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오늘도 미련 없이 나를 남겨두고 떠나가네."
부모님이나 부모님 뻘 되는 분들에게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이런 얘길 하면 아마 아직 젊은놈이 무슨... 하면서 웃으시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 '그런 생각'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나도 벌써 내년이면 서른이다. 아직은 한참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상대적인 거다. 친하게 지내는 동생들은 작년 12월부터 내게 '서른 즈음에'를 어떻게 불러줘야 내 울화통을 더 잘 터트릴 수 있을지 작당모의 중이다. 야 그거 니들이 서른 살 됐을 때 너네 동생들한테 똑같이 당할 거야. 왜 그러냐고? 사실 나도 그랬거든... 형들 누나들 나이 많다고 안 놀리려고 나는 이제.
연휴라 방 청소를 했다. 그냥 쓰레기통 비우고 청소기 밀고 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전수조사하듯 다 꺼내서 닦고 털어내고 다시 정리하고 버리는 대청소를 했다. 이사 오고 나서 이렇게 대대적으로 한 적은 처음이다. 우리 가족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2011년 초에 이사를 왔지만 나는 2011년도 3월부터 2013년 6월까지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이삿짐을 풀어놓고 새 방을 이제 막 감상하려는 찰나 군대를 간 셈이 된다.
다녀와서는 취업 준비다, 취업해서는 일이 바쁘다, 휴일에는 쉬어야 된다, 일을 그만두고서는 놀기도 놀고 이직 준비도 해야 된다는 핑계로 그동안 쌓아두기만 하고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 했던 내 방을 나는 오늘 오롯이 마주하게 되었다.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우리의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역사들이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 사이즈가 안 맞는 것도 있지만 지금 돈 주고 입으래도 입기 싫은 어렸을 때 샀던 옷들, 즐겨 보던 만화책, 소설책, 중학교 - 이게 아직?! - 및 고등학교 교과서, 베고 잤을 때 그렇게 잠이 잘 오던 수학의 정석, 어떻게 된 게 잘 나온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는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 졸업앨범 4종 세트, 지금 팔면 액정 값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예전 핸드폰들, 몇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과 카메라, 이젠 편지를 읽어도 당시 상황이 잘 기억 안 나는 먼 옛날 주고받았던 편지들, 그리고 한참이 지났지만 곳곳에 묻어있는
너,
너,
너,
그리고 너.
신기하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내가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들었다는 게.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러갔다는 게. 그때는 보기만 해도, 아니 생각만 해도 그렇게 내 마음을 커다랗고 날카롭게 산산조각 냈던 것들이 지금은 '이게 여기 있었네.'하고 쓴웃음 한번 지은 후 넘길 수 있는 작은 조각들이 되어버렸다는 게. 그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것을 지금 와서 생각할 때 아 그때 왜 그렇게까지 했지? 하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계산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게. 버리게 되면 관련된 기억들이 함께 영영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버리지 못 했던, 하지만 추억을 떠올리게 해 나를 힘들게 하던 그 물건들을 지금 이렇게 노래를 틀어놓고 따라 부르며 아무렇지 않게 큰 박스에 휙휙 던져 넣는다는 게. 그때는 너무도 힘들었던 어둡고 거친 말들과 이별들을 지금은 무난하게 해낸다는 게. 나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떠나가는 시간들에게 손을 뻗어 붙잡으려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게.
그렇게 나는 멍청했던 - 당시에는 진심이었지만 - 나의 과거들을 무심하게 박스 안에 휙휙 던져 넣었다. 물류센터 택배 상차 하듯 촘촘히 넣지 않아서 그런지 버릴 게 엄청나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총 2박스 2쇼핑백이 나왔다.
쇼핑백과 박스들을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놓고 돌아오는 길,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버린다고 바로 버려질 수 있는 것들은 결국 이런 물건들뿐이지만 이런 매개체들이 눈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기억도 흐릿해질 것이라고. 그리고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과거의 대부분은, 잃고 싶지 않더라도 마치 노랫말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 가겠지만 옷에 흡수되듯 깊게 스며들어 나의 일부가 되는 과거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 이런 것들을 내다 버린다고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들은 선택 삭제가 되지 않으니까.
잊어야 하는데 잊지 못했어도 괜찮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버렸어도 괜찮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떠났어도 괜찮아. 솔직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더라도 괜찮아.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찌질해 보이기만 했을 그 시간들도 결국 지금의 우리를 만든 일부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소년이 어른이 되어 사람을 알아갈 때에
뜻하지 않던 많은 요구와 거친 입술들
소년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갈 때에
하얀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지겠지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서글픈 추억들 중에 작은 조각이 되겠지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가네
소년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갈 때에
하얀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눈물 흘리는 날이 많아지겠지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서글픈 추억들 중에 작은 조각이 되겠지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가네
미련한 나의 모습을 버릴 수만 있다면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
나의 내일이 다가오면 소년의 꿈을 이뤄줄 작은 노래가 돼줄게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오늘도 미련 없이 나를 남겨두고 떠나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