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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어제도 널 바래다 줬는데..."

by 돌아보면

우리는 2년 7개월의 교제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장거리 연애였냐고? 주말 커플이었냐고? 짝사랑이었냐고? 혹시 여자친구가 모니터 밖으로 못 나오는 거 아니냐고? 야이... 말이 심하네. 전부 아니야.


말하자면, 바다 같은 여자였다. 예전의 나는 지금보다도 철이 없어서 항상 잘못하는 쪽이었고, 나중에 가서 항상 사과하는 쪽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항상 일부러 그런 게 아니지 않냐며 괜찮다고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된다고 말하며 내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런 점이 너무 고마워서 나는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친구들도 잘 좀 하라며 제수씨 다음 생 위해서 덕 쌓는거 아니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이 우리를 오랫동안 만나게 해 준 원동력이라고 자부했으며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주변 친구들에게 '야 너는 임마 그래서 안돼. 니가 사랑을 알아?'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취향이 전부 다 같았던 건 아니지만 그녀는 뭐든 다 괜찮다고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가서도, 포켓볼이나 당구, 볼링 같은 걸 칠 때도, 술을 마실 때도 그녀는 어떤 것이든 다 좋다고 괜찮다고 해서 결정하는 쪽은 대부분 나였다. 이런 식으로 다 괜찮아 라고 하는 여자와 있으면 항상 뭔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는 남자들도 있겠지만 이것저것 재미있는 것들을 찾기 좋아하고 함께 뭔가 해보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딱 맞는 여자였다.


그날도 만나서 같이 볼링을 치고 저녁을 먹었다. 여느 때처럼 술도 한잔했고 둘만의 시간도 함께했다. 늦은 새벽에 집에 가게 되면 늘 그랬듯 택시를 함께 타고 집 앞까지 데려다줬고 낮과는 다른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집까지 걸어가고 있노라면 씻고 나온 그녀에게 연락이 와서 카톡이든 전화든 집에 갈 때까지 함께 이야기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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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기엔 좀 먼 거리 아냐 근데?"


"아냐. 원래 내 걸음이 빠른 것도 있고, 밤이라 선선해서 걷기 참 좋아."


"그래도...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아직도 날 몰라? 나는 거울 볼 때가 제일 무서워.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걱정 안 해도 돼."


"푸흡."


"뭐야 왜 웃다 말아? 뭐야? 억지웃음이야 뭐야?"


"아니 그게 아니고 가족들이 다 자가지고... 크게 웃으면 깬단말야."


그렇게 꼭 그녀를 한 번씩 웃기면 내가 개그맨은 아니지만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웃게 해 준다는 건 이렇듯 기분 좋은 일이구나라고 생각할 때쯤 집 근처에 도착한다.


"나 이제 아파트 단지 들어섰어 다 왔어."


"응 오늘도 너무 고생했어."


"고생은 무슨. 좋았으면 좋았지. 너야말로 나 기다린다고 잠도 못 자고 어떡해?"


"내가 할 말이지. 나 때문에 집에 매번 늦게 들어가고..."


"우리 그거 같아, 의좋은 형제. 아이고! 형님 먼저! 아이고! 아우님 먼저!"


"아 진짜 뭐래~ 자꾸 웃기지 말라니까?"


늘 이런 식으로 장난도 치며 즐겁게 통화를 하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우리가 헤어지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물론 내가 그날 잘 했다는 건 아니다. 약속시간이 2신데 2시 반에 도착했다. 낮에는 버스나 지하철을 한번 놓치면 그다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늦은 것이 첫 번째 이유, 간만에 공휴일까지 낀 연휴라 정말 마음 푹 놓고 늦잠 자서 늦게 나온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늦어서 정말 미안하다고 보낸 카톡에 답장이 없을 때도, 전화를 받지 않을 때만 해도 나는 바보같이 화장실에라도 갔겠거니 하고 안심했다. 굳은 표정의 그녀를 보고서도 말이다.


"아 진짜 미안해 내가 늦으려고 그런 게 아니고 오는데 버스랑 지하철이 그렇게 나를 안 도와주더라고."


"..."


"미안해 진짜 미안해 간만의 휴일이라 내가 너무 여유를 부렸..."


"이번에도 내가 '괜찮다'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넌."


"어...?"


"항상 그랬잖아. 잘못은 니가 다 하고 사과도 니가 다 하고 나는 항상 괜찮다고 했으니까.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겠지."


"야 서연아... 왜 그래 갑자기 무섭게."


"무서워? 내가? 나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하는 게 없는, 눈치 없는 너를 계속 보고 있는 게 더 소름이 돋아."


"...?"


"있잖아. 내가 괜찮다 라고 말한 건... 물론 정말 신경 안 써서 괜찮아서 그런 것도 있었어."


"아니 나는..."


"그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니가 잘못했을 때 내가 괜찮다고 한 건, 썩 맘에 들거나 좋진 않지만 그래도 너니까 한 번쯤은 괜찮다는 의미였어."


"..."


"2년이 뭐야. 조금 있으면 3년이 돼, 우리. 물론 처음이랑 다른 것 없이 항상 달달한 건 나도 좋아. 하지만 그 달달함 속에 눈치 없고 제멋대로인 너도 함께 있어. 이 달달한 기분 사랑스러운 기분 놓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야. 너랑 계속 함께 한다면 이런 날들이 계속되겠지. 그 말은, 너는 너대로 계속 제멋대로 일 거고 나는 그저 괜찮다고만 하며 속으로 삭혀야 한다는 뜻이야."


