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싶은데 왜 난 놓을 수가 없는지. 왜 난..."
※ 서울에 살고 계신 C모양의 사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지명 등의 모든 것들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 총 4편의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여중, 여고, 여대. 남중, 남고, 공대, 군대만큼이나 듣는 이의 안구에 습기가 차오르게 하는 단어, 그 단어의 주인공이 나다.
내 첫 번째 연애는 24살 때였다. 휴학할 때 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만난 오빠였다. 그동안 내가 학교에서 만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고, 따라서 사실상 나는 남자에 대한 면역이 거의 없었다. 인생도 연애도 실전이라는데 나는 친구들의 썰과 드라마, 책으로만 연애를 배웠다. 그러니 내가 오빠에게 반해 짝사랑을 하게 되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 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당사자를 제외한 주변인들은 내가 아무리 비밀로 한다고 해도 머지않아 알게 되곤 한다. 그때도 그랬다. 다행히 대인 관계를 좋게 해 둔 덕분에 학원 사람들은 전부 내 편이 되어주었다. 처음에 오빠에게 인사 말고 아무 말도 못하던 나는 점차 용기를 내어 말을 붙이게 되었고, 함께 밥도 먹고 영화도 보며 어떤 날은 술 한잔 같이 하기도 했다. 그렇게 4개월이라는 기다림 끝에 나는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마침 복학 시기도 다가왔고 학원 등록도 이번주까지라 나는 '혹시 잘 안되더라도 학원에 안 나가면 되니까 부담이 없다'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웠다. 오빠는 나보다 6살이 많은 서른 살이었지만, 이미 마음을 뺏겨버린 나는 나이 같은 게 뭐가 중요하냐는 마음가짐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예지야 일단 날 좋아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오빠..."
" 나도 네가 마음에 있었어. 그래서 처음 봤을 때부터 함께 밥도 먹고 이것저것 함께 하고 싶었지.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했고."
"오빠 그럼 우리..."
"그런데 미안해."
"...?!"
"내 나이가 이제 서른이야. 취업하기엔 조금 늦은 나이고. 그래서 올해 안에 승부를 봐야 해. 집중해야 하는 이런 시기에 연애를 한다는 건... 나한테는 사치 같아. 부담스럽기도 하고."
솔직히 나는 그동안 연애를 해본 게 아니라서 연애가 실제로 부담스러운 면이 있는 건지, 아름다워 보이지만 물 위에 떠있는 오리마냥 그 속은 굉장히 치열한 건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그래서 오빠가 저렇게 말했을 때 머리를 세게 맞은 듯 멍해져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뭐라고 말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대충 이런 식의 대화를 했던 것 같다.
"미안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뭐가 미안한데 오빤?"
"응?"
"뭐가 그렇게 부담스러운데 오빤?"
"예지야. 말했잖아 오빠는 올해 꼭 취업 해야해."
"취업하는 데 그렇게 바빠? 그렇게 24시간이 모자라?"
"예지야..."
"나 솔직히 연애 잘 몰라 오빠. 안 믿을 수도 있는데 진짜 안 해봤어. 그래서 몰라.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상대방에게 부담을 준다면, 그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집착하는 거라고 생각해. 오빠랑 지내면서 계속 생각해봤어. 이게 철모르는 집착일까 진짜 좋아하는 걸까 하고."
"..."
"매일 만나자고 보채지 않을 거야. 평소에 오빠는 오빠대로 취업 준비하고 나는 나대로 대학원 진학하는 거 알아보고 공부도 하고. 그러다 보면 오빠도 힘들고 스트레스받아 지칠 때가 자주 있을 거야. 나는 그런 오빠한테 부담 말고 힘을 줄 거야. 힘내서 다시 일어나서 가고 싶은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대충 저런 식으로 말하며 토요일 저녁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한참을 오빠와 이야기한 끝에 - 일방적인 내 설득이었지만 - 오빠는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웃으며 나를 안아주었고 느닷없는 포옹에 주변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쳐 주었다.
