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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면 Oct 27. 2016

사랑

"뭐라 하겠어. 내 맘은 아직도 봄날..."

  처음 세희를 본 날, 너무 예뻐서 뚫어져라 계속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세희 본인은 그런 시선에 익숙했던 건지 혹은 나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눈이 마주칠 일이 없어서 민망할 상황은 없었고 나는 그 후에도 온전히 세희의 예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 활발하고 한 얼굴 한다는 여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그 친구도 굉장히 인기가 많았었다. 나같이 학교 학원 집의 루프에 갇혀 사는 특별할 것 없는 남자는 같은 반인 것만으로도, 쳐다보는 것조차 영광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다른 학교 복학생 어떤 형이 세희한테 고백을 했다가 차였다느니, 세희를 두고 친구끼리 다퉜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돌곤 했고, 한창때의 남자로서 세희와 만나는 생각을 안 해 본건 아니지만 이내 나는 '신 포도 이론'을 적용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애써 눌러 한 곳에 치워놓고는 다시 학교 학원 집의 루프 속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나는 명절 때 '대학 어디 갔니?'라는 질문을 받자마자 수줍은 척, 하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 집안 사정이 아주 넉넉했던 편은 아니어서 친구들과 함께하는 최소한의 술자리 이외에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고, 운 좋게 장학금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대학 생활 1년을 보내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봄날 밤, 나는 세희를 다시 만났다.

"어어~? 김정시기! 너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냐?"


  이쯤에서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내 이름은 질투나 시기를 잘 할 것 같은 이름인 '김정시기'가 아니고 김정식이다. 아무튼... 그때 시간이 새벽 2시 반이었다. 누가 금요일 밤 아니랄까 봐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들어오는 손님이 있길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카운터에 앉아 다시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려던 찰나 들려온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고등학교 시절 뭇 남성들의 우상이었던 박세희가 그곳에서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같은 반이긴 했지만 노는 무리가 달라서 깊은 친분이 있지는 않았는데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서 솔직히 기뻤다.


"어... 세희네. 오랜만이다."


"야이 김정시기~누나를 임마 오랜만에 봤는데 반응이 겨우 그거야?"


"으...응?"


"이자시기 이거 안되겠네. 핸드폰 줘 봐!"


  내 핸드폰을 낚아채간 세희는 핸드폰 게임이 켜진 화면을 보고 잠시 갸웃하더니 '게임기 말고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김정시기! 감 안잡지?'라고 역정을 냈고, 게임기... 아니 핸드폰을 다시 받은 나는 게임을 끄고 화면에 키패드를 띄워 세희에게 주었다.


"그렇~취! 꼭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지 들어요 요즘 애들은!!"


  저기... 우리 동창인데. 같은 요즘 애들인데 같은 말은 어차피 속으로만 했으니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의

핸드폰 번호를 찍고 통화까지 누른 세희는 본인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까지 확인한 후 악랄하게도(?) 전화를 받아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여보세요?'라고 말한 후 끊었다. 통화료가 나가게 되었다, 이 말이다.


"우리집 이 근처거든. 지나다닌 적은 많은데 여기서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짜식... 연락해라 누나가 술 사줄게!"


  저기... 심지어 생일도 내가 두 달 빠른데... 같은 말도 역시 속으로만 했으니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 곱게 갈 수 있을지 걱정은 됐지만 편의점 안쪽에서 바로 보이는 아파트 입구까지 세희가 무사히 걸어 들어간 것으로 보아 다른 술 좋아하는 친구들처럼 귀소본능 하나는 탁월한 모양이다.


  다음날 연락을 해 보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답장이 왔다. 상황 설명을 하고 잠시 민망한 시간을 지나 보내느라 고생했지만 필름이 끊겼는데도 내 이름을 기억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날의 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매일 연락을 주고받았다. 세희는 심심하면 내가 일하는 편의점에 놀러 오곤 했고 나는 기꺼이 사비를 털어 세희가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마치 내가 그냥 주는 것처럼 건네주곤 했다. 그냥 오는 날도 많았지만 술을 마시고 오는 날도 많아서 주메뉴는 숙취해소 음료나 배 음료 같은 것이 되었지만.


  쉬는 날에는 만나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대학교, 그리고 학과마다 특성이 다르겠지만 꽤나 프리한 분위기의 우리 과와는 달리 세희네 학과는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다시 만난 첫날 다소 아저씨스러웠던(?) 세희의 술 주정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세희의 이런저런 푸념을 자주 들어주었다.


  그날도 다른 날들과 다를 것 없이 술을 마시며 세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집에 들어가기 전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술을 좀 깨고 가기로 했다. 다소 쌀쌀해진 가을 밤 공기를 느끼며 앉아있으려니 내 자켓을 걸친 채로 세희가 나를 불렀다.


"야 김정시기."


"세희야. 너는 참 예쁘고 다 좋은데 술을 마시면 기역 받침 발음이 잘 안되는 것 같아. 애들 가르칠 선생님 될 사람이 그래가지고 되겠어?"


"야이 김정시기가... 지금 누나 가르치려고 드는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 생일이 더 빠르..."


"닥쳐 내가 더 이쁘니까 내가 누나야."


"... 그렇다 치자."


"그래 그래 짜식이 김정시기랑 똑같이 생겨가지고 말야... 아무튼 말야. 누나가 생각을 좀 해봤어."


"무슨 생각?"


"솔직히 우리 김정시기가 얼굴이 빤짝빤짝 하지는 않잖아?"


  혹시나 해서 노파심에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내 이름은 김정식이다.


"사는게 힘들어서 그렇다 사는게."


"어머, 안 힘든 사람도 있어?"


"남들 힘든 거 안다고 해서 내가 안 힘든 것도 아니지."