"서연아..."


"몰랐겠지만 나 볼링 치는 거 안 좋아해. 팔에 힘도 없는데 볼링공은 너무 무겁고, 치고 나면 다음날은 항상 손목이 아파. 포켓볼도 왜 재밌다고 하는지 모르겠고 배드민턴도 너무 힘들어. 화장도 다 지워진단 말야."


"나는 진짜 몰랐어... 언제든 좋다고 했잖아."


"니가 좋아했으니까."


서연이의 말을 들으면서 지난날 함께 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런 기분이었구나, 그때 나만 좋았었구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할 말을 잃은 나를 바라보며 서연이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볼링을 친 다음날 힘이 없을 때, 배드민턴 다 치고 공원 화장실에 들어간 내가 한동안 나오지 않을 때, 니가 좋아하는 것들을 같이 하면서 내가 너만큼 신나지 않아 할 때 너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어. 너만 좋으면 됐던 거야. 이제 나는 그런 반쪽짜리 배려 못 참겠어. 지쳤어."


"..."


"여기까지, 오늘까지인 것 같아 우리."


그날 수원역 지하, 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그 길 위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서연이는 그 말만을 남기고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갔고 5분 남짓한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그 긴 시간 동안 서연이에게 미안해하지 않았던 것만큼의 미안함을 받아들이느라 멍청한 대답을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뒤늦게라도 뛰어가서 서연이를 잡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마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쫓아가서 그동안 진짜 몰랐다고, 앞으로 정신 차리겠다고 했다면 서연이는 알았다고, 이제 알았으니 괜찮다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달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연락한 적 없고 연락 온 적도 없으며 마주친 적 또한 없다. 일 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연락하면 어떻게 대답할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웃으며 이제라도 왔으니 괜찮다고, 다음부터는 가란다고 진짜 가지 말라고 대답해줄ㄲ... 하, 아직도 서연이가 괜찮다고 해줄 줄 알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나는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는가 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핸드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아직 사진첩 숨김 폴더에는 서연이와 함께 한 사진이 있지만 이제는 지워야겠다. 아마 오늘 당장은 못 지우겠지만 언젠가는 지울 것이다. 지금 누군가를 만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나 같은 건 잊고 다음에 만날 누군가와는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또 일 년이 지났다.


나는 오랫동안 써 오던 핸드폰을 바꿨고,


예전 핸드폰에서 사진을 한 번에 넘겨받아


폴더별로 정리하고 지울 건 지우며 한참을 새 핸드폰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연이와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이게 아직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문득 아련해진다.


갑자기 왠지 모를 좋은 기분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웃고 있다.


갑자기 옛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저


둘만 있으면 즐거웠던 기억 속의 누군가가


생기 넘치는 얼굴로 웃고 있다.


다시 핸드폰 화면을 열어서 서연이의 얼굴을 보았다.


서연이도 웃고 있다.




이별이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약 하루아침에 찾아왔다고 느꼈다면 거기서 당신은 이미 끝이다. 뭐라고 할 자격도 없다. 그, 혹은 그녀로부터 보내진 이별의 신호가 당신이 모르는 사이 그동안 몇 번이고 당신에게 닿으려고, 제발 당신에게 신호를 그만 보내게 해달라고 손을 뻗어 두드렸음에도 당신은 끝내 알아채지 못하고 돌아섰으니까. 그러니 당신이 두 사람의 좋았던 어제를 떠올리며 아파할 자격은 없다. 좋았던 건 당신 혼자였을테니까.


이것은 당신이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해당되는 사항이며 사실 당신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 얘기할 때는 걔네 그럴 줄 알았다며 잘도 지적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적용시키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난 잘 하고 있어.'라며.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숙희 - 어제까지(Feat.길구봉구)]


어제까지 너와 통화했는데

어제까지 너와 입맞췄는데

어제까지 우리 손잡았는데

어제까지 우리 좋았었는데


어제까지 내 사람이었는데

어제까지 넌 내 꺼였는데

어제도 날 바래다줬는데


어제까지 우리 사랑했는데

어제까지 니가 내 전부였는데

오늘부터 우린 남남 인가 봐

두 번 다신 너를 볼 수 없나 봐

어제까지 넌 내 남자였는데



어제까지 너와 밥 먹었었는데

어제까지 너와 길을 걸었었는데

어제까지 내 사람이었는데

어제까지 넌 내 꺼였는데

어제도 널 바래다줬는데


어제까지 우리 사랑했는데

어제까지 니가 내 전부였는데

오늘부터 우린 남남 인가 봐

두 번 다신 너를 볼 수 없나 봐

어제까지 넌 내 여자였는데



니가 없는 공간이

니가 없는 시간이

벌써부터 난

익숙하지 않아

니가 없는 오늘은

아무것도 못해



오늘부터 어떻게 살아야 해

오늘부터 내 곁에 니가 없는데

사랑하는 것만 배워서

아직 너를 보낼 수가 없나 봐

어제까지 사랑했는데

숙희.jpg 숙희 2번째 미니앨범 '이별병'(201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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