 술집에 전화해 봤는데 다행히 니 핸드폰 가지고 있다더라. 정신 차렸으면 속풀이 좀 하고 얼른 찾으러 가 봐."


"아... 내가 미쳤나 보다. 아냐 나 일단 먼저 찾아올 테니까 먼저 밥 먹어라."


똘똘한 입사 동기가 술집이 문 닫을 시간까지 계산해서 술집 밑에 있던 편의점에 핸드폰을 맡겼단다. 돌아가면 엉덩이라도 두드려 주면서 우쭈쭈 내새끼 잘했어요 해줘야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 배터리를 교체하고 켠 지 얼마 되지 않아 핸드폰이 부서질 듯 울렸다.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몇 통이 왔는지 모르겠다. 시간대를 보아하니 아침까지 주기적으로 계속 걸었던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에 바로 연락을 하려는데 마침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오빠는 대체 왜 연락이 안 돼??"


그렇게 시작해서 잔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회식 때문에 금요일날 못 간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마 그것까지는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취해서 연락이 되지 않았고, 걱정된 그녀는 밤새도록 연락을 하다가 지쳐 잠들었다고 했다. 아마 그동안 쌓아왔던 게 폭발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같이 살았었으니까 근 2년을 같이 살았던 게 된다. 그런 내가 갑자기 떠나갔으니 많이 허전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처음에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얘기가 길어지게 되면서 나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우리의 관계가 끝나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못 참고 화를 냈다. 투덜거리던 평소와는 다른 화라는 것을 전화기 너머의 그녀도 짐작했으리라. 그녀는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오빤 나를 사랑하기는 해?"


"뭐?"


"회사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해? 회식이 그렇게 중요하냐구."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회식에서 빠지면? 그럼 그 다음은? 내 회사 생활은? 너는 아직 직장 생활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뭐 좋아서 그 자리에 있었던 줄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래?"


"내가 뭘 몰라?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나도 들을 만큼 들었고 알만큼 알아. 그래도 내가 더 중요하다고 말이라도 해 주면 어디가 덧나?"


"최다정. 그만해."


"가끔 생각해보면 나 혼자만 오빠 좋아하는 것 같아. 혼자만 연애하는 거 같다고!"


"그만해 최다정."


"그렇게 딱딱하게 내 이름 부르지 마!"


"..."


... 그래. 그날의 일이 시발점이 되었고 결국 그 해 10월, 우린 헤어졌다. 하지만 나는 슬퍼할 틈도 없이 시카고로 해외 출장을 석 달간 가게 되었고 온 지 얼마 안 되어 이번엔 오스틴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타의였지만 도망치듯 해외 출장을 다녀오고 나니 정신없이 반 년이 지났고 나는 회사 기숙사에서 나와 회사와 적당한 거리에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늑한 방을 구했다. 입사 동기긴 했지만 냉정하게 말해 어쨌든 회사 사람이었고 보게 되면 또 회사 일이 생각나고 회사 이야기만 하게 되니까, 퇴근해서까지 회사 사람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생각난다. 비만 오면 생각나는 사람. 우산을 매 번 잊어버려 데리러 가곤 했던 사람. 하지만 그 모습이 전혀 싫지 않았던 사람. 지금 넌 어디서 뭘 할까? 깊은 한숨을 쉬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종일 오던 비는 점차 그쳐가고 덕분에 구름이 있긴 하지만 노을을 볼 수 있었다. 불현듯 떠오른 과거에 대한 미련을 해질녘 플랫폼에 두고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은 존재라 실수를 종종 하곤 한다. 실수는 허허 웃어넘길 수 있는 가벼운 것에서부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까지 다양하다. 이 중 후자의 경우는 보통 후회와 함께 찾아오곤 하는데, 후회는 한 번 오고 마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어쩌면 이 후회는, 실수를 되새기고 다시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몇 번이고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https://youtu.be/I-99vBR-QE4



[시진 - 흐리고 비(Feat.정기고)]


비만 오면 생각나는 사람

저 비를 함께 맞았던 사람

딱 하나의 우산에 다정하게 부딪치던 어깨


오늘도 참 많이 내린다

창밖으로 손을 내민다

이제 와 다 무슨 소용 있겠어


우리 둘 멀어졌던 그 이유 모두 지난 일일뿐

생각은 나도 이건 절대 네가 그리운 게 아냐


그저 라면을 끓이다

엎드려 만화책을 읽다

널어놓은 빨래를 개다

잠깐 쉬는 것뿐이야


지금 넌 어디서 내리는 이 비를 맞을까

누군가 네가 어깨를 기대는 사람은 있을까

우리 예전 모습처럼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이 그저 참 안쓰럽게 보여

분명 우리도 그럴 때가 있었지

이제 와 돌아보면


그대가 춥지 않아도 이불을 덮어주던 시절이

나의 마른 기침 한 번에 그대 가슴 내려앉던 시절이


이렇게 비라도 오는 날이면

우리 그 추억이 너를 못살게 굴지 않게

나 그저 바라고 또 바랄게


그리고 저 창밖의 비가 그치면 다 멈추면

나도 그만 멈출게


지금 넌 어디서 내리는 이 비를 맞을까

누군가 네가 어깨를 기대는 사람은 있을까

우리 예전 모습처럼


비가 멈추질 않아

비가 멈추질 않아

하루 종일 멈출 것 같지 않아


지금 넌 어디서 내리는 이 비를 맞을까

누군가 네가 어깨를 기대는 사람은 있을까

우리 예전 모습처럼...

시진 '흐리고 비'(2013.07.1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