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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눈을 뜨면, 봄처럼 곧 사라지겠지."

by 돌아보면

"일어났네? 뭐야 오빠. 여기까지 와서 자고 있으면 어떡해? 안 불편해?"


"...응?"


뭐야, 꿈인가 이거? 갑자기 이게 무슨...


"진짜 나 때문에 너무 고생 많았어 오빠. 나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아! 언니는 조금 전까지 같이 있다가 언니 짐 놓고 내 옷 가져다 주러 다시 온대. 언니가 엄마 아빠한테 혹시 얘기했냐고 물어보던데 아직 연락 안했지?"


"아... 응. 아직."


"응 언니한테는 엄마 아빠 걱정할까 봐 아직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얘기 해야겠지?"


"그렇지... 감기 걸린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아까 누나가 부모님한테 이야기해야겠다고 얘기하긴 했던 것 같아."


"에휴 나 이러다 자취고 뭐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오빠랑 자주 못 볼 텐데. 그럴 일 없었으면 좋겠다!"


"응. 별일 없게 나중에 누나 오면 잘 얘기해서 설명 드리자."


아... 그래. 그랬지. 긴장이 풀려서 잠깐 잠들었구나.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혜린이랑 잘 놀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약국에 약을 사러 갔다 와보니 카페 소파에서 배를 잡고 웅크려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곧바로 안아 들고 가방을 챙긴 후 카운터에 만 원짜리 두 장을 던지다시피 낸 뒤에 카페를 뛰쳐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가장 가까운 병원이 어디냐고 기사님께 물어보니 아주대병원이라고 해서 그쪽 응급실로 가달라고 했다. 의식을 잃은 건 아니었어서 계속 어디 아프냐고 병원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보라고 하며 손을 잡아주고 머리나 배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아무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어쩔 줄 몰랐으니까.


거스름돈 챙길 시간도 아까웠던 나는 역시 만 원짜리를 기사님께 드린 후 차에서 나와 혜린이를 안고 응급실이라고 보이는 곳을 향해 뛰었다. 평소에 이런 일을 대비하면서 살아온 건 아닌데도 나는 퍽 침착하게 대처했던 것 같다. 지나가던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먼저 안고 있던 혜린이를 응급실 침대에 눕히고 간단한 인적사항 같은 걸 써서 냈다.


입원복을 주며 잠시 기다리라는 간호사의 안내를 받은 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가만히 누워 있으니 아픈 게 조금은 나아진 모양이지만 여전히 아픈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땀을 닦아주려는 찰나, 여기까지 혜린이를 안고 뛰어오느라 내 몰골도 말이 아님을 그제서야 체감하고 화장실에 가서 손과 얼굴만 얼른 씻고 땀도 닦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혜린이의 땀을 닦아주며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병원 에어컨이 잘 되어 있는지 어디선가 계속 바람이 불어와 이내 곧 시원해졌다.


사실 이틀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집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혜린이를 데리고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소화기 쪽이나 맹장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고 해서 산부인과를 함께 가보기로 했다. 여의사가 진료한다고 해서 갔는데 인정 없고 배려 없는 여의사의 추측성 발언에 눈물짓는 혜린이를 달래느라 한참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다시 그 병원에 찾아가 따지고 싶은 마음이다. 아무튼 그때는 일시적인 거라고 괜찮다고 해서 딱히 별 조치를 취하지 않았었는데... 바로 이렇게 일이 터진 거다.


혜린이가 이것저것 검사를 받는 동안 같이 살고 있는 친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 내가 같이 있고 지금 이것저것 검사를 받고 있다고, 퇴근하고 오셔도 될 것 같다고, 검사 끝나면 혜린이한테 전화 왔었다고 얘기해주겠다며 놀란 누나를 진정시켰다.


검사는 금방 끝났지만 검사 결과를 통한 진료를 받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알다시피 대학병원 응급실이란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는 사람, 끊임없이 기침을 하는 사람 등 정말 '아파 보이는'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서 자기가 제일 멀쩡한 것 같다며 애써 농을 건네는 혜린이의 손을 꼭 잡아 주며 이마에 난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괜찮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통증이 계속 있는 거겠지.


