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매일같이 말해주던 네 목소리 잊지 못하고..."
숨을 돌리고 나서 문득 돌아보니 11월이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물속에 한동안 잠겨 있었던 등장인물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비치면서 '푸하!'하고 숨을 내뱉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되는데, 오늘 아침이 딱 그 느낌이다.
물론 물에 빠지진 않았고... 그냥 최근 반년 정도 친구와의 술자리 한 번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것뿐이다. 그 사이 더웠던 날씨는 추워졌고 나는 내 일에 조금 더 능숙해졌으며 체지방이 줄고 근육량이 늘어났다. 옆집에 살던 형은 이사를 가고 밤마다 높은 확률로 박정현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새로 이사를 왔다. 부르다가 중간중간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보면 그래도 주변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왕 하는 거 조금 더 의식해서 밤 열한시에는 노래를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아직은 가끔 오며 가며 인사를 하는 정도라 조금 더 친해지면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눈을 비비고 입이 찢어질 기세로 하품을 한 후 눈의 초점을 똑바로 맞추고 나니 벽면 한쪽에 붙어 있는, 스카치테이프로 얼기설기 붙여놓은 하루 일과표 - 굴러다니는 A4 용지에다 나름 정교하게 그려 만들었다. 빨간색, 파란색, 검정색의 모나미 펜과 두 가지 색의 형광펜을 이용해 만든 이 시간표는 유치원 졸업 이후 처음 그린 것 치고는 수작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 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켜 시계를 보니 아직 기상 시간이 아니어서, 나는 이 틈새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주 5일, 나인 투 식스 - 플러스 알파 : 야근 - 의 쳇바퀴 속에 살아가는 직장인이면 주말 아침 정도는 굳이 시간표대로 살지 않아도 되겠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동안은 그럴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도 했고 뭣보다 이 좁은 자취방 안에서 빈둥대고 굴러다녀봤자 좋을 게 없지 않나?
그런데 오늘만큼은 계획을 바꾸어 오전을 통째로 비우기로 했다. 아니, 방 청소를 할 거니까 비우는 건 아니구나. 그냥 큰 이유는 없었고 누워있는데 문득 천장 형광등이 보여서, 형광등 커버에 날벌레들 시체가 까맣게 쌓여있는 게 영 거슬려서, 그러다 보니 책상 밑에 쌓인 먼지와 내 방의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보여서, 심지어 걸어놓은 시간표조차 약간 색이 바랜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 누적시키고 보니까 제법 큰 이유네.
일단 일어나서 이불부터 개고 창문과 현관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11월의 서늘한 아침 공기가 반바지에 반팔 차림인 나에게 인사를 한 후 방 한구석에 자리 잡아 내가 꾸역꾸역 방을 치우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몸에 열이 많은 나는 언제나 그렇듯 곧 더워질 것이기 때문에 굳이 그 친구를 내쫓지 않고 방 청소에 열중했다.
평소에 좁다고 투덜대던 방이었지만 방바닥 청소를 할 때만큼은 좁아서 금방 끝낼 수 있으므로 잠시 태세를 전환하여 감사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닦는다. 바닥을 닦고 현관 근처에 쓰레기를 분리해서 담은 후 형광등 커버를 분리해 바닥에 내려놓으려는 순간, 시체더미 속에서 날벌레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돌진하였고 놀란 나는 그만 커버를 놓치고 말았다.
물론 다년간의 운동을 통해 보통 사람 이상의 민첩성을 소유한 이 몸은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균형을 잡아 방바닥에 착지했고 날벌레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제 목숨을 소중히 하지 못하는 미물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고개를 들려는 찰나, 형광등 커버가 둔탁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방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의자에서 떨어질 때 하늘로 솟구쳤다가 한 박자 늦게 떨어진 모양이다.
아니 잠깐... 지금 이런 걸 분석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미 그 수많은 날벌레 시체들은 바람을 타고 내 방 구석구석 흩뿌려지고 있었고 내 어깨에도 한 마리 떨어졌다. 벽 근처를 얼쩡대던 용의자 날벌레는 발견 즉시 처치하였으나 이미 깨끗하게 쓸고 닦아놓은 내 방바닥은 처음만도 못한 상태가 되었다. 이 와중에 형광등 커버가 깨지는 재질이 아닌 것에 감사라도 해야 되나.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밀정에서 본 명대사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를 휴지에 파묻혀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을 그 날벌레 놈이 읊조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즐겨 봤던 일본 애니메이션 블리치에 나오는 쿠치기 바쿠야라는 캐릭터가 '흩날려라, 천본앵!'이라고 외치는 모습도 좀 전 벌레가 흩날리는 모습과 함께 스쳐갔다. 저게 벌레가 아니고 벚꽃잎이면 얼마나 좋을까. 기묘한 피해 의식과 패배감에 젖어 날벌레들을 쓸어 담고 처음부터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벌레들이 가볍다 보니 벌레들은 책상과 책꽂이까지 날아가 있었다. 한숨을 쉬며 물티슈로 하나하나 잡아내던 중, 손바닥 크기 정도의 작은 핑크색 수첩을 발견했다.
