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하긴 한 걸까?"
나랑 같이 있는데도 핸드폰만 쳐다봐서,
기독교라서,
일하는 시간이 정 반대라서,
변덕이 죽 끓듯 해서,
키가 너무 작아서,
결혼 생각이 없는데 결혼 얘기를 빨리 꺼내서,
사진이랑 실물이랑 너무 달라서,
자주 못 만나서,
통금 시간이 열시라서,
나이가 많아서,
자존심을 건드려서,
대화가 잘 안 돼서,
이성 친구가 많아서,
가슴이 너무 작아서,
멀리 살아서,
스킨십을 거부해서,
스킨십에 집착해서,
개그 코드가 잘 안 맞아서,
친구들을 너무 챙겨서,
내 말을 잘 안 들어줘서,
성격을 감당할 수 없어서,
돈을 너무 안 써서,
돈을 너무 잘 써서,
전남친을 생각하는 것 같아서,
나한테 너무 집착해서,
.
.
.
가만 보면 요즘은 다 빠르다.
인터넷 속도는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핸드폰을 켜 보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고
일을 할 때도 기한에 맞춰서 '빨리빨리',
운전을 할 때도 신호 바뀌기 전에 '빨리빨리',
드라마도 예능도 새 노래를 발표하는 가수들도
'빨리빨리'바뀌는 트렌드에 맞춰서 '빨리빨리',
애들을 키울 때도 남들보다 더 앞서 배우게 하려고 '빨리빨리'...
그 때문일까, 사랑도 '빨리빨리 사랑'이 되어버린 것 같다.
처음에 나열한
저런 다양하고 별 거 아닌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헤어지고,
헤어진 후 빨리빨리 다른 사람을 만나려 한다.
이쯤에서 지금의 나는 좀 다르다고,
되지도 않을 변명을 좀 해보려고 한다.
나는 시간 낭비하는 게 싫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이런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일지라도
다른 좋은 모습들도 많지 않냐고, 싫은 부분들은
앞으로 함께 지내면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뭐 가끔 그런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난다고는 하는데
...사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년간의 연애 경험을 통해 나는
뭐라 한 마디 말로 딱 정의 내려 표현할 순 없지만
내 나름대로의 이성관을 정립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는 데 3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니면 아닌 거다.
처음 만났을 때 마음에 들거나 잘 모르겠으면 두 번째 만남을 준비한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아니면 아닌 거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마음에 들거나 잘 모르겠으면 세 번째 만남을 준비한다.
세 번째 만났을 때 아니면 아닌 거다.
세 번째 만났을 때 잘 모르겠으면 아닌 거다.
세 번째 만났을 때 집에 보내기가 아쉽다면 잡아야 한다.
물론 이 프로세스는 여성분이 내 애프터를 잘 받아주셨을 경우에 한하며
첫 번째 만남 혹은 두 번째 만남 후 까인 적도 있음을 고백한다.
아무튼 길게 만나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후
최근 몇 년 간은 이런 식이었고 나는 이 방법을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아내는 데 굉장히 적중률 높은 시스템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으며 연애를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상담을 청해 오면
꼴에 나는 뭐 얼마나 잘났고 대단하다고...
이딴 걸 내 노하우랍시고 이야기해주기까지 했다.
이 시스템의 치명적 결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어디 사는지,
생일은 언제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무서움을 잘 타는지,
뭘 못 먹는지,
뭘 잘 먹는지,
성격은 어떤 편인지 등등...
세 번의 만남은 생각보다 많이
그 사람의 대략적인 것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런 것들만 알았다고 해서,
굳이 세 번씩 나눠서 만나서 알아가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다 알 수도 있는 것들을 알았다고 해서,
그게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이 사람과의 연애를 결심하는 게 맞는 걸까?
최근의 헤어짐 이후 나는 잠정적으로 생각해오던,
이 연인 적합 감별 시스템의 치명적인 결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같잖은 방법론을 연애 코칭에 사용했었던 내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샤워하다 말고 발을 동동 구르고
롤을 하면서 라인 복귀 중에 실수로 우리팀 서포터 앞에서 점멸을 쓰고
양치하다 말고 칫솔 왕복 속도를 높이고
자려고 누웠다가 이불을 찼다.
