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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편,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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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중효 Aug 31. 2022

말과 몸의 내전

돈룩업(2021), 모가디슈(2021)


 종종 자막 읽기가 힘에 부치는 영화가 있다. 아담 맥케이 감독의 <돈룩업>도 그런 영화다. 몇몇 장면에선 너무 빠른 대화 탓에, 자막을 읽느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영화  내내 관객은 위를 쳐다볼 수 없는(Don’t look up)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에서 뉴스를 접할 때, 이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지 않던가. 말로 뒤덮인 뉴스를 보고 있자면, 우리의 눈은 현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텍스트와 이미지의 경주는 시작된다. 관객은 텍스트와 이미지 중 하나를 ‘우선적으로’ 소화하느라 결국 나머지를 놓치게 되는데, 놓치는 것의 대부분은 이미지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이미지 역시 차고 넘치기에, 그 격차는 영화가 끝나도록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이처럼 의미의 포화상태는 영화의 몸짓을 무력화시킨다. <돈룩업>은 넘치는 말들이 진실을 어떻게 가리는지, 그 방식을 적절히 포착해낸다.


 반면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는 몸짓의 포화상태를 보여준다. <돈룩업>과 마찬가지로 <모가디슈> 역시 쉬지 않고 ‘말’한다. 심지어 한국인과 현지인이 영어와 한국어를 뒤섞어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부군이 소말리아 민간인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하는 장면처럼, 예상치 못한 몇몇 이미지는 모든 텍스트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에서 텍스트와 이미지의 경주는 간발의 차이로 이미지가 승리한다.

 

 평론가 김철홍은「씨네21」에 기고한 그의 글에서 ‘돈 룩 업에 즐비한 들어내도 되는 장면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또한, 류승완 감독은「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는 뺄셈을 얼마나 잘하는 가에 성패가 달린 작업이었다.’라고 말한다. <돈룩업>과 <모가디슈>의 공통점은 텍스트와 이미지의 지나침(excess)이다. 과잉된 의미와 몸짓은 영화의 주도권을 놓고 영화 내내 치열하게 군비경쟁을 벌인다. 영화 속에서 말과 몸이 끊임없이 내전을 벌이는 것이다.


 몸의 언어  

 빛, 춤, 숨처럼 한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에는 종종 의미와 모양이 함께 담겨 있다. 애초에  글자는 그림에서 왔으니 그다지 신선한 이야기는 아닐 테지만, 그런 글자 중에 몇몇은 특별히 멋지고 심오하다. 예를 들어, 앞에 세 글자는 모습 그대로 빛나고 춤추며 숨 쉰다. 몸도 그런  단어 중 하나인데, 몸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몸을 닮았다. 드니 뵐니브 감독의 <컨택트>에 는 외계인의 글자가 등장한다. 극 중 언어학 전문가인 루이스 박사(에이미 아담스)는 외계 비행 물체의 내부로 진입하여 외계 생명체와 마주한다. 순차적으로 쓰이는 인간의 글과 달리, 외계인의 글은 먹물처럼 번지며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들의 글자엔 말 그대로 몸짓이 담겼다.


 에이젠슈테인은 최초의 상형문자인 한자에서 영화적 몽타주(montage)의 시원을 찾는다. 그는 두 상형문자의 조합이 새로운 글자를 창조해내는 것에 주목하며, 마치 영화가 그러하듯이  한자 안에는 이미지적 사유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한 몽타주는 일종의 몸의 언어인 것이다. 몽타주 기법의 대표작인 그의 작품은 영화 안에서 대립적인 샷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폭발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샷 내의 대립은 잠재적인 몽타주다. 이  대립의 강도가 커지면서 샷이라는 네모난 감옥을 분쇄하고 이 갈등을 폭발시켜 이를 몽타주 조각들 사이에서 몽타주의 추진력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헌데, 어떤 영화들은 이미지와 이미지뿐 아니라 이미지와 텍스트 역시 끊임없이 충돌한다. 에이젠슈테인에게 예술은 충돌과 동의어였다. 그는 사물과 시점의 충돌을 넘어 내용과 형식의 충돌, 영화와 관객의 충돌로 자신의 몽타주 개념을 확장시킨다. <돈 룩 업> 안에서도 의미와  몸짓은 끊임없이 부딪친다. 이는 다소 의도적으로 보이는데, 마치 의미가 몸짓을 완전히 덮어버리려는 시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초호화 캐스팅과 넘치는 대사, 과도한 특수효과까지, 영화 외적으로도 어느 하나 지나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지나침은 결국 관객들의 시야마저 흐릿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적 과잉을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산만한 영화는 언어가 어떤 식으로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지 그 방식을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영화가 구현하는 기만의 언어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다. 케이트(제니퍼 로렌스)가 브리(케이트 블란쳇)와 잭(타 일러 페리)이 진행하는 프로그램 ‘더 데일리 립’에 출연했을 때, 카메라는 그녀의 긴장한 얼굴을 클로즈 업하며 동시에 공간의 사운드를 뭉갠다. 그녀는 긴장을 누르고 진실을 말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러하다. ‘하지만 여기선 나쁜 소식도 가볍게 다루는 편이라.’