의사 선생님보다 누나가 먼저 도착했다. 사정을 말씀드린 후 조퇴를 하고 왔단다. 누나는 걱정하던 것보다는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언니를 보고 긴장이 풀린 혜린이는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해서 우리는 또 한동안 혜린이를 달래 주었다.


잠시 후 도착한 의사 선생님은 난소 쪽에 혹이 생겼다고, 그런데 수술할 것 까진 아닌 것 같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했고 일단 며칠 입원해서 약물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고 우리는 곧바로 입원을 결정했다.


일련의 과정들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입원실 옆 보조침대에 쪼그려 앉아 철제 수납장에 기대어 있었다. 입원실에 들어가 지친 혜린이를 재우고 나서 나도 스르르 잠이 든 것 같다.


"언니도 와서 조금 더 있다가 간대."


"누나 내일 출근하셔야 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왔다가 바로 가기가 좀 그런가 봐. 막 오래 있을 거 같진 않아."


"하긴 뭐 어차피 내가 밤새 같이 있을 거니까."


"오빠 나 진짜 괜찮아. 오빠도 집에 가야지 그래도."


"집에다 이야기하면 오히려 거기 있으라고 할 걸?"


잠시 후 누나가 혜린이 옷가지랑 나 먹을 간식거리 같은 걸 싸들고 왔다. 누나는 곧 비가 올 것 같다며 내 우산까지 챙겨다 주었다. 한동안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혜린이 곁에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든든하다는 말을 남기고 누나는 내일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4인 병동이었지만 우리가 입원하는 날짜에 두 명의 환자가 빠졌고 우리는 운 좋게 창가 쪽 침대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환자 침대에 앉아 혜린이의 배를 쓸어 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집에 있을 땐 습기 때문에 에어컨 틀어야 해서 비가 별로였는데 여기 이렇게 누워서 보니까 되게 운치 있다며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게 귀여워서 나도 같이 웃었다.


늦은 밤이라 불이 꺼져 어두웠던 병실 주변이 어느새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밝아졌다. 비는 그치고 햇볕이 창가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으며 먼저 잠에서 깬 혜린이는 나를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또 어느새 잠든 건가...?


"오빠."


"응?"


"정말 고마워. 계속 같이 있어줘서."


"아냐. 당연히 내가 곁에 있어 줘야지! 남자친구인데! 곧 의사 선생님 올 테니까 나도 정신 차리고 일어나 있어야겠다."


그리고 정말 곧바로 의사 선생님이 들어와 진료를 봐 주셨다. 어쩐지 전에 한 번 겪었던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걸 데자뷰라고 하던가? 의사 선생님의 진료 내용, 혜린이의 반응, 회진을 마치고 옆 침대로 간 후의 혜린이의 반응까지 어쩐지 전에 한 번 겪었던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조용히 날 바라보며 웃는 혜린이를 보며 나는 다시금 확신이 들었다.


아.


그래.


그거구나.


그거.


꿈이구나 이거.

morningsun2.jpg

어쩌면 처음부터 자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게 벌써 3년 전 이맘때 일인데...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상황과 너의 모습, 목소리는 이렇게나 생생하구나. 여러가지 기분이 교차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린이는 말을 계속 했다.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 어떻게 됐을까? 오빠가 곁에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나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곁에 닿을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지만. 꿈속의, 내 기억 속의 너는 모르겠지.


"금방 나을 수 있겠지? 얼른 나아서 오빠랑 다시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싶다."


"응. 빨리 발견해서 입원했으니까, 별거 아니라니까 금방 나을 수 있을 거야."


3년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해도 꿈속의 혜린이는 처음 듣는 것처럼 대답하고 말한다. 3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응. 혼자였으면 정말 무서웠을 거야. 그런데 오빠랑 같이 있어서 나 지금 정말 괜찮아. 하나도 안 무서워. 안심이 돼."


"내가 뭐 한게 있다구. 혜린이가 그냥 긍정적인 거야. 이런 마음가짐이면 더 빨리 낫겠다!"


