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환상향

버스, 지영의 이야기

2007 / 소설 '버스'의 뒷이야기

by 김경




그리 큰 일도 아니었다. 그저 한순간의 온기가 나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 한낱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내 손을 잡았던 거다. 잠깐의 동행. 아니, 자신을 애써 감싸지 않는다면 잠깐의 불장난이라고 말해야 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몰랐던가? 그 순진한 소년이 내게 상처 입을 줄 몰랐던가? 아님, 누군가도 나처럼 상처를 입고 살아가길 바랐던 건가?


이기적인 나.

결국... 그 눈에 묻어버리고 싶었던 거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던 나의 마음을.


난 타고 있는 버스의 창틀에 팔을 괴고 밖을 바라봤다. 버스의 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박하고 행복해 보인다. 집으로 돌아가면 자식과 부모가 기다리고 있고, 식사 시간엔 가족들끼리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가끔 바쁘게 치이는 삶 속에서도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그들은 저기 금빛 노을 속에 그대로 어울려 녹아들 것만 같다.

바라보긴 좋아하지만 창을 잘 열진 않는다.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키고 싶은 생각이 어딘가 숨어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면, 행복하지 않아도 좋아.' 사촌 언니는 언젠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땐 슬프게만 들렸던 말이, 지금 내 가슴에서 왜 사라지지 않는 걸까. 그녀의 예쁜 미소가 보고 싶어.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걷는 거 좋아하세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런 솔직한 물음이라니. 누가 봐도 이쪽으로 필사적으로 뛰어왔잖아. 그 표정을 너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 온몸으로 두근거리고 있는 그 표정. 도대체 어떡하면 그럴 수 있지?

미안, 귀여워 보였던 거야. 내가 웃을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잠깐, 잠깐이나마 나를 잊고 싶었어. 내 꾐에 내가 지고 말았어.


'지영아, 너 그 자식... 무슨 생각으로 만나는 거냐?'


내 옆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 사람이 물었던 적이 있었다. 난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담배 타들어가는 소리가 내 목소리를 숨겨주길 바라면서.


'왜, 궁금해?'


'그래, 괜한 애 하나 가지고 놀 생각이라면 관둬. 우리 관계에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더는 듣기 싫었다.


'나, 별생각 없어. 아무 생각도...'


모순, 거짓말, 비밀, 더러움... 침대에 엎드려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어느새 그런 단편적인 생각들은 그의 집에 있을 때마다 날 엄습했고, 그건 내 안에서 이미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것들은 조금씩 조금씩 물들여갔다. 진짜 나 자신을.

그 아이의 수줍은 온기마저 난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을 수 있었다. 처음 그 손을 잡으며 이미 이별을 바라봤고, 미소를 지으면서도 슬플 수 있었다. 그건 어쩌면 내가 그 아이를 먼저 원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 용돈을 내가 벌어서 쓰던 나잇대부터, 패스트푸드 따윈 거의 사 먹은 적도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찬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날도 많았는데, 그런 비싸기만 한 햄버거를 한 끼 사 먹는다는 건 돈이 아까웠다. 근데 그러던 내가 어쩌다 그런 곳에 들렀을까, 그리고 왜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멀뚱히 큰 눈을 이쪽으로 돌리며 기계의 열기에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아이를.


'석남동까지 가나요?'


'네, 가요.'


나도 참 바보 같았지.


썩 오랜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걸었던 건. 천천히, 늦은 오후의 햇살과 바람을 얼굴에 그대로 맞으면서 누군가와 발을 맞춘다. 그 아이는 걸음이 느렸고, 천천히 걷는 버릇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나도 그때만큼은 느리게 걸을 수 있었다. 언젠가 거리에서 누군가 그렇게 걷는 걸 본 이후로 계속 동경했던 일이었다. 혼자서는 아무리 천천히 걸어봐야지, 해도 빨라지기만 했던 걸음인데.


'혹시 다음번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은 기쁨에 겨워 소리치고 있었다. 언제라도, 몇 번이라도요. 하지만 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애매한 말로 흘리기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건 결국 마지막까지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을 결정짓는 족쇄 같은 것으로 남고 말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준 것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슴에 안겨 따뜻한 온기를 느꼈던 적이 있었다. 분명 그는 그때 내 가슴속의 말을 들었겠지, 처음부터 전해야만 했던... 냉혹한 거절.