집에 와서도 이 행복한 기분을, 표정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주무시고 계셨고 씻고 나오자 동생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날 보던 동생이 한마디 툭 던졌다.
"누나 니 남친 생겼어?"
동생에게 한복을 입히고 부채나 방울 같은 걸 쥐여준 후 작두 위로 보내야 하나 하고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벙쪄있는 날 보고 동생이 한마디 더 했다.
"고만 좀 티 내라. 아조 그냥 얼굴에 아이고 동네 사람들 나가 인쟈 연애를 시작을 해브렀어요 하고 써 붙여가지고 다니지 왜."
저게 진짜. 전라도 근처도 안 가본 게 갓 대학 들어가더니 친구들한테 사투리를 어설프게 배워가지고서... 아 근데 표정관리가 안 되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그날 이후 다음에 만나기로 한 일주일간은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항상 연락을 주고받진 않았지만 우린 서로가 어디서 뭘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참고 기다리기를 잘 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며 행복을 만끽하던 찰나 일주일이 금방 지났고 오빠를 만나기로 한 날이 돌아왔다. 북적대는 거리 속에서도 나는 오빠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빠!!"
"응... 잘 지냈어?"
"그럼! 오빠는?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일주일 만에 만난 오빠는 꽤 지쳐 보였다. 지친 남친에게 힘을 주는 건 내가 할 일이지! 하며 그날 데이트하는 내내 오빠가 힘 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게 통했는지 데이트 말미에 날 집 근처에 데려다줄 때 오빠의 표정은 조금 풀어져 있었다. 하지만 집 근처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오빠가 내뱉은 한마디에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저기 예지야.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역시 부담이 안 되지가 않네... 아무래도 정리하고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아."
"뭐?"
"미안. 나도 그동안 많이 생각해봤어."
오빠의 이별 통보에 나는 여기가 우리 집 근처라는 사실도 잊고 울며 소리쳤다. 애초에 연애 시작할 때 내가 그러지 않기로 하지 않았냐고,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언제 부담을 주기라도 했었냐고. 내가 그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던지 오빠는 놀란 눈치였다.
"내가 오랫동안 좋아해 온 거 알잖아. 가벼운 마음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그런데 그때는 알았다고 말해놓고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뭐야?"
"휴... 그럼 예지야. 내가 한 일주일 정도만 다시 생각해보고 말해도 될까?"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기다리는 내가 어떨지 생각해 봤어? 정말 너무한다 오빠. 그렇게 한다고 또 생각이 금방 바뀌겠어? 됐어. 갈 길 가자."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돌아서서 걷는데 단지 앞 경비실 창문에 비친 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창문 속 그대로 멈춰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오빠의 모습을 스쳐가며 지금이라도 다시 되돌아갈까, 가서 안기면 이 모든 게 없던 일처럼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몸은 마음과는 반대로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못 했다. 한동안 나를 바라보는 오빠의 시선을 느끼기만 하고 바라보지 못한 채 나는 집으로 들어왔고, 집 구조상 현관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내 방으로 가면서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누나 니..."
뭔가 말하려던 동생은 어두운 내 표정을 보고는 이내 말을 삼켰고 한숨을 한번 푹 쉬더니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모습은 사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눈치채고 들어가준 동생이 고마웠다.
짜증나. 내 인생 첫 번째 연애였는데.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는데. 겨우 일주일 만에 이게 뭐야? 친구들한테 다 자랑해 놨는데 이제 어떡해? 뭐라고 말해야 돼? 아니 그보다... 이젠 오빠를 다시 못 보는 건가?
