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인 안된다며 사랑 하나면 된다며..."
※ 이전 포스팅 '사랑일뿐야'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전 편을 보시지 않은 분들은 '사랑일뿐야'편을 먼저 읽고 와 주세요.
※ 이전 편과 이번 편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실제와는 관계없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썼습니다.
희연이와 만난 첫날 모든 게 일사천리로 흘러가긴 했지만 사실 이번 연애는 많이 조심스러워야 했다. 가볍게 시작해서 짧게 만나는 연애는 이젠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특히 작년은 기묘했다. 연 초에 만났던 여자부터 해서 분기별로 한 번씩 이별과 만남을 반복했다. 친구들은 너 대체 뭔데 여자가 끊이질 않냐며 부러워했지만 정작 나는 마음이 텅 비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전혀 좋거나 신나지 않았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내 친구라면 그럴 바에 연애를 당분간 쉬고 공부나 운동 같은 다른 일에 집중을 해보면 어떠냐는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게 정답이다. 조언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으나 나라고 그런 걸 안 해본 게 아니다.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 나간 스터디에서 연애를 하고, 운동하려고 간 체육관에서 만난 여자 회원과 연애를 하고, 친구랑 술을 마시러 갔다가 친구가 부른 친구 동생 친구하고 연애를 하고, 아는 동생 연애상담 해주다가 점점 나한테 의지하더니 결국 얘랑 또 연애를 하고... 돌아보니 내 잘못이 맞네. 오는 여자 안 막은 거.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옆에 누가 없으면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 했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소위 '금사빠'. 이게 절대 좋은 것이 아니란 걸 작년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4/4분기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실감하게 되었다.
3개월 정도면 됐겠지... 하는 생각에 연지가 해주는 소개팅을 받았던 거고 거기서 희연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모아 두었던 '금사빠 게이지'같은 게 있어서 그런 게 한 번에 폭발해서 만난 날 바로 사귄 건가 하는 어이없는 생각도 잠깐 해 봤다. 하지만 어쨌든 이미 우리의 만남은 시작됐고 이번엔 결코 쉽게 끝내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희연이는 나보다 한 살이 많은 29살이었다. 야근을 많이 시키긴 하지만 자기 직장도 있고 꽤 좋은 학교도 나왔으며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하고도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주말은 거의 항상 붙어있다시피 했고 평일에도 나는 칼퇴근을 하는 편이니까 시간이 맞으면 운동을 빼먹고 희연이를 만나서 찡찡거리는 걸 들어주고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가끔 늦은 밤 지하철에 앉아 내 어깨에 기대 졸고 있는 희연이를 보고 있노라면 미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차로 편하게 데려다주면 참 편할 텐데 하고. 이런 속내를 이야기하면 희연이는 그런 말 말라며 지금 우리가 꾹 참고 열심히 돈 모으자고, 나중에 더 좋은 내일이 분명 올 테니까 같이 참아보자고, 나중에 여유로워졌을 때 지금 돌아보면 되게 흐뭇하고 웃음 나올 거라고, 그러니 그날을 위해서 같이 힘내자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런 여자였다, 희연이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내 옆에 있기만 해도 행복하다고 했었다. 나도 그랬고. 그래서 더더욱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좋은 것만 먹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년간의 연애 경험이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순간이 있었는데,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였다. 서울 인근의 맛집은 거의 꿰고 있는 편이라 어디서 만나도 뭘 먹을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주말마다 만난 우린 대학생들이 연애하듯 여기저기 쏘다니기 바빴다. 많은 곳을 갔었지만 희연이가 제일 좋아했던 곳은 인사동이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둘 다 과감하게도 월요일 반차를 써서 점심시간 이후에 종로에서 만났다. 사실 그날 원래 찾아가려고 했던 채식 식당이 있었다. 그런데 찾아가 보니 그날 영업을 안 한다고 해서 부랴부랴 근처의 한식당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도 저녁시간도 아닌 애매한 시간대라 식당 안의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창밖으로부터 들어와 창가에 있는 화분을 살짝 스치고 우리 앞의 식탁에 자리 잡았다. 목조로 된 식탁과 의자, 벽면은 약간 앤티크한 분위기를 풍겼으나 우리는 그 분위기와 적당히 흘러간 노래들이 인사동 골목길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음식 맛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다.
그렇게 두 달 정도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잘 만나고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신중하게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진아. 너는 나하고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어느 날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사실 희연이는 이전에 몇 번 지나가는 말로 '나도 이제 나이가 있다.',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결혼이란 건 우리가 '올해 목표는 다이어트!'라던지 '이번에는 적금을 얼마를 들어야지!'하는 계획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일이었다. 나라고 왜 희연이와 함께하기 싫겠는가.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도 진지하다 진심이다, 아직 초기라 뭐라 말할 순 없지만 앞으로 잘 할거다 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 이유를 대며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라고, 진지하다고 대답을 했다.
