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묻은 길을 돌아보고 다시 길을 걸어"
어쩐지 요전 날 다른 날에 비해 괜히 더 덥고 꿉꿉하다 싶더라. 아침에 일어나서 본 세상은 온통 워터파크였다. 워터파크 개장을 축하라도 하듯 잿빛 하늘은 수시로 번쩍거리며 쿵쾅거렸고 내 핸드폰과 건너편 방에서 자고 있을 동생의 핸드폰,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신 부모님의 핸드폰에서는 호우 경보를 알리는 재난 문자 메시지가 일제히 울리고 있었다. 뭐라더라... 이런 걸 서라운드 오디오라고 하던가?
비 오는 날 외출할 때 고려해야 할 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아무래도 신발인 것 같다. 여자들이 신는 헌터처럼 긴 장화를 신는다거나, 장화까진 아니더라도 꽤 튼튼해 보이는(?) 운동화를 신는 방법이 있고 반대로 양말을 안 신은 채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는 방법이 있다. 오늘은 후자를 택했고 아스팔트, 보도블록 어느 곳 하나 물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을 보며 나는 현명한 결정을 한 나 자신을 칭찬했다. 찰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걸으니 머릿속에서는 '빗물 성분이 발끝 구석구석까지 딥 클린 모이스춰라이징!' 같은 서양 화장품 광고틱한 드립들이 떠올랐다. 다행히도 입 밖이나 카톡 메시지로 어디 다른 곳에 내뱉지는 않았다.
정말이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니 밖은 여전히 흐렸지만 비는 더 오지 않았다. 요새 날씨가 다 이런 식이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기분이 바뀌던 너처럼 변덕스럽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이상하다기보다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던 게 아니었나 싶네. 어릴 땐 다들 그러잖아.
그렇게 의식의 흐름이 네 쪽으로 흘러가 버려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무슨 궁상인지 몰라도 집 앞에 내려주는 버스를 탄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중간에 그냥 내려버렸다. 집까지 꽤 거리가 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여름치곤 꽤 선선한 온도였고 등 뒤에서 함께 걷는 바람 덕분에 그리 덥지도 않았다.
조금 특이하지만, 비 온 뒤의 거리를 이렇게 걷고 있으려니 네 생각이 난다. 비 오는 걸 정말 싫어했던 너는 비만 오면 약속을 취소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하루가 붕 떠 버리고 집에서 너랑 카톡이나 통화를 하다가 비가 그치면 이거 비 왜 그치냐고, 아 모르겠다고 오빠 보고 싶다며 찡찡대곤 해서 나는 몇 번이고 비 온 뒤의 이런 거리를 가로질러 너를 보러 가곤 했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넌 참 제멋대로였구나. 아무렴 어때. 내가 상관없다는데. 내가 좋다는데.
내가 너의 찡찡댐에 언제든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 14개를 지나쳐 내린 뒤 조금 걸으면 너의 원룸이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교차로에서 앞으로 안 가고 옆으로 가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우리가 아이스크림이나 맥주 같은 걸 종종 사 먹던 편의점이 있고, 그 옆엔 언젠가 네가 커트 못 한다고 욕하던 미용실이, 그 옆엔 네가 아직도 살고 있을 원룸텔이 있다. 손 뻗을 것도 없이 고개만 돌려도 바로 보인다. 현관 비밀번호, 집 비밀번호도 아직 알고 있다. 지 공인인증서 비밀번호도 나한테 물어볼 정도로 그런 쪽으로는 둔한 너이기에 비밀번호는 아마도 그대로일 것이다.
앞으로 향하던 걸음을 살짝 옆으로 돌려 봤다. 늘 보던 안경잡이 점원이 카운터 앞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입구의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는 네가 그렇게 환장하던 월드콘 아이스크림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횡단보도의 초록 신호등 시간 표시기는 아직도 안 고쳤는지 본래의 시간 알림 기능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금천구 떡볶이 TOP 3에 든다고 자부하는 떡볶이 포장마차도 그대로였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모든 것이 그대로다.
