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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없는 말

"더 이상 너에게 의미 없는 걸 알아."

by 돌아보면

아직 너와의 카톡 대화 내용을 지우진 않았다. 그냥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날의 마지막 말이 채팅창 맨 밑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그걸 굳이 곱씹어 읽으며 청승을 떨 생각은 없지만 지울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너와 함께 했던 그때가 그립다는 건 아니고 네가 그리워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다. 내 통장 전부 걸고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잊혀지도록 두고 있는 거다. 2년 전 새로 체득한 이 새로운 이별 극복법은 의외로 효과가 좋아서 2년 전 떠나갔던 예전 여자친구의 카톡을 나는 끝까지 그대로 내버려 두었고 결국 새 핸드폰을 사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그때는 그렇게 이쁘다며 죽고는 못 사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얼굴과 목소리도 기억이 잘 안 난다. 지금 나는 너의 모든 것이 또렷하게 기억나지만 곧 너도 그렇게 잊혀질 것이다. 가깝진 않겠지만 멀지 않은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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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헤어진 지 오늘로써 한 달째가 되는 너는 내가 이제껏 만났던 다른 누구보다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항상 누군가를 찾고, 고백할 방법만 생각하던 내가 처음 고백이란 걸 받았는데 그게 너였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 그리고 내가 그런 너를 평소에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 그렇게 고백받아 사귀게 된 당일날로부터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다가 네가 별것도 아닌 이유로 크게 화낸 후 다음날 저녁 전화로, 카톡으로 이별 통보를 하고 떠나갔다는 것이 세 번째 이유다.


그렇게 화낸 다음날 전화 통화를 하기 전까지 너는 굉장히 차가웠고 어쩌면 나도 그 순간 헤어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제 우리 고작 100일도 안 됐으니 곧 아무렇지 않게 풀어질 연애 초반의 흔한 투닥거림일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시키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안 좋은 느낌들은 애써 꾹꾹 눌러 뒀다. 퇴근 후 건 내 전화를 받은 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그저 소설이나 노랫말에 쓰이는 감성적인 표현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나는 그날 내 귀를, 내 마음을 찢어발기는 너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목소리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 뭐라고 그랬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헤어지자는 말이었으니까. 한참을 말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어?"


"...응."


별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본 날의 기억부터 사귀기 전까지 별생각 없이 마주치던 날들, 처음 고백받은 날, 함께 놀러 다니던 날들, 여행 간 날, 함께 본 영화, 함께 먹은 음식, 키우던 고양이 이름 같은 별것 아닌 것들까지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 와중에 나는 이것이 말로만 듣던 주마등이라는 건가 라는 생각과 주마등이란 건 아무래도 인생뿐만이 아닌 다른 것들의 종말이 가까워져 올 때도 다가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충격을 받아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니다. 헤어지기 싫은 건 사실이지만 그냥 그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음이 아팠던 것과는 별개로 그렇게 빨리 체념이 된 게 웃겼지만 아무튼 덕분에 이별의 후폭풍을 심하게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날씨도 덥고 아 땀도 나는데 그냥 이별이나 해야겠다 라며 갑작스럽게 이별을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해주지 않은, 나는 모르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나와 의논했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홀로 많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일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고 결정한 너도 너고 처음 내가 좋다며 고백해오던 너도 너다. 그러니 믿는다.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이제 와서 별 의미는 없겠지만.




처음 헤어졌던 날은 2주 정도를 밤마다 눈물로 지샜다.

두 번째 헤어졌던 날은 일주일 내내 술에 취해 잠들었다.

세 번째 헤어졌던 날은 다음날이 기말고사였는데 백지를 냈다.

네 번째 헤어졌던 날은 헤어진 날 친구가 술을 사줘서 필름이 끊겼다.

다섯 번째 헤어졌던 날은 헤어진 날 클럽을 갔다.

여섯 번째 헤어졌던 날은 저녁에 다른 여자와 약속을 잡았다.


이별이란 하면 할수록 이렇게 무덤덤해지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 간단해지는 건 아니다.

사실 붙잡고도 싶고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내고도 싶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겁이 나기 때문이다.

그냥 보내는 것도 많이 아프지만

잡았다 놓쳤을 때가 훨씬 더 많이 아픔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걸 내가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겁만 많아진 것 같다.




https://youtu.be/PGqFjIZtFmg


[정키 - 내가 할 수 없는 말(Feat.나비)]


끝인 걸 알아 아마도 오늘이겠지

듣기 싫은 말 애써 준비한 걸 알아

어쩌면 우린 서툰 시작이라고

바라만 봐야 아름다웠을 거라고


수 없는 이별을 말하면서 왜

너의 진심은 없는 거야


날 사랑했잖아 원했었잖아

뜨겁게 날 안았던 너잖아

날 떠날 거라면 끝인 거라면

오늘이 가기 전에 말해줘

내가 할 수 없는 말



더 이상 너에게 의미 없는 걸 알아

시간이 지나 또 후회할지도 몰라

사랑했잖아 수없이 말했었는데

믿었었는데 고작 이거야


날 사랑했잖아 원했었잖아

뜨겁게 날 안았던 너잖아

날 떠날 거라면 끝인 거라면

오늘이 가기 전에 말해줘



바라만 봐도 설렜던 날 잊지 말아줘

끝인 거라면 니가 말해줘


날 사랑했잖아 원했었잖아

뜨겁게 날 안았던 너잖아

다 끝인 거라고 돌아간대도

결국엔 같을 거라 애써 외면하는 너잖아


어렵게 꺼낸 너도 힘들었겠지

마지막 인사도 못했는데


안녕

정키(Jungkey) 정규 1집 'Emotion' (201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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