"하여튼 말은 진짜 잘해."
"...뭐라고?"
"듣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믿어버릴 것 같아. 그런데 너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어? 항상 말뿐이라는 말."
갑자기 왜 이렇게 태도가 돌변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말뿐이라고? 내 어디가? 나는 간다고 하면 갔고, 한다고 하면 했고, 우리가 하자고 했던 것들 다 적어놓으면서까지 하려고 했는데? 자기 기분 때문에, 일 때문에, 피곤해서 약속 취소한 쪽은 항상 희연이었다. 그동안의 이야기로 회사 상사들이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아니란 건 알고 있어서 업무 스트레스가 상당할 것으로 생각해 나는 항상 그냥 넘어갔었다. 그런 내게 말뿐이라니...
희연이는 막무가내였다.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서 다음날, 2주 정도 시간을 갖자는 말을 카카오톡 메시지로 전해 들었다. 내 답장도 전화도 받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이 말을 들은 내가 남은 일주일이 어땠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연락은 일주일 만에 왔다. 기분은 최악이고 과장님은 자기가 잘못해놓고 나한테 덤터기를 씌웠고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은 몇 번을 가르쳐도 매번 새로운 걸 배우는 양 눈빛만 초롱초롱했다. 똑같은 이야기를 일곱 번째 해주며 퇴근을 준비하려는 찰나 연락이 왔다.
"보고 싶어."
머릿속에서 그날의 운동 루틴과, 집에 닭가슴살이 남아 있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그런 게 지금 무슨 상관이람. 내 님께서 보고 싶으시다는데!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역시나 월요일 아침이었고 일방적인 이별 통보였다. 내년이면 서른이라고, 내년 목표가 결혼이라고, 그런데 지금 너랑은 아닌 거 같다는 말을 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라고 우리 좋았지 않냐고 회사 비상계단에서 했던 말들도 부질없는 외침이 되어 버렸다. 그때는 왜 그렇게 급하게 이별을 통보하는지 몰랐다. 알았으면 알았던 대로 힘들었겠지만 진짜 이유도 모른 채 일방적인 헤어짐을 맞이하게 된 나는 꽤 힘들었었다.
하지만 다년간의 이별로 단련되어 온 프로 이별러인 이 몸은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상생활을 이어갔다. 회사 일은 회사 일대로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친구들하고 여행도 갔고 계속 일요일 아침마다 나갔던 영어 스터디도 안 빠지고 나갔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친구가 목이 마르다고 해서 '그럼 집에 있는 물을 먹도록 하렴.' 이라고 답장을 했다가 '하지만 맥주를 쏜다면 어떨까?!'라는 문자 하나에 충신이 되어 달려나가 친구와 맥주 한 잔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알림이 와서 확인해보니 연지였다.
"야 성진! 바빠?"
"웬일이냐? 나 정현이랑 치맥하고 이제 집 다 왔어."
"아 뭐야 집이야? 됐다 그럼 너 내일 뭐 해?"
"나 맨날 그거 가지 스터디. 전에 얘기했던 거."
"너가 웬일로 그런 걸 꾸준히 하네."
"뭐래 근데 왜?"
"음... 그 스터디 어디서 하는 거야? 내일 좀 보자."
"내일은 끝나고 바로 일이 있어서 좀 그렇고 다음 주 어때?"
"뭐... 다음 주도 괜찮겠다 그래 다음 주에 봐 그럼."
희연이랑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연지랑은 계속 잘 지냈다. 그래도 서로 일을 하는 입장이었고 최근엔 둘 다 바빠서 이런 식으로 간간이 연락만 하곤 했는데 웬일로 먼저 보자고 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씻고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눕자마자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찾게 되어서 이대로 잠들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불을 안 껐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쉬며 일어나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아까 그 자세를 찾아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고 뒤척거리던 나는 무심코 카톡 친구 목록을 쭉 내리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남희연(4/9)'
그러고 보니 번호를 안 지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얘는 뭐하고 지내나 하고 프로필 사진을 봤다.