애완동물을 기를 때조차 지내다 보면 처음엔 이럴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동물도 그러한데 사람은 오죽할까.
내가 쓰던 방법은 몇 번 만나 재미있게 놀 사람을 찾는 데엔 제격이지만
오랜 시간 함께하며 평생을 이야기할 반쪽을 찾는 데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방법이었다.
평생을 함께 할 소중한 사람은 찾거나 판별하는 게 아니라,
함께 지내면서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나는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낸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럼 내가 지난 수년간 했었던 건 뭐였을까?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면 난...
난 지금까지 뭘 했던 걸까.
나야,
전화 안 받네? 딴 게 아니고
사과.. 하려고.. 그동안 전화 못 받은 거 미안해.
사실은 못 받은 거 아니고 안 받은 거야.
반지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 반지도 그렇게 비싼 거 아니었어.
그런 게 아니고 좀 부담스럽더라.
아니 그런 말은 좀 그렇고,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암튼 요새 기분이 좀 이상해.
금방 200일이고,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는데
하.. 이따 전화할게 받아.
정성스럽게 선물을 포장하고
선물만큼의 충성스러운 사랑을 받길 바라지.
서로의 일과를 확인하고
생활 속에 서로의 비중을 늘려 놓기를 원해.
하지만 정말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을까? 난 잘 모르겠어.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예쁘다는 대답을 강요하고
사진을 지갑에 넣어두고
열 때마다 서로의 얼굴이 활짝 웃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했을까?
어떻게 알 수 있지?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지?
모든 게 정말 빠르게 흘러갔지
Rap 한 마디 하듯 눈 깜짝할 시간이었지
너의 미소는
마치 견인차 크레인처럼 내 마음을
걸쳐 놓은 채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갔지
다른 여자가 있었는데 널 만난 건지
다른 선택이 없었으니까 너랑 사귄 건지
기억도 안 나
매일 만나면서
만남의 가치가 떨어져 버린 건 아닐까 가끔 걱정이 돼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먹다 서로의 눈빛을 볼 때
혹은 함께 여행을 갔을 때
시험에 떨어져 실망한 날 위로할 때
혹은 함께 동거할 때 우리를 움직인 건
의무감, 호기심, 모성본능과 성적 욕구
그런데 그것들이 전부다 사랑하고 관계가 있는 걸까
잘 모르겠어 누구도 확신할 순 없는 거잖아
카드를 만들어줬지
발렌타인데이 카드 크리스마스 카드 생일 축하 카드
심지어 다단계 업체에서 빚졌을 때 내 명의의 신용카드까지
하지만 내 마음속에 좀 더 빨리 찾아온 건
니 얼굴이었는지 금전출납부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상황
함께할 수 있는 시간
함께할 수 있는 기분이 아니면 널 만난 적 없어
그리고 우리는 싸운 적도 많지
약속에 늦었을 때
서로를 이해 못할 때
둘 중에 한 사람이 딴 사람에게 한눈팔 때
그걸 감추려다 들켰을 때
우리를 움직인 건 급한 성격 소유욕과 이기주의
혼자 상처받았다 믿고 쓸쓸해지는 유치한 로맨스
그런 게 정말 사랑일까 잘 모르겠어
내가 믿는다고 옳은 건 아니잖아......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예쁘다는 대답을 강요하고
사진을 지갑에 넣어두고
열 때마다 서로의 얼굴이 활짝 웃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했을까?
확신할 수 없어......
정성스럽게 선물을 포장하고
선물만큼의 충성스러운 사랑을 받길 바라지
서로의 일과를 확인하고
생활 속에 서로의 비중을 늘려 놓기를 원해
하지만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했을까? 글쎄...
하지만 우리가 정말 서로를 사랑.. 하긴 한 걸까?
하...
우리가 한 게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린... 뭘 했던 거지?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