'우리가 서로 안고 있다고 해도, 그 이상을 약속할 순 없어요. 함께 하는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또 흐르더라도, 당신에게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을 테니까...'


버스는 어느새 그 정류장이 멀리 보이는 곳까지 다다랐다. 이대로 가면 난 밖에 있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난 가만히 밖을 바라보고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내겐 그럴 책임이 있었다.


책임?


그래, 책임. 그의 상처와 원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하는 책임. 싸늘하고 냉담했을지언정 비참한 모습까지 그의 기억 속에 심어줘서는 안 된다는 책임.


하지만... 이 순간, 한 가지만 바라고 싶어.

제발... 그 아이의 앞에서 멈추지 말아 줘.


기사는 나의 바람을 들었는지 액셀을 계속 밟고 있었고, 버스의 거대한 엔진은 쉬지 않고 돌아갔다. 몸이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머릿속이 멍해지고 좀 멀미가 났다.

그러다 갑자기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내린 것도 아닌데, 버스가 멈춘 것도 아닌데. 고개를 돌려 보니 이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들이 있던 자리엔 창으로 들어온 노을빛이 가득 채워지고, 빛과 텅 빈 공간뿐인 가운데 혼자 앉아있었다. 공허하고 고요한 따사로움.

나른함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어디선가 풀꽃 향기 섞인 바람도 불어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어디까지 가는 걸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종점엔 어떤 풍경의 동네가 있을까. 한 번쯤은 깜빡 졸기라도 해서 가볼 걸 그랬어. 14살 소녀이던 때에...


바람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날리는 느낌에 기분 좋게 취해있다가, 그 끝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 멀어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러자 버스가 정지했다.


끼이이익.


바깥은 어둔 밤. 순식간에 온 거리가 노란 헤드라이트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얼핏 그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고개를 돌려 먼 길가를 주시하고 있는 파리한 얼굴과 눈동자.


처음엔 나도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지을 뻔했다. 하지만 계속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난, 버스가 다시금 출발하려 제동을 걸 때 이기적인 질문을 하나 건넸다. 내가 아닌, 그 누구... 이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거냐고. 그러나 한번 더 그의 얼굴을 본 뒤엔 그 생각을 놓치고 말았다.

거기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없었다. 슬픔도, 원망도, 노여움도 모두 자기 안에 꼭꼭 감추고 숨만 쉬고 있는 한 마리의 작은 짐승이 있었을 뿐. 그에게 지금의 난 스쳐 지나가는 차들보다 의미가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나만을 향했었던 미소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분노와 안타까움도 빛이 바래고, 이제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감정마저 조금씩 사라져 간다. 그러니까, 얼마 남지 않은 슬픔이란 감정도 아껴두자. 언젠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바다를 떠돌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따스히 웃으며 전해줄 수 있게.


버스가 다시 출발하고, 수많은 빛이 나를 꿰뚫는다. 버스의 형광등, 도로의 가로등, 사람들의 안광, 네온사인, 하늘의 별빛... 이 모든 것들이 나를 그들과 닮은 하나의 빛으로 만든다. 그리고 난 어느새 멀리 끝이 없는 다리 위에 있었다. 멀리 펼쳐진 빛의 길. 이건 정말 어디로 향하는 걸까, 얼마큼 가야만 끝은 아니더라도 다른 무언가가 나오는 걸까.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풍경을 눈 속에 아로새기며 서 있다가, 친근한 미소로 인사를 하고,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그 빛을 껐다.


버스는 내가 사는 동네의 정거장에 도착해서 날 내려주었다.

하늘에선 백만 개의 눈동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상관없는 일이다.



순정만화 컨셉의 그 시절 로판. 블로그 글 이사는 이제 거의 끝이네요. 앞으로 뭐든 신작을 쓰지 못하면 브런치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ㅜㅜ


기존에 올렸던 글은 파트를 나누거나 좀 더 다듬어서 브런치북 단편집으로 엮을 생각입니다. 지금은 선공개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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