"올~ 김정시기 말 거지같이 잘 하는데? 야! 아무튼! 빤짝빤짝하지는 않잖아?"


"그래 타인에 비해서 밝기가 어두운 편이지."


"참고로 내가 지금 술을 마셨지만 처음 만난 그날 정도로 마시진 않았거든? 멀쩡하다 이 말이야 이 김정시기야."


"그래... 잘도 그러겠다."


"근데 내가 지켜보니까 말이야 우리 김정시기가 겉보기에는 차암 어둡지만 속은 되게 눈부신 친구라는 걸 내가 알았단 말이지."


"어이구 그랬구나. 고마워라."


"그래서 속이 빤짝빤짝한걸 내가 알고 나니까 사람이 차암 다르게 보이더라 이 말이야. 안 그러게 생겨가지고 배려심도 넘치고."


"천하의 박세희가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


  이날 밤, 나는 한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세희는 이쁘고 술을 마시면 기역 받침 발음이 잘 안되고, 의외로 박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손은 차가웠지만 입술은 참 따뜻했다. 다행스럽게도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서 얼마나 오래 입술을 맞대고 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고, 어쨌든 내 생애 첫 연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세희는 노는 걸 굉장히 좋아했는데, 딱히 뭐라 할 수 없었던 건 노는 와중에도 연락은 굉장히 잘 되는 편이었고 성적도... 나보다 학점이 높았었기 때문이다. 4학기 연속 장학금에 빛나는 이 나보다!  이쁜데 잘 놀고 공부까지 잘 하는 사기 캐릭터가 여자친구라니. 가만히 있어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연애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 비해 세희는 모든 면에서 꽤나 능숙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인 나도 나지만 모태 솔로인 남자를 만난 건 세희로서도 처음이었기에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양쪽 다 나름 신선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돌이켜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은 내 곁에 없기 때문이다. 잘 만나고 있던 우리 사이가 끝나버린 이유는 나의 군 입대였고, 젊은 날의 미숙했던 우리는 요동치는 감정을 잘 컨트롤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군 입대 소식에 세희는 불같이 화를 냈고 나는 어쩔 줄 몰라 혼란스러워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을 정도의 이유지만 그땐 진짜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후... 그래서 언제 간다고?"


"10월 17일. 그렇게 됐어."


"뭐야 너무 갑작스럽잖아. 지금 다시 천천히 생각해봐도 갑작스럽네. 아무런 낌새도 없었잖아."


"재학생 입영신청을 넣어놓긴 했는데 그게 될 줄은 몰랐어. 떨어지면 아예 늦게 가려고 했는데..."


"입영신청 그거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확실하지 않으니까. 되면 말하려고 했지."


"그래서? 그 결과가 이거네? 계획대로 됐네? 좋겠어 아주?"


"세희야..."


"나 군대 못 기다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카페 점원이 커피를 들고 와서 말을 꺼냄과 동시에 세희의 입에서도 동시에 저런 말이 나왔고, 점원은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는 듯 동공이 흔들리다가 이내 모기만한 목소리로 맛있게 드시라고 말한 후 황급히 자리를 떴다.


"다시 한 번 말할게. 나 군대 못 기다려."


"세희야... 그래도 요즘 군대 많이 짧아졌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댔어. 매일 마주 봐도 변할 수 있는 게 사람 마음인데 군대 가면 오죽하겠어?"


"..."


"너가 좋아. 힘들 때 언제든 기댈 수 있어서. 말 같지도 않은 내 투정 내 장난 다 받아줘서 항상 고맙고 미안하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라 너무 좋아."


"세희야..."


"근데 너 보내고 울기 싫고, 연락도 안 되는데 잘 지낼까 밤늦게 걱정하기도 싫고, 한창 즐겁게 놀 우리 나이에 멀리 있는 너 그리워만 하면서 보내기 싫어. 그때 가서 힘들게 헤어지느니 지금 미리 정리하고 싶어. 너도 그렇게 해 줬으면 해. 사실 오늘 그 말하려고 나온거야."


  세희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나도 군대 가면서 이별하는 연인들을 수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태 솔로였던 나는 '나만은 다를거야'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있었지 않나 싶다. 그 결과가 이거였고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날 이후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세희와는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하려면야 할 수 있었겠지만 손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 4년이 지난 지금도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걷다 보니 자주 앉아 이야기하던, 우리의 날들이 시작되었던 공원 벤치를 지나치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저 벤치를 보면 마음 한구석이 쓰리다. 연애 경험이 나보다 많았던 세희의 말은 곧잘 맞았지만 만약 세희를 다시 만나는 날이 오게 된다면 단 한 가지는 네가 틀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나의 이 마음.




내가 귤빛 노을 속에 녹아 사라져도

나를 잊지 않을 거지?

어떻게든 나를 잊지 말아줘




https://youtu.be/HMEltVH9cFk


[이한철 - 사랑]


햇살이 따갑게 머리 위 뜨겁게 내린 날

나란히 걷던 발 걸음을 멈추며 말하네


울컥 떨리는 목소리가 말해 ‘잘 가’


때마침 우릴 갈라 놓은 먼지투성이 바람 이네


마른 나뭇가지 여린 잎처럼 나부끼네

맘 들키지 않게 컵에 물을 따르기 힘들어


애써 태연히 무심히 말하네 ‘잘 가’


때마침 우릴 갈라 놓은 커피 한 잔이 쏟아지네


우두커니 그 말을 그저 듣고 있었지

뭐라 하겠어

내 맘은 아직도 봄날


때마침 우릴 갈라 놓은 먼지투성이 바람 이네

넌 마치 넌 마치 남처럼 헤어짐을 말하네

변하지 않을 사랑은 없다 하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변하지 않을 나의 사랑 사랑

이한철 '작은 방'(201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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