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옛날에, 어느 곳에 한 천재 작가가 있었어. 하지만 그 천재 작가가 어느 날 큰 슬픔에 빠져버린 거야. 처음에 사람들은 그가 왜 슬퍼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그가 쓴 글은 언제나 호평을 받고, 인기를 끌었지. 그로 인해 재산도 넉넉한데 말야.
명예와 부,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는 그가 이번에 새로운 작품을 내놓고는 지병처럼 앓던 우울증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고 소문이 널리 퍼져버렸어. 그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원인을 파악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우선은 그 새로운 작품부터 읽어보기로 했지.
어린 꼬마 둘. 여자 아이와 남자아이. 소꿉친구이자 작은 연인. 하지만 그것은 주인공인 남자아이의 착각. 어느 날 여자 아이는 말하지, 천진난만하게.
'난 운명을 믿어. 그래서 운명으로 누군가가 다가올 때까진,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뒷모습처럼 남기고, 여자 아이는 먼 곳으로 이사를 하게 돼. 남자아이에게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 남긴 채.
남자아이는 열심히 일하지, 큰 부자가 되어 그녀가 '운명'이라고 느낄 수 있을만한 것을 언젠가 선물하기 위해. 그 아이가 중년이 되어 콧수염이 짙게 나고, 큰 저택과 넓은 농장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을 즈음 엽서 한통이 날아오지.
'당신을 초대합니다. 기억 속의 작은 연인이여.'
그는 그녀임을 확신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그것들은 값으로는 환산하기조차 어려운, 그의 평생을 쏟아부은 산물이었어. 그러나, 그녀를 만나기 전날 밤. 그의 집엔 불이 나고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집, 농장, 하인들과 그녀에게 줄 그의 선물들 마저도. 하지만 그다음 날, 그는 초대받은 대로 그녀의 집으로 향해.
잿더미 속에서 꺾어 올린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그녀는 엄청나게 큰 저택에 살고 있었지. 그 집 앞에 선 주인공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이미 결혼한 몸이라는 걸 느껴. 하지만 그는 뒤돌아서지 않아. 자신이 그녀의 '운명'이라면 그녀는 분명히...
그 집 안에 들어가려면 경비들이 지키는 큰 철문을 지나쳐야 했어. 그러나 불에 그슬린 넝마조각을 걸친 그는 어디를 봐도 비렁뱅이의 모습이었는데 경비들이 순순히 보내줄 리 없었지. 그는 기필코 그녀를 만나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지, 경비들은 코웃음을 쳤어.
그러는 도중에, 중후한 검은 차 한 대가 멀리 뒤쪽에서 나타났어. 그 차를 보자마자 경비들은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고. 그러나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서 그 차를 가로막았지.
드디어 내가 왔소.
그의 앞에 멈춰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던 차는 잠깐의 경직 뒤에 시동을 끄고 앞 좌석에서 운전기사가 내리더니 반대편 뒷 좌석의 문을 열었어.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사람은 마치, 이제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나 세상 밖으로 나오는 여신 같았지. 살짝 패인 눈가의 주름도, 깡마르고 가는 손가락마저도.
그녀였어.
둘은 한참을 마주 보고 서 있었지.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끼어들 엄두조차 나지 않았어. 그리고 그 깊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녀.
"반가워요."
인사를 받은 그는, 숨을 크게 한번 고르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뜬 다음 그녀에게 내밀었어. 여태껏 꼭 쥐고 있던 그을린 장미, 마지막 남은 자신의 재산을.
"받아주시오. 당신을 위해 평생 동안 찾은 선물이라오."
그의 표정엔 한치의 떨림도 없었어. 당연한 듯, 아주 당연한 듯 그녀가 그것을 받기만 기다리고 있었지. 하지만 그녀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하지.
"여전히 재미있으시네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모습은 불미스러운 사건로 인해 안되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거나 하진 않아요. 들어가서 서로 묵은 이야기들을 나누도록 하죠."
그 미소는 따뜻했어, 너무나, 너무나도. 마치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듯이.
그래서,
"왜... 왜..."
그는 울부짖었지.