 이따금 영화는 디비아스키 혜성의 시점을 보여준다. 정치권의 스캔들로 소란스러운 지구와  달리, 디비아스키의 시점은 고요함 그 자체이다.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그녀는 텅 빈 공간을  말없이 순례 중이다. 모든 갈등의 핵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혜성의 존재 여부였다. 직접 내 눈에 그 존재가 보이기 전까지 사람들은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다. 혜성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사람들은 그제야 일제히 하늘을 쳐다본다. 이어지는 종말의 시퀀스는 동시간대의 전 세계를 두서없이 몽타주 하며 충돌의 충격을 연달아 제곱한다.


 언어로 지어진 상징계(symbolic)의 대기층은 시간이 지날수록 두텁게 쌓인다. 디비아스키 혜성은 두터운 층을 뚫고 현실에 진입한 실재(real)의 출연이다. 언어로 세상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다는 믿음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가깝다. 때문에,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눈앞에 닥치면 우리는 끊임없이 이에 걸맞은 언어를 만들어낸다. 마치 코로나 계열의 바이러스 이름이 무한히 분화하는 것처럼, 그 대상이 도저히 언어로 감당하기 힘든 것임이 밝혀졌을  때, 결국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고 만다. 진실은 대개 이런 식으로 은폐된다.


 언어의 몸

 언어에도 신체가 있을까. <모가디슈>에서 소말리아 민간인 시위대가 한국대사관을 향해 쳐들어올 때,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은 다급히 스피커와 녹음 테이프를 연결한다. 곧이어 한신성 대사(김윤석)의 목소리가 시위대의 머리 위로 울려 퍼진다. ‘우리 대한민국은 여러분들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시위대가 멈칫하는 순간, 정부군이 들이닥쳐 잔인하게 이들을 진압한다.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처럼 카메라는 소리의 진원지인 스피커 앞에 멈춘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정부군은 일렬로 전열을 갖추어 민간인 시위대에게 총을 겨눈다. 마치 한 줄씩 글을 채워나가는 타자기의 소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총성이 울린다. 그제야 관객들은 영화의 초반부터 ‘타닥타닥’ 들리던 타자기 소리가 총성과 닮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 사이  대사관 식구들은 타자기로 작성된 모든 문서를 불태운다. 언어도 신체를 가질 수 있다면, 아마 <모가디슈>의 스피커와 타자기는 각각 ‘말과 글’의 몸일 것이다.


 라캉 역시 언어의 몸에 대해 말하였다. 그는 몸과 정신 사이에는 일종의 교집합이 있다고 여겼는데, 그는 이것을 언어의 몸 혹은 ‘기의 없는 기표’라고 불렀다. 그의 이원론이 남다른 이유는 단순히 물질과 관념을 분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어떤 ‘틈(void)’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해묵은 구조주의 이론을 끄집어내 요즘 영화를 풀어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가 말과 몸의 갈등을 논하고 있는 만큼, 그가 말하는 ‘틈’에서 작은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천 개의 고원』에서 ‘기관 없는 몸’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라캉이 상징계라고 부르는 기존의 지배적 질서를 넘어서는 몸이다. 기관 없는 몸은 영화 안에서 대사와 몽타주를 가로지르며,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계에 틈입한다. 언어의 몸이 의미와 몸짓 사이의 공백이라면, 기관 없는 몸은 그 틈에 출몰하는 충동 그 자체인 것이다. 관객은 언어와 몸짓의  미세한 불일치, 그로 인해 발생하는 균열을 통해 때로는 진실을 목격한다. ‘그것[균열]은 사유의 장애물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유의 머무름이자 잠재력, 장소이자 대리인인 것이다.’