아.
오...이거.
음...
그래.
와...
진짜...이거...
하...
그래.
이게 여기 있었구나. 이걸 내가 아직 안 버렸구나. 아니, 못 버린 건가. 뭐가 됐든 이런 걸 아직까지 잘도 가지고 있었구나 나는.
'커플 다이어리 실사판'이라고 수첩 첫 페이지에 여자여자한 글씨체로 적혀 있다. 당시 거의 끝물이던 싸이월드 커플 다이어리의 오프라인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간지러운 거 싫어하는 주제에 또 싫다고는 말 못 하고 곱게 따라 썼던 기억이 난다.
무심코 내용을 쭉 훑어보고 있으려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정확히는, 헛웃음이 나왔다. 단 한 페이지도 '사랑해'같은 말이 안 들어가 있는 페이지가 없었다. 같이 갔던 맛집들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와 함께 그림을 귀엽게 참 잘 그렸던 그녀가 솜씨를 발휘해 그린 간단한 그림들이 있었고, 함께 봤던 수많은 공연 티켓,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이 월 단위, 년 단위로 적혀 있었다. 실패한 계획엔 귀여운 글씨로 그 계획에 대한 피드백이 적혀 있었고 - '다음 달에 오빠랑 다시 시도해 봐야겠당!ㅠㅠ'같은... - 성공한 계획엔 동그라미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인 파란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파란 동그라미는 어느 시점에서 멈춰 있었고, 이후의 빼곡한 계획들은 그저 계획들로만 남게 되었다.
사귀는 동안 글로, 말로, 행동으로 사랑한다 좋아한다 셀 수 없이 표현하고 나중에 직장은 어느 쪽으로 잡을지, 그 지역 원룸 시세는 어떻게 되는지, 부모님께는 언제쯤 말씀드릴지, 결혼은 언제 어디서 할지, 가사분담은 어떻게 할지, 애기는 몇 명 낳을지, 몇 년 텀을 두고 낳을지, 주말엔 뭘 하고 애완동물은 뭘 키울지 이런 얘기들... 거리를 걸으면서, 카페에 앉아서, 공원에 돗자리 깔고 무릎베개를 하고서, 강의실에서 쪽지를 주고받으면서, 내 방에 누워서 수없이 했었는데 정작 '헤어지자.'라는 말 한마디에,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게 허무하고 슬프고 가혹하고 웃겨서 웃었다. 그렇게 넋 나간 사람마냥 웃다가 문득 열린 현관문을 통해 외출 중이던 옆집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대청소 중이시네요."
"아... 네."
"어휴 저도 청소 좀 해야 되는데... 근데 뭐 즐거운 일 있으세요?"
"아뇨 그...음...네."
"헤헤. 그럼 주말 잘 보내세요!"
웃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울고 있었으면 이웃 앞에서 퍽 창피한 꼴을 보일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웃음 대신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잘 정리해둔 쓰레기를 내다 버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늘한 아침 공기를 내쫓으며 문을 닫은 후 이불속에 처박혀 어두컴컴한 내 방이 더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멍하니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다.
나빴었던 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우리가 함께 한 날들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좋았었던 그때가 많이 그립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힘든 우리 세상 이렇게 살 순 없잖아
지금이라도 꿈을 가지고 달려보는 기분 넌 느껴지니?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우리들의 꿈도 빛나지
너의 눈빛을 볼 땐 난 행복했어
니가 날 떠나가는 그날이 오기 전까진 하지만 난 그녈 사랑해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너의 소식을 듣고 난 멍하니 있어
하루 온종일 널 생각하나 봐
일도 잘 안 잡히고 집중이 안 돼
괜찮았는데 요즘 따라
니가 생각나 이맘때쯤에
웃고 있던 너와 내가 생각나는데
니 무릎을 베고 하늘을 보며
먼 훗날 우리 얘길 했는데
사랑한다고 내 귓가에 말해주던 너의 목소리
그게 뭐라고 또 생각나
하나둘씩 떠오르지 함께한 추억들이
그리워지네
난 다짐을 했었지 너의 근황들을
안 보고 지내고 싶었는데
그게 말처럼 안 돼 나 혼자 아픈 건가 봐
넌 잘 지내나 봐
저녁이 오면 사람들 속에
우리도 섞여 걸었었지 손을 잡고서
하지만 이제 네가 없어서
너무 외로워
사랑한다고 내 귓가에 말해주던 너의 목소리
그게 뭐라고 또 생각나
하나둘씩 떠오르지 함께한 추억들이
그리워지네
그 누군가 내게 말을 했지
세월이 곧 약일 거라고
널 많이 사랑했나 봐 그랬나 봐
이젠 잊을 때도 됐는데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매일 같이 말해주던
네 목소리 잊지 못하고
하나둘씩 떠오르지 함께한 추억들이
그리워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