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제연폭포에서 나와 시간을 보니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제주도의 날씨는 여전히 흐렸으며 '어서 와 제주도 바닷바람은 처음이지?' 나에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사실 생각해보니 내가 그동안 제주에 있으면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곳을 가자니 저녁 식사 시간까지 생각하면 너무 오래 걸리고 또 숙소로 들어가자니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터라 너무 일찍 들어가는 거 같았다. 렌터카 운전석에 앉아 어디로 떠나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면서 초록색 검색창에 검색을 해보니 가장 먼저 '주상절리'가 검색어 상단에 위치해 있었으며 혼자서 뒤늦은 수학여행을 떠나왔기에 혼자 가만히 앉아 파도를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장 주상절리로 향했다.
격한 환영인사
주상절리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입구를 지나 걸어 들어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바람이 심하게 불지는 않았다. 날씨만 흐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점점 주상절리 전망대를 향해 걸어갈수록 격한 환영인사의 강도는 더해져 갔다. 모자가 날아갈듯한 바람과 함께 아무리 3월 말의 제주라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찬바람이 남아있었기에 바람막이를 챙겨 오지 않았더라면 코로나 시국에 감기에 걸려 숙소로 돌아갈 뻔했다. 하지만 바람은 점점 더 강하게 불기 시작하였으며 스스로 고민에 빠졌다. '여기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 정도 바람을 버틸 수 있을까?' 일단 삼다수의 고장에 왔으니 제대로 삼다수의 바람을 맞아보기로 하였다.
맑은 날만 있으면 재미없지 않겠는가?
제주도로 떠나기 전 지금까지 여행 혹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촬영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을 쭉 한번 되돌아봤었다. 거기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았다. 눈 오는 날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쾌청하고 맑은 하늘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맑은 날만 찾아서 다니고 있었구나. 맑은 하늘 날만 골라서 찍는 버릇... 즉, 스스로 틀에 갇혀버리고 있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 도착한 첫째 날의 날씨는 구름이 많고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다. 대부분 쾌청하고 날씨가 좋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생각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항상 하늘이 맑고 쾌청한 날씨만 골라서 사진을 촬영했던 나는 결국 내 사진이 아니라 남들의 눈치를 보는 사진.. 화려한 색감과 쾌청한 하늘.. 정작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진이 아니라 sns상에서 관심을 끌고 기억을 왜곡하는 사진만 찍는 게 아니었을까?
흐리고 강한 바람의 매력을 느끼며 자연의 신비를 발견하다.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주상절리 전망대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 거센 바람을 맞으면서 하염없이 멍 때리고 있었다. 제발 자신 좀 더 관심 있게 봐달라고 표현하는듯한 강한 파도와 주상절리에 부딪치면서 높게 솟아오르는 파도의 재롱잔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깨달아가기 시작하였다.
과연 하늘이 맑고 쾌청한 날씨였으면 이런 광경을 내가 볼 수 있었을까?
남들은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면 여행하기 안 좋은 날씨라 많이들 말을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날씨에만 느낄 수 있는 풍경과 자연의 소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 뒤에 숨어있는 매력이었다. 사진에 날씨가 조금 흐리게 나오면 어떠하고 바람이 많이 불면 어떠할까? 물론 여행을 다닐 때 약간의 불편함은 따라오겠지만 그때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매력이 있지 않겠는가?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그 매력을 주상절리 전망대에서 발견하였고 스스로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넓게 만드는 행운까지 얻어버렸다. 조용히 주상절리 전망대 의자에 앉아 재롱잔치를 하고 있는 파도를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신비를 발견하였다.
제주 바다가 나에게 그려준 선물
대한민국
기다림 그리고 파도가 만들어준 선물
주상절리의 매력은 육각형의 단면을 가지는 돌기둥들이 만들어내는 절경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대부분 이런 독특한 형상이 관광지로 이어진다. 나 또한 가만히 앉아 바람과 파도에 부딪치고 있는 주상절리를 바라보고 있던 와중에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모습이 보였다. 계속 파도가 치면서 주상절리와 부딪칠 때마다 대한민국 한반도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재미있는 모습을 보기 시작한 나는 더욱 관심을 가져 가만히 관찰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관찰은 더욱 흥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으며 다시 카메라를 들어 주상절리와 제주바다 그리고 파도가 그려주는 작은 한반도의 모습을 담기 위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그저 풍경만 구경하고 사진만 촬영하고 떠나버렸으면 이런 모습을 담을 수 있었을까?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안좋아 '오늘은 글렀네'라는 생각과 함께 의자를 지나쳐버려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버렸다면 파도와 주상절리가 만들어내는 대한민국 한반도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언가 하나를 관찰하거나 혹은 화분을 키운다고 가정해보자. 작은 씨앗에서 출발하는 화분이 하루아침에 화려한 화분으로 변신할 수 없지 않겠는가? 해리포터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꾸준히 애정을 가지고 물을 주면서 세심하게 관찰을 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기다림의 시간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화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주상절리 전망대에 하루 종일 앉아있었던 건 아니다. 길어야 1시간이 넘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평소에 알려지지 않았고 남들이 잘 모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글쎄? 그 기다림의 시간은 제주 앞바다의 파도와 날씨 그리고 주상절리가 그려주는 작은 한반도의 모습을 선물 받았는데 무슨 보상이 더 필요할까? 1+1 격으로 나의 사고방식과 생각의 전환까지 얻었지만 또 다른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개미굴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꼬리잡기 같은 의문점 투성
주상절리에서 얻은 메시지는 '무언가를 획득하고 얻고 남들이 모르는 숨은 매력을 찾으려면 기다림이 필요'였다. 그렇지 맞아! 나도 무의식적으로 동의를 하였지만 이내 또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왔던 대사이다.
"인생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남들이 모르는 모습 혹은 우리가 그저 겉모습만 보고 지나와 정작 뒤에 숨어있던 진정한 매력을 찾고 발견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과 기다림 그리고 관찰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누구나 다 가능하면 그렇게 하겠지만, 우리는 모두 각박한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중이고 현실적인 문제와 많은 충돌을 일으킨다. 숨은 진주를 찾을 때까지의 기다림.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 즉, 내력은 무엇일까? 금전? 시간? 여유? 학업? 스펙? 결국에는 탄탄한 기반을 갖춘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선물일까? 그렇다면 그 탄탄한 기반은 어디서 출발하는 거지? 이러한 고민에 고민을 하던 와중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숙소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큰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됐고, 배고프고 춥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