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 이번에도 2부작입니다. 다음에 올라올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가 소개팅을 하나 해 준다고 했다. '빠른'년생이라 학교를 나보다 1년 빨리 다녔던 친구의 절친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1살 연상이구나.
"얘 진짜 이쁘고 착하다니까? 맨날 그렇게 우울한 얼굴 하고 다니지 말고 한번 만나 봐."
"야 너네 여자들은 맨날 자기 친구 보고 이쁘다고 하잖아."
"이게? 누나가 지금 친히 소개팅 시켜준다는데 싫다고?"
"와 나 진짜 어이가 없네. 너 항상 그런식이야 진짜 웃긴다. 착각하지 마. 니가 그런 식으로 밑도 끝도 없이 소개팅 시켜준다고 하면 내가 기분이 참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마이 로드."
"어휴... 니가 그럴 줄 알았다. 폰 줘봐. 걔 번호 찍어 줄게. 매너 있게 잘 해라?"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나으리!"
친구는 내가 예전에 소개팅 주선해서 만난 형이랑 잘 만나고 있었다. 나는 헤어졌는데 자기는 잘 만나고 있었던 게 내심 마음에 걸렸는지 어느 날 갑자기 와서 저렇게 소개팅 이야기를 꺼내고는 친구 번호를 나에게 찍어 주었다.
번호를 추가하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집에 도착해서 씻고 침대에 철푸덕 드러누웠다. 이쯤 되면 친구도 미리 언질을 넣어 뒀겠지 싶어서 아까 받아둔 번호로 연락을 해 보기로 했다. 따로 사진 받은 게 없어서 사진을 좀 찾아보려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나 카카오 스토리를 살펴봤는데 자기 얼굴이 나온 사진이 단 하나도 없었다. 얼굴을 모르니 페이스북을 뒤져본 들 무슨 소용이랴. 그래... 사진이야 뭐 만나면 알게 되겠지 하고 어떻게 말을 걸지를 고민했다.
소개팅 첫 멘트는 항상 고민하지만 결국에는 가장 보편적인 게 가장 리스크가 적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국엔 비슷비슷하게 보내게 되는 것 같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내 기준'에서 보편적인 거다. 그러니 더 좋은 멘트가 있다면 언제든 개인적으로 알려주기 바란다.
"안녕하세요. 연지 소개로 연락드려요. 저는 김성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알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당연하지만 답장은 바로 오지 않을 것이다. 이건 나름의 탐색전이라고 생각한다. 나조차도 번호를 받은 지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연락을 하지 않는가. 사실 나만 이러는 것도 아니다. 언제 누가 퍼트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소개팅 초반의 2대 불문율이 있다. '바로 연락하지 마라.'라던가 '답장 너무 빨리하지 마라.'가 그것이다.
이를테면 '처음부터 마음 다 주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려는 마음'인 것이다. 지금에야 소개팅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늘 하던 대로 몇 시간 후에 보내곤 하지만 처음엔 그렇게 마음을 숨겨야 한다는 게 싫었다. 누가 퍼트렸는지는 몰라도 제발 내 눈에 띄지 말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랬던 과거의 자신을 잠시 떠올린 후 피식 웃으며 폰을 침대에 던져두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자마자 침대 쪽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남희연이라고 해요. 저도 반갑습니다!^^"
답장이 3분 만에 왔다. 나는 번호 받은 지 4시간 있다가 보냈는데.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미안해해봐야 알지도 못할 거고 미안해한다는 걸 알아도 왜 내가 미안해하는지 모를 테니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두고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그녀와의 카톡을 시작했다.
사실 그렇게 많은 말들을 하지는 않았다. 서로의 공통분모인 연지를 알게 된 계기, 서로의 사는 곳과 하고 있는 일 등에 대한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답장이 빨라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소개팅이 늘 그렇듯 그런 식으로 서로의 호구조사를 하다가 만날 날과 장소를 정했다. 이번 주 일요일 2시. 앞으로 4일 남았다.
4일 동안 특별한 연락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운동하고 집에 와서 게임을 잠깐 하다가 드라마를 보다가 잤고 그녀도 마찬가지로 회사를 갔다 와서... 뭐라도 했을 것이다. 사실 그때 연락을 잘 안 해서 모른다. 토요일은 선약이 있다고 해서 일요일로 약속을 잡았고 나는 오전에 스터디 모임을 갔다가 점심을 안 먹고 바로 약속 장소로 가기로 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3월이었지만 말이 3월이지 아직 쌀쌀하다. 나름 아끼는 옷들을 골라 입고 만나기로 한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밑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아침에 나오면서부터 틈틈이 연락을 했고 그녀도 시간에 맞춰서 도착할 거라고 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알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모른다. 그동안 소개팅 많이 했다면 나름 많이 했다고 자부했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사실 조금 떨렸다. 약속시간에서 10분 정도 지나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아니에요 저도 손에 뭐가 묻어서 화장실 다녀오느라 괜찮습니다!"
