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뇌와 몸의 분업이 확실한 종이다. 뇌는 몸에게 지시를 내리고 몸은 그대로 수행한다. 하지만 문어의 사고방식은 인간과 정반대인 듯하다. 문어의 몸에 붙은 수천 개의 빨판들은 외부의 자극에 제 각각 달리 반응한다. 제임스 리드 감독은 실제로 왜문어의 인지력의 대부분이 바깥쪽 팔에 숨겨진 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처럼 문어는 외부와 몸으로 접촉하며 세계를 알아가는 신비한 종이다. 말 그대로 문어는 ‘몸’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문어와 교감하기 위해서 리드는 문어처럼 생각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마인드 맵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재밌게도 완성된 마인드 맵은 마치 문어를 그린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알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사물을 명명(命名)하려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다. 시인은 ‘나’와 ‘너’ 즉, 인간과 대상과의 관계에서 의미 부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강조해 말한다. 하지만 리드는 문어에게 따로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자연의 개체들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몸짓으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이처럼 리드가 자연의 방식으로 문어에게 다가가자, 문어도 서서히 경계심을 풀고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문어가 자발적으로 리드의 손에 달라붙는 장면은 특별히 의미 있게 느껴진다. 두 존재가 처음으로 교감에 성공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남아프리카의 작은 생태계가 리드의 방문을 허락하며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문어는 리드가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리드의 카메라는 종종 문어의 눈을 클로즈업하는데, 이러한 문어와의 눈 맞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을 궁금하게 만든다. 문어의 검은 눈은 블랙홀처럼 커다란 구멍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심연으로 연결된 통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득 관객은 이 생명체가 나와 전혀 다른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문어는 몇 차례 목숨의 위기를 겪는다. 문어가 상어에게 공격당하는 장면은 특별히 인상 깊다. 문어는 한쪽 다리를 잃지만 필사적으로 목숨을 지켜낸다. 자신이 문어를 불러냈다는 생각에 리드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문어는 회복을 위해 한동안 한자리에 머무른다. 그리고 며칠 후 이내 다시 작은 다리가 자라난다. 이 장면에 특별한 울림이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도 인생에서 수차례 위기가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문어가 회복을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상처 난 삶에 새 살이 돋아난다. 이러한 배움의 과정을 통해 문어는 비로소 우리에게도 ‘선생님’으로 다가온다.
문어가 천적에게 좇기듯이, 문어 역시 누군가의 천적이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은 잔인한 약육강식의 법칙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순환은 모든 개체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이것이 대자연의 섭리임을 일깨운다. 리드는 문어와의 개별적인 만남을 통해 생태계 전체와 만나게 되고, 영상을 통해 자연의 모든 개체에게 존중을 표한다. 종종 카메라는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바다 전체를 한 장면에 담는다. 작게 헤엄치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관객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렇게 넓고 깊은 시야를 얻었으니, 하물며 조금 다른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이제는 무엇이든 배울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글 임중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