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며 웃던 많은 날들도, 심장 소리처럼 뛰던 사랑도..."
※ 서울에 살고 계신 C모양의 사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지명 등의 모든 것들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 총 4편의 이야기 중 3번째 이야기입니다. 다음 편과 이어집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넷이었다. 그래 안다. 충분히 사리분별 할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답답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 근데 그게 내 첫 연애였다고! 첫 연애!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두꺼운 솜 이불도 강하게 올려칠 만큼 창피하지만... 그때는 첫 연애였고 되게 좋아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이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가 나이가 있어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음... 글쎄. 당시의 오빠는 백수였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아마 엄청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고쳐달라고 하는 사소한 - 하지만 중요한 - 부분이 있었고 오빠는 그걸 왜 고쳐야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수긍했고. 그렇게 2년을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굽신 굽신한 연애를 했나 싶다. 못 본다고 하면 알았다고 하고, 약속이 깨져도 괜찮다고 하고. 나는 연애를 한 거지 상전을 모신 게 아닌데...
2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오빠는 들어간 회사에서 제법 자리를 잡았고 나는 대학원 진학을 했다. 첫 학기라 그런지 정말 너무 바빴다. 오빠가 틈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 돼서 못 봤던 적도 있었다. 가장 오래 못 봤을 때는 자그마치 3주를 못 봤다. 이쯤에서 코웃음치는 많은 장거리 커플들의 반응이 보이지만 이런 건 상대적인 거니까!
3주 만에 봤을 때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만났던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기도 했고, 헤어짐의 계기가 된 날이기도 했다.
그날은 뭔가 신났다. 작년과 재작년 크리스마스도 함께 보냈긴 했지만 그 해가 특별하다고 느껴졌던 이유는 나도 대학원생이 됐고, 뭔가 사회 진출에 한 발짝 더 다가간듯한, 오빠가 있는 세계에 한 발짝 더 다가간듯한 기분이 들어서였기 때문이었다. 3주 만에 만난다는 생각에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부터 좋다고 옷은 뭘 입을까, 가방은 뭘 들고 갈까, 속옷은 뭘 입... 아이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하며 오만가지 상상을 다 하며 난리를 피웠다. 약속 시간이 되어 예쁜 옷과 가방, 구두를 고르고 화장도 예쁘게 하고 거리로 나섰다. 일기예보에서는 오후부터 추워진다고 했지만 어디 예보 틀리는 게 한두 번인가. 들뜬 마음 때문인지 그렇게 춥지도 않았고 설령 밤이 되어 더 추워진다고 해도 그런 것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오빠는 또 늦었다. 무려 한 시간을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10분 정도 지난 시점에서 전화가 왔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조금 많이 늦을 것 같으니 미리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 들어가 있으라는 전화였다. 신나고 설레있던 내 머리를 누군가 세게 때린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터덜터덜 걸어서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오빠의 이름을 대고 혼자 앉아있는 동안 나는 내가 너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오빠는 오긴 했다. 전화통화 후 정확히 한 시간 반 뒤에. 미안하다며 늦은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나는 그 이유를 들으며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일단 나온 건 웬일로 제시간에 도착하게끔 나왔단다. 그런데 아는 형님이 급한 일이라고 지금 바로 오라고 해서 나한테 연락을 하고 가게 됐단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급한 일이라는 게 내년 달력을 주는 일이었고, 달력을 들고 다닐 수도 없고 - 들고 다니지 왜!!! - 집에 두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집에 두고 나오는 길에 시간을 보니 시간이 늦어서 택시를 탔다고 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창 막힐 시간대에 택시를 타려 했다는 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오빠는 그래도 눈치라는 게 있어서, 조심스럽게 '미안해'라고 사과를 했다. 당연하지만 그 한마디로 마음이 풀릴 리가 없다. 내가 너무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게 싫었고 내가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닌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안에서 뭔가가 우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어젯밤 썼던 편지가 있었고 같이 들고 온 쇼핑백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옷을 고른 후 만든 컵케익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나는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데... 혼자서 유난을 떤 내 모습이 한심하게 생각되기까지 했다.
밥 먹는 내내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빠는 내 눈치를 보며 같이 말이 없었고, 나가는 길에 짜증나서 컵케익도 버리고 나왔다.
"저기요 손님!!"
"네?"
"이거! 이거! 쇼핑백 두고 가셨어요!"
또 그걸 갖다주고 앉았다. 물론 종업원은 아무 잘못이 없다. 투철한 서비스 정신을 기반으로 한 행동이었고 평소 같으면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힘없이 쇼핑백을 받아들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돌아섰다. 왜 이딴 걸 만들어 왔을까. 더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냥 집에 가고 싶었는데 콘서트를 예매해놔서 어쨌든 보러 가긴 했다. 저녁 먹고 카페 갔다가 가려고 했는데 오빠가 늦는 바람에 카페에서의 시간은 사라졌고 곧바로 공연장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고 공연이 시작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나는 공연장에 온 것을 후회했다.