우리 둘만 빼고.
꼬마 손님들을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던 떡볶이 아주머니와 잠깐 눈이 마주친 것 같아서, 혹시나 날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나는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다시 앞으로 향했다.
도로가 좁은 곳은 아닌지라 옆으로는 차들이 쌩쌩 달리지만, 대체로는 조용한 편이다. 원래 시끄러운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가끔 이렇게 이어폰도 없이 혼자 조용히 걷는 걸 좋아하는데 그냥... 오늘은 그냥 4차선 도로 건너편에서도 들을 수 있는 크고 높은 목소리로 날 불러 내 평화를 깨트리던, 시끄러운 네 목소리가 너무나도 그립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우 많은 걸 줄 수 있다. 밀어, 휴식, 기쁨.
당신은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걸 주었다. 바로 그리움을.
당신 없이 나는 살 수 없었다.
당신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당신이 그리웠다.
-크리스티앙 보뱅-
내 발걸음마저 너에게로 가는 길을 알아
내 이마에 땀방울이 너에게 가는 길을 알아
배가 고파서 집에서 나오는 길
늘 그렇듯 늘어선 가로등은 타오르지
마치 싸울 듯이 엉켜있는 자동차들은
다 하나같이 서로 비킬 마음은 없지
비가 좀 온 탓인지는 몰라도
내 생각보다 덥지 않아 놀랐어
모처럼 목욕한 거리 위를 걷다 보니까
가려던 거리보다 훨씬 더 갔어
아슬아슬한 신호등을 보며
얼룩말 같은 횡단보도를 건너
저녁노을이 앉아 있는 언덕을 넘어
가다 보면 그녀의 기억들이 모여
널 바래다주느라 자주 왔던 길
널 기다리느라 시간이 남던 길
모든 게 그대로인데 어느새
우리 둘만 싹 바뀌었지 마치 남인 듯이
너의 집에 가까워졌어
너의 이름을 크게 불러봐도 너는 너무 멀어
멀어
아무 의미 없어진 나의 산책
너가 묻은 길을 돌아보고 다시 길을 걸어
걸어
지금 내 기분은 밤보다 어둡고
혼자 떠 있는 달보다도 서글퍼
이별이란게 이리 어려운 거였으면
너가 뭘 원하든 간에 더 줄걸
다시 되돌리고 파 너를 유턴처럼
허나 우리 사인 복잡해 뉴턴처럼
내겐 이 모든 상황을 동전처럼
엎어 버리는 것 보다 더 좋은 건 없어
배가 고파서 집에서 나왔던 길
그건 다 핑계였던걸 애초에 알았었지
하루종일 안 먹고 버텼던 밥보다 너가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안 떠나
하나도 변한 것 없는 너네 집 근처
내 마음은 이미 너네 집 입구에 있어
문을 두드리고 싶은걸
꾹 참아 난 그 정도론 안 짖궂어
너의 집에 가까워졌어
너의 이름을 크게 불러봐도 너는 너무 멀어
멀어
아무 의미 없어진 나의 산책
너가 묻은 길을 돌아보고 다시 길을 걸어
걸어
자연스럽게 너의 집을 지나
애초에 걷지 말아야 했었던 길을 지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치 뭔가 두고 온 듯해
노래 서너 곡쯤을 듣다가 보면 다 잊겠지 돌아오는 길에 금방
너의 집은 이리 가까운데
넌 너무 먼 듯해
너의 집에 가까워졌어
너의 이름을 크게 불러봐도 너는 너무 멀어
멀어
아무 의미 없어진 나의 산책
너가 묻은 길을 돌아보고 다시 길을 걸어
걸어
너의 집에 가까워졌어
너의 이름을 크게 불러봐도 너는 너무 멀어
멀어
아무 의미 없어진 나의 산책
너가 묻은 길을 돌아보고 다시 길을 걸어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