 언어의 몸이 일종의 틈이라면, ‘스피커와 말 사이’, ‘타자기와 글 사이’에 거주하는 충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위대가 들이닥쳤을 때,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말은 전부 진실을 덮는 말이었다. 하지만 ‘친구’나 ‘가족’ 따위의 말과 함께 병치되는 학살의 이미지는 모든 말을 뚫고 진실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각국 대사관이 주고받는 서신은 평화 유지를 위한 문서인 듯 보이지만, 이는 사실 소말리아를 둘러싼 각국 정부의 이권 다툼을 대변한다. 이때마다 울리는 경쾌한 타자기 소리는 이내 총성으로 대체되고, 그제야 관객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를 보자.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 남북한의 대사관 식구들은 이동할 차의 표면을 책으로 덮는다. 책은 곧 이념(ideology)이다. 남한의 책은 자유주의를, 북한의 책은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념이 뒤섞여 오로지 서로의 안전을 위한 보호막이 될 때, 책은 그 자체로 이들의 몸이 된다.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하는 길에, 이 책들은 총알받이가 되고 결국은 누더기가 된다. 과잉된 언어는 진실을 감추지만, 몇몇 몸짓은 언어를 뚫고 진실을 드러낸다. 관객은 도저히 이것을 외면할 수 없다.


대선의 텍스트, 전쟁의 이미지

 <돈 룩 업>과 <모가디슈>를 가로지르며, 영화 내부에서 어떤 방식으로 몸짓과 의미가 서로를 경계하며 드러내는지 살펴보았다. 이른바 몸의 언어인 기존의 몽타주 개념을 통해 말과 몸이 실은 다른 것이 아님을 확인하였고, 이 과정에서 기만적인 언어가 진실을 어떻게 가리는지 그 방식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언어의 과잉은 빈번히 영화 안에서 진실을 감추지만, 이른바 언어의 몸을 통해 예고 없이 출몰하는 실재의 출현은 모든 말과 몸을 뚫고 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영화를 넘어 현실(context)의 모습과도 일면 맞닿는다.


 영국의 드라마 시리즈 <이어즈 & 이어즈>는 BBC가 폐업하며 시작된다. 극 중 영국인들은 가짜 뉴스와 마타도어가 난무하는 BBC 뉴스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공영방송으로서의 신뢰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돈 룩 업>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의 초반부, 미국의 언론 매체는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디비아스키 혜성’의 존재를 철저히 외면한다. 하지만 대선 기간이 다가오자, 이들은 태세를 전환하여 이 소식을 긴급 타전한다. 두말할 것 없이, 권력의 필요에 따라 진실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조작의 몽타주’에 주목해보자. 영화 속에서 올린 대통령(메릴 스트립)의 스캔들이 퍼져나가는 방식은 현실과 매우 유사하다. 우선 의혹을 제기하는 공영방송의 뉴스가 잇따라 등장한다. 영화는 뉴스의 장면과 뉴스를 보는 시청자의 시선을 교차로 보여준다. 뒤이어 관련된 SNS 텍스트가 스크린 위로 겹겹이 쌓인다. 이는 현실의 시청자들이 스스로 확증 편향을 강화하는 과정을 빼닮았다. 선거철만 되면 주기적으로 쏟아지는 가십을 접하며 우리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유튜브(youtube)를 켜면, 타국 간의 전쟁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줌(zoom)을 통해 피 침략국의 대통령이 구호 요청을 하고, 참전 군인이 자신의 인스타그램(instagram)에 전쟁터의 실황을 올린다. 믿기 어렵지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91년도 모가디슈의 상황은 지금과는 달랐던 것 같다. 반군의 전쟁 선포를 듣고 한신성 대사가 말한다. ‘이게  진짠지 아닌지 확인이 안 되는 거잖아, 뉴스 좀 틀어보자.’ 며칠 후, 반군은 모가디슈에 입성하고 전쟁은 이들의 일상을 덮친다. 전기공급이 끊기고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확인할 필 요 없이, 이들은 직접 눈으로 전쟁을 목격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는 일종의 전쟁 목격담이다. 산만하게 흔들리는 1인칭 시점과 수천 명을 한 번에 담아내는 전지적 시점은 수시로 교차하며,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허무는 아우라(aura)적 체험을 만든다. 영화 내내 관객들은 스크린 너머에서 숨죽이고 매복한다. <덩케르크>가 당사자의 눈이라면, <모가디슈>는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의 목격담이다. 솨마(앤드류 나간가 키마니)의 죽음을 기억해보자. 그가 정부군이 휘두른 둔기에 머리를 맞고 즉사했을 때, 카메라는 그의 눈을 클로즈 업으로 비춘 뒤, 다시 그의 몸을 하늘에서 내려 본다. 솨마의 눈은 미동 없이 감기지 않는다. 그의 눈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돈 룩 업>과 <모가디슈>, 두 영화 속 대선과 전쟁의 상황은 현실의 풍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대선의 텍스트는 공해처럼 겹겹이 쌓여 눈을 가리고, 전쟁의 이미지는 때때로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낸다. 국경을 넘어 현실의 뉴스들이 쏟아내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폭격 아래 수용자는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다. 대립하는 현실의 몽타주 사이에 끼인 채로, 우리는 당사자이며 동시에 목격자가 된다. 이제까지 영화와 현실을 넘나들며 의미와 몸짓의 갈등을 논하였다. 더 나아가 마지막 장에서는 두 영화가 현실을 넘어 초월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말과 몸의 극적인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리좀(rhyzome)의 십자가(cross) 

