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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면 Jul 09. 2017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를 순 없어"

  생각해보면 나한텐 과분한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키만 번듯했지 뭐 하나 잘난 것 없던 나를 좋다고 해준 너라는 존재가 말이야. 그냥 그때는 그 행복함이, 그 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어.


  신입생 OT 때 같은 조였던 너에게 번호를 물어본 남자만 내가 알기로 열 명이 넘고, 학기 초엔 널 보겠다고 여기저기서 우리 과가 아닌 시커먼 남자들이 강의실 근처를 기웃거릴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함께 남산 가자고 했던 그 날 밤, 네가 날 좋아한다고 했을 때 난 진짜 너무 깜짝 놀랐었어. 나도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그 순간에도 계속 신기했어. 나 같은 애가 너랑 연애해도 될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 무서웠지만, 그런 것보다 좋은 마음이 더 커서 안 좋은 마음 같은 건 금방 날아가 버렸었던 것 같아.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던 날, 우산이 없다고 해서 같이 우산을 쓰고 다른 건물로 수업을 들으러 간 적이 있었어. 우산이 컸던 편은 아니라 너 비 안 맞도록 우산을 슬쩍 네 쪽으로 기울이고 걸었었는데, 그때 흠뻑 젖은 내 어깨를 보고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했지. 지금이야 스무 살 소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때는 '겨우 그런 걸로?'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기해했던 것 같아.

  사귀기로 한 다음 날 함께 손을 잡고 강의실을 들어서는 우릴 본 사람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해. 지민이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자기 핸드폰을 떨어트렸고, 종길이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한동안 입까지 벌린 채 우릴 쳐다봤으며 형래는 후다닥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예의 그 걸쭉한 사투리로 '니들 진짜가?'를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말해서 같이 웃었잖아.


  2년 전,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잘 풀려서 지금 우리 집은 널 만나던 예전에 비하면 상상도 못 할 만큼 여유로워졌어. 돈이 없으면 말 그대로 '헬조선'이지만 돈만 많으면 우리나라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그저 우스갯소리만은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체험 중이야.


  그렇지만 대학 시절 널 만날 때는 우리 집 사정이 정말 안 좋았어. 편의점이랑 술집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했고, 운 좋게 장학금까지 좀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등록금 내고 월세 내고 관리비 핸드폰비 내고 집에 돈 보내고 나니 데이트할 때 쓸 돈이 없더라.


  항상 미안했어. 바로 윗 학번 성철이 형이 자기 여자친구한테 해 줬던 이벤트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무용담처럼 늘어놓을 때면, 뭔가 죄지은 사람처럼 불편한 기분이 들었어. 옆에서 '우와 정말요? 언니는 좋겠다~'라는 말을 하던 너를 그런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게 해 주고 싶었는데...


  번화가 나가면 다 돈인지라 술이 마시고 싶을 땐 학교 후문가에서 소주가 1500원이던 술집을 갔고, 단 게 땡기면 한 잔에 천 원 하는 생과일주스를 사서 공원을 거닐며 얘기를 하거나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듣곤 했지. '구경하는 데엔 돈 안 들잖아!'라며 함께 아이쇼핑도 종종 했었고. 마음에 드는 티를 조금이라도 냈다가는 자기도 먹고살기 빠듯한 주제에 당장 사줄 기세여서 '뭐 별거 없네. 나갈까?'라는 식으로 먼저 매장을 나서곤 했지만 말이야.


  한번은 가게 마감 이후 주방 이모님의 노련한 지도를 받아 너에게 줄 도시락을 만든 적이 있었어. 네가 좋아하는 문어 모양 소세지랑 속에 참치랑 마요네즈를 넣은 주먹밥부터 해서 3단 도시락통을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채워 놓고 혼자 뿌듯해했었어. 정리를 마무리하고 이모님께 인사를 하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5시여서 나는 이 도시락을 어쩔까 하다가 품에 안고 앉은 채로 그냥 잤다. 다른 데 놔두면 식을까 봐. 한강 공원에서 널 만나자마자 느닷없이 화창했던 날씨가 변해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결국 다 식은 도시락을 들고서 네 자취방에서 함께 먹게 되었지만.