행복해 보였다. 하얀 웨딩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렸다. 나를 향해 있었던 반달 모양 예쁜 미소는 옆의 낯선 남자를 향해 있었다. 1년 전이 문득 떠올랐다. 그냥 거추장스러운 짐을 내려놓듯 나를 내려놓고 떠나간 희연이가 떠올랐다. 짐작은 확신이 됐고 나는 왜 연지가 나한테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상대는 희연이보다 6살이 많았고, 맞선을 통해 만났다고 했다. 언제 만났는지는 끝내 연지가 말해주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나랑 있기 이전이냐 이후냐 라는 물음에 대답을 못 한 것으로 봐서는 아마 내가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의외로 화는 나지 않았다. 그냥... 원하는 걸 이루었구나, 잘 됐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나진 않았지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울진 않았고 그냥 좀 많이 슬펐다. 머릿속에선 멋대로 돈에 팔려가는 나쁜 이미지를 그렸지만 그러기에 사진 속 두 사람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런 나쁜 생각을 하는 것조차 미안해질 정도로. 연지를 만나서 마저 추궁을 했더니 잠깐 표정이 복잡해지더니 이내 사실대로 다 말해 줬다.
"야 성진아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내가 괜히 소개해준다고 난리 피워서 이렇게 된 것 같아."
"됐어. 뭐 이렇게 될 줄 알았나."
"... 희연이가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
"..."
지지배가 괜히 더 뒤숭숭해지게 그런 쓸데없는 말은 왜 해가지고... 뭐 그래도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걸로 봐서 나도 이제는 완전히 마음 정리가 된 것 같다.
세상에는 다양한 노래 가사가 있어서 가끔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노래를 들을 때면 서글퍼지는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린 정말 너무 잘 맞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잘 맞는 것이 아니었고 서로가 서로의 짝이 아니었다. 그냥 그것뿐이다.
적어도 널 보고 웃고 있는 그 사람은
아마도 지하철이나 버스로 널 집에 데려다주지는 않겠지.
적어도 너랑 함께 살게 될 그 사람은
아마도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일 할 필요 없이 널 편하게 해 주겠지.
적어도 네 손을 잡고 있는 그 사람은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줘서 널 만족시켜 줄 수 있겠지.
덕분에 나도 이제는 외롭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네.
개인적으로는 안 행복했으면 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행복한 편이 좋을 것 같아.
더 좋은 내일을 위해서
참아달라고 해놓고
사랑한다며 기다리라며
이제 와 떠나면 어떡해
가난해도 오늘 니곁에서
웃으면 행복했는데
걱정 말라며 갚아준다며
날 위해서라며 왜 이래
사랑한다며
우린 다르다며
우린 특별하다며
멋진 차 화려한 집
diamond ring
지금은 다 필요 없다며
하나둘씩 차근차근
조금씩 만들어가며
진짜 사랑과 행복을 느끼자며
나 믿는다며
남들 다하는 이별
우린 하지 말자며
나 없이 이제 못살게 됐다고
책임지라며
나랑 먹는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며
나 아닌 그 누구도 널
데려갈 자격 없다며
도대체 뭐가 널 데려간 거야 liar
더 좋은 내일을 위해서
참아달라고 해놓고
사랑한다며 기다리라며
이제 와 떠나면 어떡해
가난해도 오늘 니 곁에서
웃으면 행복했는데
걱정 말라며 갚아준다며
날 위해서라며 왜 이래
사랑한다며
난 알 수 없는 미래지만 가고 싶었어
난 너에게 받은 사랑 전부 갚고 싶었어
하루 종일 서 있다 앉으니까
이젠 아예 눕고 싶니
사랑이었던 내가
짐처럼 느껴져 내려놓고 싶니
어두운 저 밤 같은 내 맘속에
저 달 저 별 보다 밝은
아침의 태양을 택한 넌
나 없인 안된다며
사랑 하나면 된다며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여기 날 택한다며
이렇게 원망해도
널 잡을 자신감 없는 나
나에게 제일 큰 가난은 바로 니가 없는 나
더 좋은 내일을 위해서
참아달라고 해놓고
사랑한다며 기다리라며
이제 와 떠나면 어떡해
가난해도 오늘 니 곁에서
웃으면 행복했는데
걱정 말라며 갚아준다며
날 위해서라며 왜 이래
사랑한다며
나를 떠나면 그에게로
가면 행복할 것 같니
누가 뭐래도 우린 영원할 줄만 알았어
난 너의 두 손
영원히 잡을 줄만 알았어
나의 꿈을 너와 함께
이룰 줄만 알았어
이 세상이 변해도 넌
아닐 줄만 알았어
세상에 화려한 것들은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웠던
우리를 잊지 마
세상을 다 가져도 원하는 걸 이뤄도
네가 없으면 그건 결국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냐
바보야 오늘은 웃어도
결국에 울게 될 거야
돈이 많다고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 살고 있어도
힘들어도 지금이
소중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다 포기하며 기다리라며
참았던 그날은 없는 걸
사랑한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