그래서 한동안 마음이 안 좋았다. 개강 후 복학을 하고서도, 학기 초의 설레는 마음도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
했다. 친구들은 그냥 액땜했다 생각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라고 했고, 나도 그게 맞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생각대로 마음이 안 움직여서 그렇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랑 강남에서 밥을 먹고 카페 가서 과제를 하기로 해서 6시쯤에 친구를 만났다. 우리가 좋아하는 커리 집을 가서 시덥잖은 주제들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는 분명 오빠였다. 그동안 연락 한번 없어서 너무 밉기도 했지만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내가 일어서지 않았던 이유는 물론 나의 뛰어난 자제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오빠의 옆에 함께 걸어오는 여자 때문이었다. 나는 이러고 살고 있는데 다른 여자랑 둘이 밥을 먹으러 왔네? 무슨 사이일까? 설마 새 여자친구? 연애는 부담스럽다고 해 놓고 지금 저게 뭐야?
하지만 실제로 가서 말을 걸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그곳은 우리가 다녔던 학원 근처였고 그냥 학원 사람이랑 밥을 먹으러 왔을 수도 있으니까 경솔하게 판단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화가 났다. 분명 나랑 눈까지 마주쳤는데 모르는 척을 하다니. 그래서 문자를 보냈다.
'되게 잘 지내는 것 같다?'
보내고 10분 후 쯤에 답장이 왔다. 잘 못 지낸단다. 왜요. 예쁜 여자랑 같이 저녁밥도 먹으러 오시는데 왜 못 지내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시네요. 나는 아직도 보고 싶고 정리도 못 했는데. 나 혼자 사랑하고 있는데. 섭섭한 마음이 커질 대로 커진 나는 답장을 하려고 했는데 문자가 한 통 더 왔다.
'나 지금 친구들 만나고 있거든. 내가 연락할게!'
아니 왜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덕분에 기분이 더 상한 나는 답장을 그만두었고, 며칠 후에 - 연락한다더니!! - 연락이 와서 약속을 잡고 만나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서로의 근황 같은 걸 나누고 이런저런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다. 중요한 건 오빠는 변한 게 없었다는 거다. 아직도 연애를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오빠."
"응?"
"이렇게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었으면 왜 나 만나자고 한 거야?"
"아니 그냥 난 그날..."
"우린 왜 만난 거야?"
"..."
나는 그 길로 일어나서 술값을 계산한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이렇게 화만 낸다고 될게 아닌데, 오빠의 마음을 돌리는 게 먼전데 자꾸 이래서야 마음이 돌아오기는커녕 돌아서게 생겼어... 어쩌면 좋지?
아아, 이제는 알겠다.
지울 수가 없구나.
버릴 수가 없구나.
놓을 수가 없구나.
숨길 수가 없구나.
잊을 수가 없구나.
바보 같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나 보다 나는. 너를.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이름을 부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안녕이란 뻔한 인사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아
자꾸만 자꾸만 보고픈 너의 모습을 어떡하면 좋을까
아픈 추억들에 가시 같은 맘에
나쁜 말을 할 것 같아 참아내고 괜찮다며 웃어
매일 불안했던 감정은 커져 혼자만의 사랑도 미워
알 수 없는 감정은 더는 버리고 싶은데
왜 난 놓을 수가 없는지 왜 난
하루하루 매일 니가 보고 싶어
이름을 부르면 니가 날 볼 것 같아서
잘 가라는 뻔한 인사하고 뒤돌아서 입술을 깨물어
억지로 참아도 안되는 너의 그리움 어떡하면 좋을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내 가슴에 박혀버린 니 모습을 지울 수가 없어
매일 불안했던 감정은 커져 혼자만의 사랑도 미워
알 수 없는 감정은 더는 버리고 싶은데
왜 난 놓을 수가 없는지 왜 난
하루하루 매일 니가 보고 싶어
이젠 정말 거짓말도 못해
더 이상 숨기지도 못해
자꾸만 커져 가는데 이렇게 매일 사랑해
이젠 혼자만의 사랑을 지워 끝나버린 사랑이 미워
너를 향한 감정을 모두 버리고 싶은데
왜 난 놓을 수가 없는지 왜 난
내 맘대로 안돼 멈추지 못해 하루하루 매일 니가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