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뭘까. 난 그게 참 궁금해"
우리 회사의 공식적인 퇴근 시간은 오후 6시이다. '공식적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대체로 그때 퇴근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며 '많지 않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사람이 있긴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그 몇 안 되는 '많지 않은 사람'에 포함된다.
업무를 항상 퇴근시간 전에 정리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 우리 팀장님이 회사 내에 있는 많은 팀장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자비심 넘치는 팀장님이라 퇴근 때 눈치를 주지 않는 것이 - 심지어 본인이 먼저 나가실 때도 있다. - 두 번째 이유, 퇴근 후 시간을 뜻대로 쓰고 싶은 내 욕심이 세 번째 이유다. 사실 다른 팀장님들도 눈치 주는 분은 없지만 다들 보면 괜히 몇 분 더 앉아 있다가 가곤 하더라. 굳이 왜...모르겠다. 어쨌든 그분들은 그분들이고 나는 간다. 여섯 시가 되었으니 저는 갑니다. 오늘도 무사히. 내일 뵙겠습니다.
회사 문을 나서서 체육관 문 앞에 도착하기까지 플러스 마이너스 5분 정도 해서 대략 43분 정도가 걸린다. 지난 5개월 간 대충 시간을 보니 그 정도 걸렸다. 수업이 7시 시작이니까 체육관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와도 시간이 남는다. 공복에 운동하면 힘이 없으니 퇴근하고 지하철역 가는 길에 미리 사둔 초코바를 꺼내 먹는다. 정말 밥 다운 밥을 먹을 때보다는 힘이 덜 나지만 안 먹는 것보단 낫다.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난 후 다시 체육관을 나서면 8시 30분 정도가 된다. 이 시간 이후엔 온전히 내 시간이기 때문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간다던가 -마침 근처에 영화관이 3개나 있다. - 집에 가서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본다던가 정 피곤하면 일찍 쉬거나 한다. 영화도 요즘 껀 다 봤고 집에 가서 책이나 좀 보려고 했는데 핸드폰에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찍혔다.
대학 동기였던 명진이인데,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됐다고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모바일 청첩장이었다. 대학교 시절 함께 술을 마시며 등도 두드려주고 서로의 연애 고민도 털어놓던... 꽤 친했었던 대학 동기였다. '친했었던'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졸업 후 각자 먹고 살기 바쁘다는 등의 여러 핑계로 연락이 뜸해졌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한 기업의 면접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로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명진이가 '언제 밥 한번 먹자. 연락할게.'라고 했었고 그 말에 나는 '그래. 나도 연락할게. 면접 잘 봐!'라고 했었다. 당연하지만, 두 사람 모두 연락은 하지 않았다.
명진이를 탓할 생각은 없다. 나도 연락 따로 안 했었고... 명진이처럼 한땐 죽고 못 사는 사이었지만 멀어지게 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쯤 되면 사회생활이 원래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 한 4년 전쯤이었다면 마음이 좀 상했겠지만 이제는 무덤덤해졌다. 무심하게 창 밖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명진이의 메시지에 답장을 했다.
'야 진짜?간만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세상에... 축하해 결혼 축하해!!!!ㅠㅠ그날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일 안 바쁘면 갈게! 축하한다 진짜!'
오타가 있는지 없는지 검사조차 안 하고 항상 그곳에 있는 '전송'버튼까지 누르고 취소 버튼을 연타해 대화창을 껐다. 물론 청첩장은 열어보지 않아서 결혼식 날짜는 잘 모르겠다. 이쯤 되면 늦깎이 신인 연기파 배우로 데뷔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렇게 보니 내 자신을 되게 냉정한 사람처럼 표현했지만 사람들하고는 유들유들하게 잘 지내는 편이다. 회식 자리에는 빠진 적이 없으며 친구나 회사 사람들이 퇴근하고 한 잔 하자고 하면 그 날 운동은 쉰다. 그들에게 나는 의외로 평이 참 좋은데, 술자리 같은 곳에서 가끔 고민 같은 걸 잘 털어놓아서다. 물론 크리티컬한 고민은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얕은 고민들을 슬쩍 이야기하면 그들은 항상 해결책을 제시해준다며, 조언을 해준다며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방법들을 이야기해준다. 종종 자기 고민도 털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적당히 듣기 좋을 만한 말들로 대응해 준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나와 더 친밀해졌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 식이다. 너무 계산적이고 영악한 거 아니냐고 하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다. 나도 안다. 이런 비슷한 거 보고 뭐라더라 소시오패스? 아니 근데 솔직히 그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나. 어차피 다들 계산적으로 살잖아. 나는 그것들을 온전히 내 통제 범위 안에 두고 싶을 뿐이다. 왜냐면 그게 편하니까.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리지 않을 테니까. 정말 친한 친구는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으니 애초에 논외로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그렇지 않잖아.
사실 모든 점에서 컨트롤이 잘 되었던 건 아니다. 사랑은 몇 번을 해도 도무지 예측이 안 되고 감정 소모만 심하게 되는 바람에 나는 어느 순간 그렇게 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이내 연애도 귀찮아져서 안 하게 되었다. 굳이 여자친구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성 친구들과 밥을 먹고 영화를 먹고 술도 마실 수 있으며 어딘가로 놀러 갈 수도 있으니까.
합리적이고, 내 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사는 이런 내 인생 정말 괜찮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의 내 평도 좋은 편이고, 연봉도 매 년 오르고 있다. '오빤 뭐가 문제인지 몰라!' 라며 떠나간 혜연이와의 기억도 이제는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혼자 한번 잘 살아보라고 해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혜연이의 말을 굉장히 잘 들어서...지금 굉장히 잘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게' 온다. 이걸 당최 뭐라고 표현할지 몰라서 나 혼자 그냥 '그거'라고 부르고 있다. 한 방송인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입에 달고 다니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내 말이 딱 그 말이다.
'그게'오면 기묘한 무력감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평소에 생각도 않던 외로움도 어느 새 내 곁에 살며시 비집고 들어와 앉는다. 오래 머물다 가는 편은 아니지만 '그건' 틈이 보이면 언제든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에 나는 대체로 일상 속에서 할 일 없이 보내는 잉여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편이다.
아직까진 뾰족한 대안이 없어서...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 인정하긴 싫지만 어쩌면 혜연이의 말대로 난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뭘 해야 알 수 있을까.
어딜 가야 알 수 있을까.
누가 이걸 알려줄 수 있을까.
그걸 알게 되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까.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진짜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시 사랑이란 걸 하게 된다면, 그땐 알 수 있을까.
...
그래.
인정한다.
사실은 언제나 네가 그리웠다.
나는 스스로를 굉장히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은 것들은 다 기억했고
잊고 싶은 일들은 기억 속에서 지웠지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저 희미하게 떠오르는
너의 얼굴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운동을 하고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영화도 챙겨보곤 해
서점에 들러 책 속에 빠져서
낯선 세상에 가슴 설레지
이런 인생 정말 괜찮아 보여
난 너무 잘살고 있어 헌데 왜
너무 외롭다 나 눈물이 난다
내 인생은 이토록 화려한데
고독이 온다 넌 나에게 묻는다
너는 이 순간 진짜 행복 하니
난 대답한다 난 너무 외롭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사랑이 뭘까 난 그게 참 궁금해
사랑하면서 난 또 외롭다
사는 게 뭘까 왜 이렇게 외롭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