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인걸..."
※ 서울에 살고 계신 C모양의 사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지명 등의 모든 것들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 총 4편의 이야기 중 2번째 이야기입니다. 다음 편과 이어집니다.
그날 이후 어쨌든 오빠는 내가 대답을 하든 안 하든 주기적으로 나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렇게 연락이 와서 좋았다. 하지만 마음이 갈대처럼 그렇게 쉽게 바뀌는 남자를 굳이 내가 만나야 할까? 하는 생각과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좋고 보고 싶은 생각이 계속 충돌해서 혼자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오빠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좋고, 보고 싶은 마음이 이긴 것이다. 연락도 계속하고 있었으니 만나기도 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일주일에 한 번 보고, 그러다가 두 번 보게 되고, 그런 식으로 나는 학교생활, 오빠는 - 이때쯤 취직이 됐다. - 신입사원 생활로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틈나는 대로 자주 만나게 됐다. 취직이라는 고민이 해결되었으니 아마 오빠도 마음의 부담을 한결 덜었겠지.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누가 먼저 사귀자고 말한 적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교제를 하게 됐다고 알리게 되었다. '1일'에 대한 기준이 조금 애매했다. 나는 우리가 맨 처음 사귀기로 한 날, 오빠는 우리가 다시 연락을 하면서 만나 처음 키스를 한 날을 1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오빠의 기준으로 '1일'을 정하게 되었다. 이런 게 뭐가 중요하냐 하겠지만 원래 연애할 땐 그런 사소한 것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법이라더라.
여자들은 그런 게 있다. 남자친구와 다투게 되거나, 섭섭한 일이 생기게 되면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고 한다. 말하자면 헤어짐을 연습하게 되는 건데, 모든 여자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나도 그렇고 주변에서 심심찮게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가 있는 걸로 봐서 나름 설득력 있는 주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얘기를 왜 했냐면, 오빠와 만나는 2년 동안 나는 계속 이별 연습을 해 왔음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건 정말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일이었다. 차라리 몰랐었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걸...
연인들 중에는 상대방의 핸드폰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랑 연락하는지, 나랑 있는데 왜 지금 핸드폰을 만지는지 등등. 나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는 편이어서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았고 그건 오빠가 좀 더 나를 편하게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거라고 여겼다. 실제로도 오빠는 무슨 일 있으면 있다고 다 말해주는 편이었고.
문자를 작정하고 보려던 건 아니었다. 함께 갔던 카페에서 오빠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테이블에 놓고 간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카드사에서 으레 보내는 광고 문자라 뭐 이런 것쯤이야 지워줄 수 있지 하고 지워주기로 했다. 문자가 지워지고 그 뒤에 있는 문자가 바로 뜨게 됐는데, 시간은 어제 나와 통화 후 자러 간다고 한 시간보다 뒤였다.
솔직히 오지랖이었던 건 인정한다. 오빠의 핸드폰을 보겠다는 치밀한 계획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고 그냥. 진짜 그냥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전혀 생각도 못한 결과가 나와서 나는 너무 놀랐다.
문자 내용은 비발디파크 예약 관련 문자였다. 예약 인원은 2명이었고 나한테는 스키 타러 가자 보드 타러 가자 한 마디도 없었다. '바람인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는 게 느껴졌다.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오빠가 돌아오고 나서도 오빠가 하는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혼란스러워할 때 앞에 있는 사람과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섞여서 웅성웅성 대는 것처럼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내가 딱 그랬다. 그날은 몸이 안 좋다고 얘기하고 일찍 집에 들어갔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며칠 전, 비발디파크 예약이 잡혀있던 그날 친구네 집에서 논다고 얘기해 준 적이 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말하는 그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마음이란 게 진정하라고 해서 쉽게 진정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난 결국 그날 전화를 해서 오빠가 전화를 받자마자 지금 어디냐고 물어봤다. 내가 얘기해주지 않았냐고, 친구네 집이라고 둘러대는 오빠의 평화로운 목소리는 약간 울리고 있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하나는 친구네 집이 엄청 부잣집이어서 거실이나 방이 목소리가 울릴 만큼 크거나, 다른 하나는 콘도 복도나 비상계단으로 나와서 전화를 받느라 목소리가 울렸거나.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다. 솔직히 그 문자 외에는 물증도 없고 -문자도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 내가 너무 안좋게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로 친구집일수도 있잖아. 혼자 끙끙 앓던 나는 며칠 후 오빠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알고 있다고 하면 오빠도 진실을 얘기해 주겠지.
