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테이프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 본 포스팅은 지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메모할 땐 나름 글씨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보니 고대 문자가 따로 없네요. 어쨌든 핵심 내용은 알아볼 수 있게 써서 참 다행입니다.
얼떨떨했다. 그 문자를 확인한 건 특별히 기대하고 확인한 게 아니었는데. 확인하고서도 내 눈을 의심한 나는 변하는 건 없겠지만... 핸드폰 화면을 눈 가까이 가져다대기까지 했다. 그냥 또 어디 은행이나 카드회사 같은 데서 보내는 광고 문자겠거니 하고 지워버리기 위해 확인을 했는데 지웠으면 큰일 날 뻔했다. 뭐 이래저래 말이 많았는데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합격'이라는 단 두 글자였다.
나라를 밝히는 건 좀 그렇고... 아무튼 나는 얼마 전 외국의 한 국제학교의 교사 자리에 지원을 했다. 2년 동안이긴 하지만 어쨌든 외국에서 커리어를 쌓는다는 건 꼭 해보고 싶던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지원 자격이었던 교사 경력도 미달됐었고 운 좋게 서류 합격 후 보러 갔었던 면접도 쟁쟁한 경쟁자들을 보며 망쳤다고 생각했지만 웬일인지 덜컥 최종 합격을 해 버린 것이다. 방학이라 딱히 할 것 없이 거실에 누워 있던 나는 거짓말 같은 합격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자마자 소리를 질러 평화롭게 평일 오후의 독서를 즐기던 엄마를 방해했으며 잠시 후 합격 사실을 눈치챈 엄마는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읽던 책을 집어던지고 나를 안아주며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아주 평생 가는 것도 아니고 겨우 2년 있다 오는 거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당분간 떨어져 지내야 하니까... 그 날 이후 친구들과의 모임을 꽤 많이 가졌다. 당연하지만 술이 빠질 수 없었고 덕분에 지금 속이 엉망이 되어 약을 챙겨 먹고 있는 시점이다. 어쨌든 재원이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건 그 동기 모임 자리에서였다.
재원이는 스무 살 때부터 알게 된 과 동기이자 예전 남친이었으며, 매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에 함께 속해 있는 내 친구였다. 헤어졌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지낼 수 있냐고 묻겠지만 나도... 아니 우리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같은 과였으니 계속 얼굴을 봐야만 했다. 심지어 학번도 내 끝자리가 0492, 걔 끝자리는 0491이라 유난히 팀 과제가 많았던 과 특성상 팀 과제를 같이 해야 하는 때가 많았다. 그런 우리였기에 사이가 나빠져서는 안 된다는 걸 서로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간은 그러한 계산적인 것들과 지난날의 감정을 무디게 만들었고 우리는 이제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뭐 재원이와 단 둘이 따로 본 적은 없었고, 동기들끼리 우르르 만날 때나 함께 만나 놀곤 했다.
다시 그 내 송별회를 겸한 동기 모임 자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동기들 중 몇몇한테서 선물을 받았다. 여자애들이 많았어서 선물들은 화장품이 대부분이었는데 재원이한테는 특이하게도 음악 CD를 선물 받았다. 지금 이야기하는 노래가 수록된 김동률 5집 앨범이었다. 앨범을 건네주며 재원이는 1번 트랙의 노래 제목이 '출발'인 것은 나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가서 잘 하고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 주었다. 집에 와서 앨범 재킷을 봤을 때 프린팅 된 것처럼 정교한 흰색 글씨로 - 처음엔 원래 앨범에 포함된 디자인인 줄 알았다. - 새로운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가서도 당당하게 가슴 펴고 잘 하고 돌아와라 라는 식의 파이팅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그래. 재원이는 이런 남자였다.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었으며 높은 전투력을 가졌을 것만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꽤 섬세한 남자였다.
그렇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앨범 재킷의 노래 가사들을 읽고 있던 중, 사실 이 모든 노래 가사가 어쩌면 나에게 전하는 이야기 같은 게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디 가서 말하면 '너 도끼병 아님?' 이라며 비웃음 당할만한 생각이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이재원은 충분히 그럴 만한 남자였다.
사귈 때 함께 싸이월드 BGM으로 맞췄던 노래, 함께 데이트하며 들었던 노래, 노래방만 가면 항상 불러 주던 노래 모두 의미가 있는 거라고 이야기하던 재원이였다. 그렇게 노래에 의미를 두는 성격인걸 아는데, 앨범의 곡들을 보면 대부분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앨범을 선물로 줄 때 남긴 재원이의 묘한 표정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니 그렇다고 기분이 나빴다는 건 아니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노래가 없고 김동률의 목소리도 정말 좋아한다. 앨범 속에 여러 노래들이 있지만 그 중 제일 좋아하는 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노래다. 보통 남녀가 헤어지고 나면 남자들은 그동안의 좋은 기억만, 여자들은 나쁜 기억만 남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재원이랑 만났던 생각을 하면 우선 풋풋했었다 라는, 약간 부끄러우면서도 그리운 아련한 기분이 든다. 그때는 참 좋았었지 하는 생각 말이다.
근데 딱 거기까지다. 그것뿐이다. 시간을 돌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던가, 재원이랑 지금이라도 다시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그땐 좋았다고...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그렇게 뒤돌아보았을 때 미소 지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시절이 나에게도 있다는 게 좋다고.
재원이도 나도 헤어진 후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다. 이제 와서 이런 것들이 크게 의미를 두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그냥 나의 짧은 망상? 착각에 불과하다. 어쩌면 나는 내 망상이 꽤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여기고 다시 재원이와 잘 해볼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뿐이다. '아쉬움과 후회는 부정된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하지만 그때 그것들이 부정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뭐... 봐서 알겠지만 이렇게 잡생각이 많은 나는 수시로 뒤를 돌아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선택받지 못해 부정된 나 자신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나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과거가 있었음을 회상하고 그것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지금도 귓가에 흐르는 이 노래가 주는, 추억이라는 선물이 그러하듯이.
사랑하며 밝게 빛났던
너와 함께했던 그때의 내가 그리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사랑 하나에 온 힘을 쏟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
이런 노래를 들으면 감정의 폭풍에 휘말렸을
성숙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
우연히 찾아낸 낡은 Tape 속에 노랠 들었어
서투른 Piano 풋풋한 목소리
수많은 추억에 웃음 짓다
언젠가 너에게 생일 선물로 만들어준 노래
촌스런 반주에 가사도 없지만
넌 아이처럼 기뻐했었지
진심이 담겨서 나의 맘이 다 전해진다며
가끔 흥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
오래된 Tape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울다가 웃다가 그저 하염없이
이 노랠 듣고만 있게 돼
바보처럼
널 떠나보내고 거짓말처럼 시간이 흘러서
너에게 그랬듯 사람들 앞에서
내 노랠 들려주게 되었지
참 사랑했다고 아팠다고 그리워한다고
우리 지난 추억에 기대어 노래할 때마다
니 맘이 어땠을까
Radio에서 길거리에서 들었을 때
부풀려진 맘과 꾸며진 말들로
행여 널 두 번 울렸을까
참 미안해 이렇게라도 다시 너에게 닿을까
모자란 마음에
모질게 뱉어냈던 말들에
그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워-
오래된 Tape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울다가 웃다가 그저 하염없이
이 노랠 듣고만 있게 돼
바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