"역시 그렇지? 내 젊음의 에너지가 막막 느껴지고 그렇지?"


꿈속에서도 그 끼는 어디 안 가고 여전하구나. 그런 혜린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눈앞이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눈물이 나와서 당황했지만 혜린이는 계속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창밖에서 비치는 밝은 빛이 눈물과 합쳐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감고 눈물을 닦고 있었다. 눈물이 잘 안 멈춰서 계속 눈 주변을 비비고 있었는데 갑자기 혜린이가 나를 불렀다.


"오빠."


"아니 이건...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네."


"오빠. 고마워."


"...?"


"나는 지금 잘 지내고 있어. 오빠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혜린아...?"


"이제 시간이 다 됐어. 가야 할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잠시만... 앞이 안 보여서."


"내가 잘 지내는 것처럼 오빠도 항상 잘 지냈으면 좋겠어."


"혜린아 잠깐만!"


"그럼 안녕."


혜린이의 말에 나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눈을 떴다.


밝은 태양빛이 내 눈가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타이머 설정을 잊은 선풍기는 계속해서 나에게 바람을 보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밖은 어린아이들 소리 지르며 노는 소리, 차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외에는 여느 주말 오전과 다를 것 없이 평화롭고 조용했다.


왜 지금 그때 꿈을 다시 꾼 걸까 하는 생각부터 시작해 마지막 인사를 못 하고 꿈에서 깬 것에서까지 생각이 미쳐 나는 한동안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날짜를 가늠해보니 정확히 3년 전은 아니지만 내가 혜린이를 업고 응급실로 뛰어가던 날과 오늘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날은 하루 종일 묻어 두었던 혜린이와의 추억이 떠올라서 힘들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고 나도 헤어짐의 아픔을 잊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내 어리석은 실수로 인해 헤어지게 되었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내게 웃어 주었던 그 밝은 모습 그대로 잘 지내고 있기를, 앞으로도 잘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람은 왜 손쓰는 게 늦은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인생의 시계가 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

나는 지금 빛이 보인다.

어둠에 지지 않는 작은 빛.

어떻게든 이 빛을 지켜주세요.

보고 있지 않는 사이에 꺼지지 않게 해 주세요.

나의 목숨과 바꿔도 상관이 없습니다.

-'신이시여 조금만 더'(神様、もう少しだけ, 1998.07.07 후지TV 첫방영) 中 -




https://youtu.be/iS05QDnJf9I

Epitone Project (에피톤 프로젝트) - 눈을 뜨면


[에피톤 프로젝트 - 눈을 뜨면]


알고 있다 이게 꿈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너의 모습은 참 오랜만이야

그렇게도 사랑했었던 너의 얼굴

맑은 눈빛, 빛나던 입술까지


살아있다 저기 저 신호등 건너

두 손 흔들며 엷게 보조개 짓던 미소까지

조심히 건너, 내게 당부하던 입모양까지

오늘 우린 이렇게 살아서 숨을 쉰다


눈을 뜨면 니 모습 사라질까 봐

두 번 다신 널 볼 수 없게 될까 봐

희미하게 내 이름 부르는 너의 목소리

끝이 날까 무서워서 나 눈을 계속 감아


안녕이란 인사조차 못할까 봐

그대로인데 사랑했던 너의 모습

눈가를 흘러 베갯잇을 적셔만 간다

하나둘씩 너의 모습이 흩어져만 간다



눈을 뜨면 니 모습 사라질까 봐

두 번 다신 널 볼 수 없게 될까 봐

희미하게 내 이름 부르는 너의 목소리

끝이 날까 무서워서 나 눈을 계속 감아


안녕이란 인사조차 못할까 봐

그대로인데 사랑했던 너의 모습

눈가를 흘러 베갯잇을 적셔만 간다

하나둘씩 너의 모습이 흩어져만 간다


눈을 뜨면 봄처럼 곧 사라지겠지

나 눈을 뜨면 번쩍이는 섬광처럼

이제는 그대도 조금씩 안녕

에피톤프로젝트.jpg 에피톤 프로젝트 '긴 여행의 시작'(200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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