 ‘저기, 우리 대사님 돌아오시는 동안 같이 예배드릴까요?’ 한신성 대사의 배우자인 김명희(김소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그녀는 그들의 치안이 불안해지자 대사관 식구들을 탁자 위로 소집하며 예배를 제안한다. 그러자 공수철 서기관(정만식)의 배우자인 조수진(김재화)은 곧장 긍정의 대답을 한다. 말단 사무원 박지은(박경혜)은 자신은 불교라며 조수진과 잠시 동안 실랑이를 벌이지만, 이내 언제 불이 꺼질지 모르는 탁자 앞에 모두 모이게 된다. 그제야 명희의 주도로 기도가 시작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소말리아 사람들은 대부분 소말리족이며, 주로 이슬람교를 믿는다. <모가디슈>에서 소말리족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알라신이 거주하는 이슬람 사원을 향해 절을 하는데, 일렬로 늘어선 이들의 의식은 시종일관 예측 불가능했던 카오스의 공간에 찰나의 질서를 부여한다. 마치 탈출기에서 홍해가 갈라지듯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남북 대사관 식구들은 이를 틈타 위험지역을 벗어난다. 소말리족이 믿는 알라(Allah)와 명희가 믿는 야훼(Yahweh), 두 유일신은 뜻밖의 길 위에서 조우하게 된다.


 나무는 수직으로 자라지만, 리좀은 이리저리 얽히며 뻗어나간다. 리좀이란 땅속으로 담쟁이넝쿨처럼 줄기가 자라나는 땅속줄기 식물을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식물학에서 이를 빌려 와 자신들의 개념으로 만든다. 이들이 말하는 리좀의 개념은 차이를 지닌 다양한 교차점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한 사람이 이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다양한 길을 가로질러 건너는 교차로에 가깝다. 따라서 리좀은 어떤 다른 점과도 접속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접속으로 인해 언제나 새로운 맥락이 만들어진다. 다양성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이 모색되는 것이다.


 명희와 소말리족의 교차점(cross)에 주목해보자. 명희는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가는 길 내내  속으로 주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을지 모른다. 같은 시간 소말리족은 무슨 기도를 하고 있었을까. 적어도 이 순간만큼 명희는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점에 감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애타게 기도를 올리는 야훼와 알라는 사실 아브라함 계열 경전에 등장하는 같은 신이다. 같지만 다른 이 모순적인 차이로 인해 새로운 길이 생성된 것이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남북한 대사관 식구들이 결국 서로를 수용하듯,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교차점을 발견하는 순간 명희의 십자가도 ‘리좀의 십자가(cross)’로 거듭난다.


