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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면 Jun 22. 2017

마지막 순간

"또 마주치는 일이 없을 것 같아 우리 또다시..."

  누구나 계획을 가지고 살기 마련이다. 짧게는 '내일 뭐 하지?' 에 대한 것부터 장래희망 등 미래에 관한 것까지. 사실 이런 것들은 인터넷을 찾아본다거나, 조언을 듣는 등의 방법으로 많은 사례를 접할 수 있다.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케이스가 있겠지만, 그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맹신하면 곤란하되 참고 정도는 괜찮은 것 같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나는 그런 식으로 제법 계획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죽음에 대한 것은 제외하고 말이다.


  무릇 가장 좋은 조언이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하는데, 죽음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직접 조언을 들을 수는 없고 그 주변 사람들이 겪은 것을 통해서 추측은 할 수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슬픔 외에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까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어느 날 병원을 다녀온다고 했을 때도, 별거 아니라며 며칠 입원한다고 했을 때도, 며칠이 몇 주, 다시 몇 주가 몇 개월이 됐을 때도, 그리고 끝내 돌아가실 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쩔 줄 모르고 멍청하게 앉아있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이런 일이 나에게 찾아올 줄 알았으면 그때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걸. 조금 더 시간을 들여 깊게 고민해볼걸. 그러면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손을 꼭 잡아드리는 것 말고 뭔가 더 의미 있는 걸, 의미 있는 말을 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장례식장엔 수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부모님의 지인들, 친척, 동생의 지인들, 연락만 하고 지내던 오랜 친구들도 다녀갔고 학교 동창들과 선후배들, 예전 회사와 지금 회사의 직장 동료들까지. 이렇게 장례식장이 북적이니 어머니도 행복해하실 거라고 한 어르신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이야기하고 가셨다. 순간 얼굴 쪽으로 열이 확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좋은 의도로 하신 말씀인 건 알겠지만 당장 쫓아가서 두들겨 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잖아. 사람이 죽었는데 행복이란 말이 입에 담고 싶냐며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나와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욕을 먹었겠지.


  '너는 욱하는 성격 좀 버려야 해' 라고 생전에 종종 하셨던 말이 문득 귓가를 맴돌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마치 바로 옆에서 혼내시는 것처럼. 그때는 이게 무슨 화내는 거냐며 대들었었지.


  내가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막말을 내뱉은 - 물론 내 기준이니까 본인은 꿈에도 모르셨겠지만 - 어르신은 장례식장을 떠나가셨고, 갈 곳을 잃은 화는 내가 한쪽 구석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같이 사그라들었다.


  나 이제 이렇게 욱하는 거 잘 참는데. 사람이 자기 할 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 맞지만 그거랑 다른 사람들을 찍어 누르고 화를 내고 하는 거랑은 다르다는 거 이제는 잘 아는데...

  밖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진 것까지 창문을 통해 본 것 같은데 그러면서 앉은 채로 스르르 잠들었던 것 같다. 누가 툭툭 건드려서 화들짝 일어나서 올려다보니 소진이가 와 있었다. 밖은 진작 아침이 밝아 환했다. 화장으로 숨긴다고 숨겼지만 나이트 근무로 인해 내려온 다크서클이 얼굴 한쪽에 주렁주렁 매달려 내게 인사하고 있었다. 어머니랑은 다섯 번 봤나? 두 번째 봤을 때 내숭을 슬슬 안 떨기 시작하더니 세 번째 봤을 땐 둘이서 내 흉을 보고 네 번째 봤을 땐 번호 교환을 했다. 이런 날들이 계속되고, 우리가 나중에 결혼한 후에도 다 함께 행복한 날들이 계속될 줄만 알았다. 나도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고 소진이도 그랬다.


  3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모르겠다. 정신이 들고 보니 장지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지난 3일, 그리고 그 이전의 시간,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리고는 내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어느 날에서 멈췄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심부름을 시도한 날이었는데, 첫 시도는 슈퍼마켓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집으로 돌아오며 실패했다. 옆으로 미는 문을 앞으로 밀고 있었으니 당연히 문이 안 열리지. 시무룩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한 번 더 해볼 수 있겠냐고 물었고 나는 금방 또 자신감에 차서 다녀오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문의 비밀(?)을 여전히 풀지 못했던 나는 두 번째 시도도 실패했다. 어째서 그 시간 동안 그 슈퍼마켓에 아무도 오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한층 더 시무룩한 모습으로 집으로 향했고, 어린 나이에 자존심은 있어서 몰래 살금살금 들어가려다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어머니와 딱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웃으시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고, 나는 격하게 도리질을 하고는 뒤돌아서 다시 슈퍼로 향했다.