  성철이 형처럼 차가 있었다면 널 젖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변변찮은 밥만 먹었는데 자취하면서 먹었던 밥 중 제일 맛있었다고, 그저 좋다고 말해주는 네가 정말 고맙고 사랑스러웠어. 그리고 미안했어. 다른 커플들이 서로에게 해주는 거 다는 못 해주더라도, 그 나이대 여자애들이 좋아할 법한 건 최대한 해 주고 싶었는데. 커플 티셔츠, 향수, 화장품 등 오히려 나는 너에게 받기만 했었지.


  생활비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것처럼 빠듯했지만 그래도 조금 무리해서 한 가지 해줬던 게 있어. 커플링인데, 이것 때문에 그 악명 높은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처음 해봤다. 돈 많이 줘서 그건 좋았는데 그것뿐이었어. 이후 한동안 주변에서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온 몸을 던져서 뜯어말렸지.


  종로에서 몇 번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귀금속 상가도 돌아봤었는데 특별히 리액션이 좋았던 반지의 모습과 손가락 치수를 기억해 뒀다가 몰래 준비해서 깜짝 이벤트 해줬었잖아. 너가 돈이 어디 있어서 이런 걸 샀냐고 혼남과 동시에 커플링 처음 해 본다며 고맙다고도 말해줘서 기분이 묘했는데, 좋았어. 상하차 때문에 몸은 욱신거렸어도 그 순간엔 그런 거 하나도 안 느껴지더라.

  함께 반지를 나눠 끼고 웃는 그 날 네 모습 정말 예뻤어. 돈 마련하고서 집 와서 드러누운 날, 상하차 아르바이트고 뭐고 이런 거 다신 안 한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몇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물론 그런 일은 없었고 그 반지는 기념일마다 선물 살 돈이 없어서 편지만 써 주던 내가 너에게 해 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 되어버렸네.


  이해해. 나는 성인군자와 사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의 평범한 여자아이와 사귀고 있었으니까. 하고 싶은 거 정말 많았을 텐데 궁상맞은 나 같은 남자를 만나다 보니 너도 속으로 많이 흔들렸겠지. 이해했고, 이해해. 이해합니다.


  자주 가던 공원 벤치에 언제나처럼 함께 나란히 앉았어. 시덥잖게 날씨 이야기나 하며 우물쭈물하던 너는 조심스럽게 돈 때문에 힘들다고 말을 시작했고, 어렵게 어렵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지. 자기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미안하다며 펑펑 우는 너를 달래면서 나는 너를 잡고 싶은 욕심도 함께 달랬다. 


  헤어진 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최대한 빠르게 군대를 갔어. 같이 수업 듣는 게 많았는데 혹시라도 내 눈치 보면서 하고 싶은 거 못 할까 봐.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지. 입대 월 수가 꼬여서 1년 늦게 복학을 했는데 그사이 넌 다른 학교로 편입을 해서 볼 수가 없었어. 졸업하고도,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질 못했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너를 정말정말 많이 사랑했지만, 그것은 예전 일이니까. 사실 지금도 그립고 보고 싶은 건 맞지만 그것은 그때의 너를 사랑하던 그때의 나를, 너와 함께하던 그 '순간'과 그 순간의 너가 그립고 보고 싶은 거니까.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은 살 수 없으니까. 그때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아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에게 그때의 우리가 아닐 테니까 그때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없겠지. 어쩌면 변해버린 모습에 실망해서 예전의 아름다운 기억까지 망칠지도 몰라.


  그냥 그거야. 우리의 시간은 그날 저녁 그 공원에서 멈췄어. 알아 나도.

  그냥...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남자가 되어가지고 먼저 너한테 이거 하자 저거 하자 말도 못 해서 미안했어. 형래랑 혜주처럼 너랑 내일로도 가고 돈 모아서 제주도도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미안해. 기차표나 비행기 표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숙소도 숙소고 가서 밥도 먹고 해야 될 텐데 그때의 나에게, 우리에게 그건 너무 큰 돈이었어. 또, 내가 연극 본 적 없다고 하니까 연극 보여줘서 고마웠어. 정신없이 웃다가 목소리 조절 못 해서 진짜 웃긴다고 좀 크게 말했는데 그 타이밍에 하필 조용해지는 바람에 배우들도 관객들도 다 우릴 쳐다봤었잖아. 창피하다고 고개를 푹 숙인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그런 너가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어. 지금도 연극이나 영화, 뮤지컬 같은 걸 볼 때면 그때 네 모습이 떠올라 혼자 웃곤 해.


