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한 편, 09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중효 Aug 31. 2022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가

끝없음에관하여 (2021)


 작은 방에서 한 소년이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열역학 1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은 에너지며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보존되며 한 가지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뀔 뿐이다.’ 안데르손의 <끝없음에 관하여>는 언뜻 연관 없어 보이는 짤막한 32개의 숏으로 이어져 있다. 앞 선 장면은 그중 23번째 장면인데, 소년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너는 에너지고 나도 에너지야 그리고 너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는 영원히 존재하는 거야, 새로운  것으로 형태가 바뀔 뿐이지, 수백만 년이 지나고 그때 너는 감자가 되거나 토마토가 될지 몰라.’ 가만히 맞은편에 앉아 듣고 있던 소녀가 대답한다. ‘그럼 나는 토마토가 될래.’


 열역학 2법칙이 별안간 궁금해진다. 열역학 2법칙에 따르면,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바뀌며, 질서한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 어려운 설명을 생략하고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폐허가 된다는 뜻이다. 안데르손 감독은 영화를 통해 질량 보존의 법칙(1법칙)을 말하고 있지만, 어쩐지 엔트로피의 법칙(2법칙)에 마음이 더 끌린다. 감자와 토마토가 되어 서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보다 우리 모두에게 언젠가 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좀 더 위안이 된다고 말해야 할까. 영화는 제목처럼 ‘끝없음(endless)’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영화가 말하는 ‘끝없음’의 출처를 영화에게 되묻고 싶다.


말하기의 자리  

 종종 삶을 무효로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실수로 둔 바둑돌을 무를 수 없듯이, 이미 살아온 시간 역시 전부 되돌릴 수 없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패전 후 패닉에 빠진 히틀러의 얼굴에서(25), 포로수용소로 행군하는 패잔병의 뒷모습에서(30) 관객들은 상실을 목격한다. 인간의 몸도 일종의 장소라면 이들은 자신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와중에 다른 숏들과 결이 다른 숏이 하나 있다. 남녀가 서로를 껴안고 폐허가 된 도시 위 허공을 날아간다(14). 이 장면은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이기도 한데,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영원함을 상징한다. 이들은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분명 존재했지만 역사에는 ‘없는’ 이들이 있다. 랑시에르가 이미 말하였듯이,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주체들은 모두 죽었으며 아직도 말을 더듬는다. 영화의 장면마다 어김없이 한 여성의 내레이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는 마치 시간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차갑고 차분하다. 그녀는 눈앞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상황에 개입할 의지도, 그럴 힘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종종 그녀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대상의 감정 깊숙한 곳이 보이는 것처럼 말한다. 어쩌면 그녀는 역사 안에서 발언권을 획득하지 못한 모든 주체들, 그러니까 그들 본인의 목소리일 것이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역사의 벙어리들에게 ‘말하기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딥 포커스는 선택적 감상을 가능케 한다. 이 영화의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숏의 심도는 마치 회화 속의 진한 물감처럼 사용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프레임 안의 모든 대상을 주체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리고 이 대상의 범주에는 인물들뿐 아니라 사물들도 포함된다. 흩날리는 갈대와 돌멩이, 천체망원경과 벽시계처럼 애초에 말할 수 없는 이들은 잘게 쪼개어진 몸짓을 통해 발언권을 얻는다. 감독은 프레임을 넘어 숏들 사이에도 이음새를 만든다. 두 다리를 잃은 남자가 지하철역에서 우쿨렐레 연주를 하고 있다(10), 이어지는 장면에선 할머니가 계단 위에서 아이의 사진을 찍고 있다(11),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장면이 지속되는 동안 우쿨렐레 연주도 그대로 흐른다. 공간적으로 분리된 두 숏은 음악을 통해 같은 시간으로 포개진다.


 어쩌면 안데르손 감독은 윤회를 믿는 것 같다. 불교 교리에 따르면 모든 중생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을 반복한다. 열역학 1법칙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한 가지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뀔 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춤추는 젊은 여자들과(19) 하늘을 날아가는 철새들(1)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나무에 묶여 처형당하는 남자와(18) 창밖에 내리는 눈(29)이 모두 같은 존재가 된다면, 이 세상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없음’의 결론이 라면 이내 물음이 생긴다. 어디에나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연 ‘나(我)’일까, 어쩌면 그것은 ‘무(無)’ 그 자체가 아닐까.


덧없음에 관하여 

 믿음을 잃어버린 가톨릭 사제의 사연은 다른 장면과 달리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악몽에 시달리고(6),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요청하며(9),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포도주를 들이켠다(12). 그는 의사에게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의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혹시 신이 정말로 없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자 사제는 발끈하며 대답한다. “끔찍한 소리 마세요, 그럼 뭘 믿고 살아요?” 아직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가톨릭 사제의 모습에서 안데르손 감독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적어도 영원함에 대한 갈망만큼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서양의 이념은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를 두 다리로 삼아 지금껏 걸어왔다. 정신분석학은  현대철학의 다른 얼굴이다. 때문에 정신과 의사가 가톨릭 사제를 상담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으로 읽힌다. 서양의 정신이 또 다른 서양의 정신을 치료하는 모습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사제는 정신과 의사에게 애걸하지만 의사는 끝내 그를 문 밖으로 내쫓는다(27). 안데르손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서양의 이념은 자가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문제는 그가 영화적 시도를 통해 제시하는 해답이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끝없음’은 무아無我와 무위無爲로 대변되는 동양 철학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0세기를 거치며 서구 문화권에는 사상적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서방의 제국주의는 필요에 의해 동양을 신비화한 후, 동양을 착취하고 지배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했듯이, 동양에 대한 신비화는 단순한 환상에 그치지 않고, 이해관계 속에서 절대적 진리로 이용되어 왔다. 그는 "동양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다만 오리엔탈리스트들의  말과 담론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영화는 역사 속에서 도구로만 치부되던 타자들에게 ‘말하기의 자리’를 내어준다. 이러한 영화적 시도는 분명히 관객들에게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끝없음’의 출처가 단순히 동양의 오래된 사유에서 베껴온 것이라면, 그 기저에는 일종의 사상적 오리엔탈리즘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만 한다. 동양의 지혜는 서구 역사의 정신병을 진찰하는 도구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32).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이 먹먹한 구름이 껴있고, 지평선이 하늘과 들판 사이를 비스듬히 가른다. 갈대가 듬성 자란 들판과 그 사이 나있는 길 위에 고장 난 차가 위태롭게 서 있다. 차에서 한 남자가 내리고 그는 말없이 차를 고치기 시작한다. 이때 마침 영화가 끝나간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열역학 2법칙을 떠올려보자. 잿더미가 되어버린 도시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폐허가 될 것이다. ‘끝없음’은 결국 허무의 다른 말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로초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끝이 있음에도 묵묵히 차를 고치는 이의 태도가 아닐까. /글 임중효



이전 08화 바다가 내민 손과 악수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