"왜 당신은 내게 그런 말을 했소? 당신은 분명히 나를 바라보며 운명을 기다린다고 했는데! 난 그 말을 듣고 평생을 그 '운명'을 만드는 데 소비했소! 당신이 신이 아닌 인간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 누구도 해주지 못할 값진 선물을 해서 당신이 '운명'이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겠다고 마음먹었었지!!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돈을 벌었고!"
그녀는 적잖게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무어라 해 줄 말이 없었어. 그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지.
"그런데 그것이 전부 하루아침 사이에 날아가버렸소. 그때, 그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난 깨달았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운명'은 선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을 이 타버린 장미가 내게 알려주었소. 이제는 꽃이 아닌 이 장미는 내 인생을 아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아오. 이 장미는 당신에게 '운명'이 되기 위해 평생을 바친 내 자신이오!!"
이제 그것은 꽃잎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가, 꽃이었다는 것마저 의구심이 들 정도였어.
"당신이, 이 꼴이 된 나를 처음부터 내치지 않을 작정이었다면, 적어도 당신은 이것이라도 받아줬어야 해!!! 불쌍한 내 인생을 위해... 흐흐흐흐... 그런데, 그런데... 왜!!!!!"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는 말했어.
"당신은 그렇게 따뜻하게 웃기만 하는 거요..."
저것이 이야기의 끝.
사람들은 뭔가 씁쓸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었지 그중 좀 소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역시 대단한 작가라며 책을 덮고 웃어버려 자신의 무식에 대해서도 토론해 주기를 바랐어. 소설에 대해 식견이 넓은 사람들도 그 천재 작가의 위엄 때문에 자신의 해석을 쉽사리 밝힐 수 없었지. 자칫하면 여러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수도 있을 테니.
그러다 문득, 한 소녀가 말했어.
"지금 위험해요, 이 분은."
사람들은 되물었지, 주인공이?
"아뇨, 이 글을 쓴 분 말이에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지. 당연히 그러니까 우리가 모여서 신작을 같이 읽어보며 이러고 있는 거 아니냐.
"다수의 해석은 결국 그분이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거예요. 저에게 해법이 있어요. 그분께 몇 마디만 전하면 돼요."
다른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소녀를 쳐다봤지, 그러나 그 소녀는 확신에 차 있었어. 씩 웃으며 말했지.
"맡겨주세요."
그리고 그 소녀를 앞장 세운 사람들은 굳게 잠긴 그 천재 작가의 집 앞에 섰어. 소녀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 앞으로 걸어가, 문에 노크를 세 번 한 후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어.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않으실 거란 걸 알아요. 하지만 제 말을 듣고 계실 것도 알고요. 제가 전해드리고 싶은 말은 다름이 아니오라..."
사람들은 다 같이 마른침을 삼켰어. 그리고 소녀는 크게 소리 질렀지.
"수준 많이 낮아지셨군요!! 왜 이런 글을 쓰셨죠? 전형적인 구성에 이해할 수 없는 여주인공의 심리상태라니!!! 거지가 되어 돌아온 첫사랑에겐 뺨을 때렸어야죠! 천재? 아니? 당신은 천재가 아니에요,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자각한다면 이런 유치한 러브스토리... 아니, 신세타령 같은 글이 아니라 분명히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받을 수 있는 글을 얼마든지 쓸 수 있을 테니까 다시 쓰세요!! 냉큼!"
벌컥.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굳게 잠겨있던 문이 열리며 그 집의 주인이 뛰쳐나왔어. 앳되보이는 청년이 까슬까슬한 수염도 채 면도하지 않은 초췌한 얼굴로 환한 표정을 띠곤 소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지.
"저와 결혼해 주시겠소?"
"뭐, 그래요. 전도 유망한 글쟁이씨."
정작 상태가 심각한 환자는 가지 않던 병원이 그날따라 붐볐다고 해. 왜냐고? 이상하게 턱이 빠진 사람들이 줄을 섰다나 뭐라나...
여담이지만, 그 소녀는 사실 그 천재 작가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하더군. 그 작가는 후에 태어난 어여쁜 자식들을 위해서 동화를 많이 지었는데 그건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게 되었데.
해피한 이야기지?
... 너라는 글은 2004년에 쓰여지고 2025년에 브런치에 올라오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