 <돈 룩 업>에도 극적으로 대비되는 두 장면이 있다. 올린 대통령은 대선의 판세가 불리해지자, 디비아스키 혜성과 관련된 긴급 성명을 발표한다. 전 세계의 우글거리는 자아는 대형 전광판과 스마트 폰을 통해 올린의 성명을 지켜본다. 미국 대통령의 입에 모든 이목이 집중되고, 그녀가 내뱉는 말 한마디에 인류는 울고 웃으며, 안도하고 탄식한다. 올린 대통령의 말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퍼져나간다. 미국의 국가가 흘러나오고, 그녀는 이와 같이 말하며 성명을 마친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하나하나를 돌보시길, 특히 우리 당원들을 돌보시길…….’  


 올린의 긴급 성명에는 어떠한 교차점도 없다. 권력이 집중된 한 개인의 결정에 수많은 개체가 유명을 달리한다. 한편, 지구의 종말을 앞두고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가족들과 케이트, 율(티모시 샬라메), 테디(롭 모건)는 식탁에 둘러앉아 최후의 만찬을 나눈다. 이들은 서로 음식을 나누며 그간 전하지 못했던 진솔한 말을 주고받는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며 식탁과 유리잔이 흔들리고, 누군가 기도를 제안한다. 율은 유일하게 기도를 할 줄 아는 인물이다. 율의 기도가 시작되고, 기도하기 위해 서로 맞잡은 손은 다양한 교차점을 생성한다.  


 ‘또한 주여, 이 어두운 시기를 사랑으로 위로하시고 무엇이 닥쳐오든…….’ 율의 기도와 함께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디비아스키 혜성이 클로즈 업 된다. 기도의 내용은 중요치 않다. 종말의 순간 맞잡은 손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게 하며, 감은 눈은 각자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이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름을 유지하며 연결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준다. 말과 몸이 더 이상 다투지 않는 언행일치의 순간, 의미와 몸짓은 극적으로 화해한다. 순식간에 집은 무너져 내리고 모두가 서로의 임종을 지킨다. 당장 종말이 오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만인에 대한 ‘눈속임’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건너감(cross) 아닐까.


● 디카프리오의 사기꾼 캐릭터는 언제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그는 희대의 위조범 프랭크를 연기했고, 마틴 스콜세지의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그는 억대 주가조작범 벨포트를 연기했다. 어리숙한 과학자 랜들 민디의 얼굴에서 프랭크와 벨포트의 모습이 종종 비친다. 정치인이 과학자와 공모하여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다시 서로를 협잡꾼으로 몰아세우는 장면을 보며 느껴지는 이 기시감은 무엇일까. 현실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영화는 재연이라기보다 예견에 가깝다.


 우리는 <전함 포테킨>의 몽타주 기법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화사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 영화는 1905년 러시아에서 벌어진 흑해 함대 수병들의 반란을 배경으로 한다. 단연 영화의 백미로 회자되는 장면은 ‘오데사 계단 씬’이다. 러시아 군대의 발포에 시민들이 피 흘리며 쓰러지고 유모차가 계단을 따라 위태롭게 굴러 내린다. 이들 장면이  무수히 교차하는 이 극적인 몽타주 시퀀스는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오데사는 현재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백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의 중심 도시이다. 오데사 계단 씬은 현시점에서 러시아 군의 실제 ‘오데사 공습’으로 재현(再現)되고 있다. 전쟁의 이미지는 또 다른 전쟁의 잔상을 소환하는 힘이 있다. 한국 전쟁과  소말리아 내전 그리고 오데사 공습은 불현듯 시공을 초월하여 같은 이미지의 층으로 겹친다. 이 겹쳐진 이미지를 보고 영화는 언젠가 다가올 현실의 데자뷰라고 말한다면 그저 과장일까.


 연일 영화판에 희소식이 들려온다. 영화의 국경이 희미해지는 광경을 바로 지켜보며, 정확히 10년 전, 한국 영화계의 모습을 면밀히 조망했던 <영화판>의 푸념들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영화 산업은 부침을 겪으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영화 비평의 수요는 예전만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한 치 앞의 현실도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에 비평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사치일까. 그럼에도 여전히 비평가의 임무는 ‘진실’을 가려내는 숨은 그림 찾기라고, 나는 믿는다. /글 임중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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