"오빠."
"응?"
"보려고 마음먹고 본 건 아닌데... 어쩌다 보게 됐어. 미안해."
"뭘?"
"오빠 문자. 비발디파크."
솔직히 모든 정황은 들어맞았다. 예약 문자를 봤는데... 하지만 오빠는 '아~그거?'하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봤구나? 응 비발디파크 친구랑 넷이서 둘 둘 예약해서 가기로 했었지. 근데 취소해가지고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친구네 집에서 놀았어 그날. 우리 통화도 했잖아. 기억 안 나?"
이젠 모르겠다. 저 태연자약한 표정과 말투가 모두 연기라는, 내가 문자를 본 것도 눈치채서 아예 예상 질문까지 준비한 거라는 그런 상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게 내 망상일까? 그건 아니잖아. 그 문자 분명히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때부터였다. 나는 원래 아닌 건 아니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성격이었지만 오빠와 관련된 일 앞에서는 자꾸 작아지기만 했다. 친구들한테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내가 걔들 같았어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헤어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을 테니까.
이후에도 크고 작은 이런저런 일들이 몇 개 더 있었다. 대표적인 게 시간 약속을 못 지키는 거였다. 다른 건 다 어떻게 넘어갈 수 있다 해도 그건 본인의 의지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와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절대 늦지 않으려고 할 것이었다. 제발 그것 하나만은 잘 지켜달라고 하자 돌아오는 대답은,
"글쎄... 나 원래 이랬어서, 못 고쳐."
웃긴 건, 이런 막말을 듣고도 나는 이 말에 수긍했다는 점이다. '그래, 사람이 계속 이렇게 살아왔다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변하겠어?'라며 오히려 오빠 편을 들려고 계속 노력했다. 오빠의 변명을 믿으려고 노력했다. 부인하고, 회피했고, 고개를 돌렸다. 누가 뭐라고 할까 봐 내 안에서 스스로 오빠의 변명거리를 만들어서 자문자답하며 상황을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내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빠는 그대로였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오빠가 미웠지만 그런 오빠를 싫어할 수 없고 계속 좋아하고 있는 내가 더 미웠다.
장기 연애를 할 수 있는 Best tip 하나를 공유하고자 한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말인데 인상 깊게 본 구절이라 기억해두고 있었다. 되게 간단한 거라서 처음 들을 땐 '에이 그 정도야 뭐 다들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지난번 걔랑 왜 헤어졌는데?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는, 혹은 하고 있는 연인들은 항상 이 말을 기억했으면 한다.
'좋아하는 걸 해주면 시작할 수 있고, 싫어하는 걸 안 하면 오래갈 수 있다.'
아... 참고로 나도 쉽다고 생각했는데 잘 안되더라.
기억나지 않아 어젯밤 꿈조차
지우려고 했던 게 아닌데
잠들지 않도록 널 부르며 눈 감았지
사무쳐 그리지는 않았지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 인걸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 인걸
꿈꾸지 않기를 눈 감으며 기도했지
사무쳐 그립지는 않았지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 인걸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 인걸
그래 나 널 지우려고 해
널 보내려고 해 이제 지쳤어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 인걸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 인걸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 인걸
어느새 난 눈물에 젖어 슬픈 새
미안해 널 미워해 이대로 인걸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 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