  나 첫 연애였고 아는 거 하나도 없는 답답한 남자였는데, 널 만난 덕분에 평생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스무 살을 보낼 수 있었어. 돈을 아무리 줘도 가질 수 없는, 생각만 해도 미소 지어지는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들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나같이 별거 없던 남자를 최선을 다해 사랑해줘서 고마웠고 너무 미안했어.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넌 내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행운이야.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어.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 가난한 사랑 노래(1988) 中 일부



[UMC/UW - 가난한 사랑 노래]


잊혀질 만 하면 나타나 너의 자취방 안을

담배 연기와 소주의 쓰디쓴 습기로

가득 채우고는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피곤한 듯 충혈된 눈으로

나를 외면하는 거부하는 몸짓을

굵은 팔뚝으로 꼭 붙들어 놓고 사랑한다고

준비했던 수식어나 농담 같은 것들

결국 모두 잊은 채로 터프한 척 딱 한 마디


오빠가 생각해 봐도 그런 거 이제는 정말 지겨울 것 같아

여기서 일하면서 보니까 말이야

샴페인 안에 반지를 넣어 둔다거나

아니면 꽃을 만땅 채워넣구 차 트렁크를 열게 하거나


정말로 멋진 방법들이 많고 많던데

꽃을 그렇게 살래면 이달 방세는 포기야

차를 빌려 쓴대도 방을 빼줘야 되는데

같이 살고야 싶지만 먼저 고백을 멋지게 해야지


그치만 시간이 있을까 싶어

너는 하루에 열 시간 

오빤 하루에 열두시간이 일하면서 지나가구

한 달에 이틀 쉬는데 누워서 TV를 보든지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게 되지


어쨌건 마음만은 제발 받아 달라는

구질구질한 말들은 이젠 하구 싶지가 않다

친구들 만나게 되면 재밌게 잘 놀아

오늘은 니 생일이쟎아

니 생일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기를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기를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기를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기를

돌아서서 흘리는 눈물이 기억에 남게 되지 않기를




니가 직장을 얻게 된 게 오빤 너무나 기뻐

원래 그 회산 이쁜 경리를 좋아한다는데

사실 성형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지만

니가 채용된 건 정말 당연한 거라고 본다


부장님이 자꾸 눈길 줘도 신경 쓰지 마

원래 너처럼 이쁜 애들은 팔자가 다 그래

오죽하면 부대 앞에 식당에서 오빠가 널 꼬셨겠니?

서울 따라온 거, 후회는 않지?


특별히 니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밥만 먹어도 느낄 수 있는 게 있어

니가 별로 안 좋아하는 반찬을 내가 먹어치우면

웃길 것도 없는데 미소가 스쳐 지나가


추석날 너 고향 내려갈 때 줄까 하고

선물 하나 산 적이 있었어

지갑인데 역 앞에서 오토바이가 채갔다

포장지가 비싸길래 포장 못 했던 게 문제였어

안에 편지를 잔뜩 써 놨더니

돈이 많이 들어간 줄 알고 털었나 봐

세탁소에서 빌려 입었던 정장이 어울리기는 했나 부더라

부티가 났나 봐... 그치 않았냐?


가난은 남자를 심각하게 약해지도록 만들지만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은 더욱 나약하다는 거

알고는 있지만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눈이 꽤나 많이 오는 바람에

지난 겨울엔 걷기만 해도 분위기 괜찮았었는데

넌 잠깐 운 적이 있었지

먹고 살기 위해서만 사는 게 이젠 지겹다고


오늘 너한테 술꼬장만 진탕 하고

아무것도 못 내밀고 집으로 돌아올래니까

니 생각이 또 난다

그치만 우리한테 자유가 없진 않아

우린 잡일 하는 기계는 아니야


작년 여름 피자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

배달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날 끌어안고 미친 듯이 소리치던 넌 정말 예뻤어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를 순 없어


남자라면은 누구나 자기 여자에게

사치스러운 아름다움을 주고 싶어 해

옥상에서 빨래를 너는 니 옆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알고 있어도 그래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UMC/UW 1집 'XSLP' (200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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