  세 번째 시도는 성공이었다. 나는 세상 당당한 표정으로 심부름 물품인 새우깡을 품에 안고 열려있는 집 문 안으로 들어갔으며 기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잠시 후 따라 들어온 아버지를 보고는 웃음을 빵 터트리셨다. 그때는 왜 웃는지 몰랐고 어쨌든 어머니가 웃으니까 따라 웃었는데, 지금은 왜 웃으셨는지 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마침 퇴근 중이던 아버지는 슈퍼마켓 앞에서 서성거리던 나를 발견했고, 자초지종을 들은 후 너무나도 쉽게 슈퍼마켓 문을 열어주었으며 덕분에 나는 드디어 방 안에서 수없이 연습한 대로 무난하게 새우깡을 샀다. 아마도 따라 들어오는 아버지의 묘한 웃음을 본 어머니는 이 모든 과정을 짐작하셨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들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 그 손길, 목소리, 뿌듯함, 따스함, 즐거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외에도 평생을 함께하며 쌓아온 수많은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지금 여기 이곳에 묻지만, 앞으로는 그 기억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엄마

엄마

있잖아 엄마

내가 엄마만큼 잘할 수 있을까?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아빠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말하겠지만, 아빠한테도 엄마한테도 많이 배웠잖아. 비율로 따지면 50대 50이랄까.


  돈 주고도 못 배우는 것들 참 많이 배웠는데 평소에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미안해. 마냥 예쁘고 착한 아들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미안해. 일하면서 용돈도 많이 못 챙겨줘서 미안해. 남들은 부모님 여행도 보내주고 그런다는데 한 번도 못 그래서 미안해. 말도 없이 외박 여러 번 해서... 걱정 끼쳐서 미안해. 나가야 하는데 양말 빨래 깜빡했다고 왜 양말 없냐며 짜증 내서 미안해. 거실에 만 원짜리 올려둔 거 PC방 가려고 말 안 하고 가져가 놓고 모르는 척했던 거 미안해. 일기예보 잘못된 건 엄마 탓이 아닌데 왜 비오는 거 말 안해줬냐며 짜증내서 미안해. 공부한다고 도서관 간다고 용돈 타 놓고 놀러갔다와서 거짓말해서 미안해. 사실 이런거 말 안했어도 다 알고 있었겠지만 미안해.


그런데도 고맙다고... 사랑한다는 건 간지러우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고맙다고 말 많이 못 해서 미안해.

엄마가 했던 것만큼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 잘 살아볼게. 말을 어떻게 끝내야 될지 잘 모르겠다. 이래본 적이 없어서. 엄마한테 물어봤으면 뚝딱 하고 답이 나왔을텐데.




[윤종신, 포르테 디 콰트로 - 마지막 순간]


마지막 그대 표정 모두 외워둘게요

또 마주치는 일이 없을 것 같아 우리 또다시

사랑은 이렇게 가는 걸 알기에

그리울 걸 난 알기에

다 알면서 보내


다 잊을 때까지만 이 순간을 간직해

말없이 말을 하는 그대의 눈을 쉽게 잊을까

추억이 한없이 맴돌 걸 알지만

너무 늦은 걸 알지만

내 사랑 잘 가오


정말 미안했어 다툰 날

정말 고마웠어 위로해준 날

그 긴 시간이 모두

이 안녕 한 번에 지워질까


이제 보내 드리리

힘들었던 아픔들

이제는 편안히 놓아요

이제 자유롭게 날개 활짝 펴 주오



다신 희생하지 말아요

다신 하고픈 말 참지 말아요

이기적인 날 사랑했지만

때늦은 후회만이


이제 보내 드리리

힘들었던 고민들

이제는 편안히 놓아요

더 자유롭게 날갯짓해요

모자란 날 용서해주오

내 방법으로만 그댈 사랑했었던

철없던 내내 그리움 속에

남은 날 보내려오



내 생은 늘 빛났어

가리워진 빛 뒤편엔

언제나 날 바라봐 준 그대가 있었어



더 사랑받았어야

세월은 가혹하오

깨달은 지금의 눈물이 다시 거슬러 올라

돌이키고 싶다오

그댈 처음 만난 날

해맑은 미소가 설렜던

한 소녀가 주인공인 그날로

윤종신, 포르테 디 콰트로 '2017 월간 윤종신 3월호' (2017.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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