"아... 저도 화장실 갔다가 나오는 길이거든요. 그럼 어디쯤 계세요?"
"저 지금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오시면 있는 역 광장에 있어요."
"아하 내려가셨구나. 금방 갈게요! 끊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그리고는 구두를 신고 뛰는 또각또각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그런데 이 역 내부도 꽤 넓고 에스컬레이터도 긴 걸로 알고 있는데...
"저기요 희연 씨."
"헉...헉... 아 네!"
"천천히 오세요. 저 어디 안 가요."
"아... 그렇지만 죄송해서요!"
"진짜 괜찮아요. 그러다 넘어져요."
"네... 네! 감사합니다! 어... 저 성진 씨 보이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에스컬레이터 쪽을 바라보았다. 이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그녀 혼자만 바빴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는데 용케 잘도 내려오는구나 싶었다. 점점 가까이 오며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세상에... 나중에 잘 되건 안 되건 연지한테 항상 고맙고 사랑한다고, 충성을 다 하겠다고 해야겠다. 사진이 왜 없냐고 불평불만 한 마디 하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며 희연 씨를 맞이했다. 너무 열심히 뛴 그녀를 위해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을 주었다.
"아니 그러게 배도 고프실 텐데 왜 뛰고 그래요. 진짜 괜찮은데."
"제 시간에 맞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지하철이 연착을 했어요. 거울도 안 보고 바로 올 순 없어서 화장실까지 들르느라 늦었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오느라 고생했어요. 얼른 밥 먹으러 가요."
그녀는 예뻤다. 희고 고운 피부에 가냘픈 몸매, 뭣보다 제일 좋았던 건 웃을 때 약간 반달 모양이 되는 눈이 너무 예뻤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나는 내내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 개그 코드에 맞춤형 설계라도 되어 있는 듯 그녀는 내가 뭐 하나만 던지면 웃음이 빵 하고 터져버리곤 했다. 아니, 딱히 던진 게 없을 때도 그녀는 웃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나저나 소개팅하면서 샤브샤브 칼국수 먹는 건 처음이네요."
"그러게요. 그런데 제가 목이 지금 좀 안 좋아서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었는데 좋은 곳 잘 찾아 주셨네요."
"네 저도 국물 좋아해요. 소개팅하면 파스타 집 가고 그러잖아요. 보통은."
"그러니까요. 우리 여자들은 무조건 파스타 좋아하는 줄 안다니까요?"
"다 좋아하는 건 아니죠. 저도 사실은 밀가루 별로 안 좋아해요."
"어? 칼국수도 밀가루로 만든 거 아니에요?"
"엄... 그... 서양 밀가루! 서양 밀가루를 싫어합니다! 국산 밀가루를 좋아해요 제가."
지금 다시 쓰면서도 대체 여기의 어디가 웃음 포인트인지 모르겠다. 이 시덥잖은 말에 그동안 입을 가리고 웃으며 이미지를 관리하던 그녀는 미처 입도 가리지 못하고 크게 빵 터져버렸다. 오죽했으면 음식 가져다 주시면서 이모가 한 마디 하셨겠는가.
"아유 우리 색시는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그렇게 신났을까? 남자친구가 그렇게 좋아?"
저기 이모님... 그렇게 화끈하게 지원사격해 주시면 진짜... 존경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서 - 나중에 물어보니 이모님이 '색시'라고 불러준 것도 웃겼단다. 세상에... - 내가 대신 대답했다.
"아 이모. 저희 오늘 처음 만났어요. 지금 소개팅하고 있어요."
"아 그려? 뭔 소개팅을 밥집에서 한디야~ 좀 더 고급진 곳에서 하지 않구!"
"에이 이모. 요즘은 그런 거 없어요. 다들 각자 하고 싶은 데서 하더라구요."
"아유 그래? 우리 아들내미가 마침 손님 나이대쯤 될텐데."
"아 그래서 엄마 보러 왔잖아요."