전국의 서로가 좋아 죽겠는 커플들은 다 박정현 김범수 콘서트를 보러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방이 온통 커플 투성이였다.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주변이 다들 너무 달아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주변 커플들이 서로 너무나 행복해하는 가운데 우리는 아무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슬픈 노래가 나오는데 문득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노래가 다 끝나고 나올 때까지도 한마디도 안 하고 콘서트를 봤다. 오빠는 아마 내가 울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컵케익은 기어코 콘서트장에 버리고 나왔다. 아니 사실 선물이 또 있긴 했다. 가방 속에 향수를 사서 포장해서 넣어뒀었다. 크리스마스 지나고 오빠 생일이었어서 예전에 갖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 향수를 사서 편지랑 함께 주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 도저히 편지는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리가 벌써 2년이나 됐다,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다, 안 맞는 것들은 맞춰 나가보자 뭐 그런 내용이었는데 편지는 진짜 주기가 싫었고 지하철에서 내리기 전에 향수는 꺼내서 줬다.
"이거 받아."
"응?"
"향수. 생일 선물로 샀으니까 주긴 줘야 될 것 같아서. 그럼 나 간다."
"이제 좀 화가 풀렸어?"
이게 할 말인가 싶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돌아서려는 자세 그대로 멈춰버렸다. 조금만 늦었다면 못 내렸을 거다. 헛웃음이 나왔다. 지하철이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설마 진짜 내가 화가 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아 뭐야~이제 화가 풀렸나보네."
"..."
"오늘 일은 진짜 미안해."
"됐어. 조심히 들어가구."
"아니 근데 솔직히 나도 좀 짜증이 났어."
"뭐?"
"그렇잖아.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 사과했는데 너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앉아만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 기분이 좋겠어?"
눈물은 아까 콘서트장에서 다 흘린 줄 알았는데 오빠의 말을 들으며 또 눈물이 났다.
"오빠. 내가 지난 2년 동안 무리한 요구 한 적 있어?"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시간 약속 지켜달라고, 내가 그동안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게 안돼? 오늘도 그래. 달력 줄 걸 누가 알았겠어. 근데 그런 것쯤 그냥 들고 오면 되는 거 아냐? 내가 혼자서 뻘쭘하게 기다리고 있을 거 뻔히 알면서 집에 들렀다 오고 싶어? 그래도 좋은 날인데 좋게좋게 못 넘어가서, 그래서 오빠 짜증 나게 해서 미안한데 나 솔직히 오빠한테 정 떨어졌어."
"..."
"지긋지긋해. 지난 2년 동안 좋았던 기억도 많았는데 그런 좋았던 기억들 많으면 뭐 해? 오늘 일 같은 안 좋은 일이 더 많아서 좋은 기억들 같은 건 다 파묻혀버리는데."
오빠도 나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 끝에 먼저 말문을 연 건 오빠였다.
"그래. 예지야. 아무래도 지금은 이야기할 타이밍이 아닌 것 같다. 조금 시간을 가져보는 게 좋을 것 같아."
"..."
"예지야?"
"시간? 시간 좋지. 그래. 좀 길게 가졌으면 좋겠네. 연락하지 마. 끊을게."
어느새 눈물은 멈춰 있었다. 나는 폰을 가방 안에 던지듯 집어넣고 집으로 향했다. 저녁이 되면 추워진다던 일기예보는 사실이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너무 차갑고 추웠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사람들은 사랑이 가장 아름답다 말하지만 모든 사랑이 아름답게 끝나진 않는다. 사랑에 배신당한 사람, 연인이 변심해 떠나간 사람 등 사랑으로 인해 눈물짓는 사람의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해도,
사랑이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사랑이 우리를 실망시키기 때문에,
사랑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 줄리언 반스의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의 일부를 인용하였습니다.
절정을 지나버린 모든 것
결국 시들어 가는 많은 것
지금 난 그 가운데 있어
숨소리 하나 흔들림 없이
작은 떨림도 없는 눈으로
지금 넌 마지막을 말해
조금 아플 것도 차차 나을 것도
느리지만 잊을 것도
넌 이미 다 알고 있었을까
아무 이유 없이 그래 이유 없이
Love, 못 믿을 사랑
더없이 위태로운 마음의 장난
반짝이며 웃던 많은 날들도
심장소리처럼 뛰던 사랑도
그저 흘러가는 저 강물 같아
기도처럼 깊던 오랜 믿음도
그저 변해가는 저 계절 같아
참 위태로운 얘기...
조금씩 사라지는 모든 것
결국 부서져 가는 많은 것
지금 난 그 가운데 있어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듯
마치 날씨 얘기를 꺼내듯
지금 넌 헤어짐을 말해
보낼 수 있는데 그건 괜찮은데
내가 정말 서러운 건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것
익숙함을 지나 지루함을 지나
Love, 못 믿을 이름
이토록 부질없는 슬픔의 마법
태양처럼 빛난 모든 순간도
노랫소리 같던 그 속삭임도
헤어짐을 향한 막연한 항해
한땐 목숨 같던 나의 사랑도
그저 스쳐가는 찰나의 바람
참 위태로운 얘기...
태양처럼 빛난 모든 순간도
(노랫소리 같던 그 속삭임도)
헤어짐을 향한 막연한 항해
한땐 목숨 같던 나의 사랑도
그저 스쳐가는 찰나의 바람
참 위태로운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