겨우 진정하고 나와 이모의 만담을 지켜보던 그녀는 이게 뭐라고 여기서 또 빵 터졌다. 아들 생각이 났는지 이모님은 우리 테이블을 조금 더 신경 써 주셨고 덕분에 아주 즐거운 식사 시간이 될 수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그녀가 조금 걷자고 했다. 나도 걷는 걸 좋아하고 마침 근처에 대학교가 하나 있었다. 주말에 대학 캠퍼스라니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문득 느낀 건 우리가 쉬지 않고 계속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잘 통할 줄 알았다면 만나기 전에 진작 많이 이야기해둘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거의 30분 정도 걸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으려니 목이 말라 왔다. 근처엔 마침 미리 알아본 카페가 있었고 그녀도 마침 목이 말랐다고 해서 카페로 갔다. 일요일 점심 치고는 사람이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왁자지껄하진 않은 분위기라 좋았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통점도 많았다. 가장 좋았던 건 우리 둘 다 일기를 쓴다는 점이었다. 예전에 문구점 가서 샀던, 거의 16절지 스케치북 크기의 일기장을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자 그녀는 또 빵 터졌다. 이쯤 되자 난 그냥 내 얼굴이 웃겨서 웃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카페에서 우리는 서로 말을 놓았고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여자친구가 아닌, 처음 보는 여자와 카페에 그렇게 오래 앉아있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일곱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카페 밖을 나왔다. 소개팅이란 게 으레 그렇듯 박수칠 때 떠날 줄 알아야 한다. 아쉬워도 '적당히' 끊어야 하는 법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5시간이면 이미 소개팅 치곤 사실 굉장히 오래 만난 편이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역이 나온다. 그곳에서 오늘의 작별 인사를 해야 할 터였다. 그럴 계획이었다. 내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저기 희연아."
"응?"
"괜찮으면 맥주 한 잔 더 하고 안 갈래?"
아마추어도 아니고 이게 무슨 말이람. 황급히 아니라고, 그냥 해 본 말이라고 얼버무리려는 찰나 희연이가 대답했다.
"그럴까? 마침 저 길 꺾어서 조금만 가면 내가 좋아하는 맥주집이 있어."
우리 속담 중에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다.'라는 말이 있다. 뜻하지 않은 행운에 내가 좋아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희연이는 웃으며 내 손을 살짝 잡고 앞장섰다. 손을!
"말을 많이 했더니 목마르네. 금방이니까 얼른 가자."
약간 어둑어둑한 맥주집에 나란히 앉아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하루 온종일 이야기를 했는데도 할 얘기들이 계속 샘솟았다.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고 나는 한창 꽂혀서 듣던 노래들을 추천해 주었다. 가사가 마음에 든다는 희연이에게 다음 번 만날 때까지 감상문을 써오라고 했다. 이게 왜 웃겼는지에 대한 의문은 이젠 아무래도 좋은 것 같으니 접어두기로 했다. 또, 개그 프로그램이나 보이는 라디오 방청을 안 해봤다는 희연이의 말을 들은 나는 호기롭게도 사연을 써서 방청 신청을 한 후 꼭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약속을 한 것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는 계약서까지 썼다. 이런 데다 쓰라고 회사에서 계약서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가능하면 계약서 쓰는 법 보다는 글씨 예쁘게 쓰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내가 써내려가는 내용들을 보며 눈을 반짝이던 희연이가 말했다.
"뭐야 진짜. 나 이런 거 처음 해봐. 그것도 소개팅 첫날인데."
"나도야. 나는 그럼 뭐 프로 계약러여? 만나는 사람마다 계약서 쓰자고 하게?"
또 웃느라 잠시 대화가 멈췄다. 앞으로 같이 있을 때를 대비해 수화를 익히거나 필담을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화장실을 다녀온 후 자연스럽게 희연이의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도 함께 찍고, 자연스럽게 손도 잡게 되었다. 그 시각 내 머릿속에서는 '말해! 질러 버려!'군과 '진정해! 그래도 첫날이야! 좀 더 지켜봐!'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투는 이내 '말해! 질러 버려!'군의 승리로 끝났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잡은 손을 더 꼭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소개팅 첫날, 연애소설 속 이야기처럼 우리의 만남이 시작됐다.
공통점이 많았던 것, 내 이상형이었던 것, 개그 코드가 잘 통했던 것, 말이 잘 통했던 것, 식당 이모가 도와주었던 것, 날씨가 너무 화창했던 것. 만나기 전 가지고 있었던 '적당히 거리를 두려는 마음'은 나도 모르는 새에 사라져 버렸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니, 이제 와서 우연은 무슨. 지금도 온몸으로 느끼고 있잖아. 그냥 그거야. 존재 자체로도 너무나 달콤한 이 사랑.
'사랑'. 우리들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 때로는 눈물 지으며 슬퍼하더라도 결국 다시 웃게 만드는 것, 타인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소중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 너와 나를 만나게 해준 것.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너는 내게 묻지만
대답하기는 힘들어
너에게 이런 얘길 한다면
너는 어떤 표정 지을까
언젠가 너의 집 앞을 비추던 골목길 외등 바라보며
길었던 나의 외로움에 끝을 비로소 느꼈던 거야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그대는 나의 온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사랑일뿐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너는 내게 묻지만
대답하기는 힘들어
너에게 이런 얘길 한다면
너는 어떤 표정 지을까
언젠가 너의 집 앞을 비추던 골목길 외등 바라보며
길었던 나의 외로움에 끝을 비로소 느꼈던 거야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그대는 나의 온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사랑일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