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환상향

버스

2006

by 김경


사람들은 어떤 사건을 겪으며 서로 사랑하게 되고, 어떤 사건으로 인해 헤어지게 되는 것일까. 또 그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희미해지는 날이 오면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석남동까지 가나요?”


그 한 마디였다. 그녀와의 처음은.

도저히 말 한마디도 나눠보지 않았던 상대에게 건넬 수 있는 뉘앙스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숱하게 듣고 또 사용했던 무미건조한 말투.

마치 버스기사에게 말하듯 말이다.


“네, 가요.”


물론 나는 버스기사가 아니었다. 숨이 턱까지 차는 것도 부족해 다리가 조금 풀릴 정도로 정류장을 향해 뛰었던 한 마리의 고등학생이었을 뿐.

제발 버텨달라고 수없이 내 다리를 향해 외쳤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광속으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도 보지 못할, 총천연색의 파노라마를 스치며 이곳을 향해 뛰었다. 부디 버스보다 앞설 수 있기를 모든 신에게 빌면서.

그러나 승부는 여지없이 나의 패배로 판가름 났다. 난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서, 눈앞의 미녀를 앗아가는 철제 인간 도시락을 패배감 짙은 눈으로 바라봐야 했던 것이다.

버스는 떠났고 나만 남았다. 숨을 고르기 위해 무릎을 짚고 땅을 쳐다보며 쉬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렇게.

분명히 조금 전까지 이 정거장에 서 있다가 내 앞을 추월해 간 버스를 타고 갔을 텐데? 왠지 타기 전에 조금 머뭇거리는 것 같긴 했지만, 다시 내릴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다. 그냥 좋을 대로 상상해 버릴까? 안 돼, 오버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희, 초면 아니죠?”


실례지만 작업 멘트 아니십니까, 그거. 미소까지 머금은 묘령의 아가씨가 입에 담기엔 지나치게 강력한 단어 선택입니다만.


“아, 종종 저희 매장에 오셨었죠?”


이쯤 되면 아주 모르는 건 아니고, 적당히 상대방이 예상할 수 있을 만큼의 반응만 보여주는 센스. 사실 초면은 고사하고 눈을 감고도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을 정도이지만.

그녀는 내가 일하는 롯데리아 매장에 자주 들르곤 한다. 저녁 6시 즈음이 되면 혼자 와서 햄버거 세트 하나를 포장해 나간다. 말단 아르바이트생인 내가 들어왔던 시점에 이미 빼어난 외모로 인해 남자 아르바이트생 사이에서 인기인이었던 그녀는, 왠지 공허하고 도도한 매력이 풍겨 나는 여자였다. 나이는 고작해야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으나, 언제나 단정한 느낌의 세미정장 차림에 부드럽게 웨이브를 넣은 다크 브라운의 롱 헤어로 꾸미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또 그런 정숙하고 어른스러운 차림과는 대비되게 옅은 화장기와 발그스레한 혈색을 띤 피부가 오히려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해, 그녀의 독립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뭉뚱그려 보는 걸 나는 조금 유심히 봤었는데...


그 눈동자.


검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맑지만, 왠지 모르게 슬픈 느낌을 주는 무관심함.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저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되레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걸.

다가갈 수 없다. 누군가가 자신의 구역 안으로 들어선다면 저 사람은 분명 놀란 토끼처럼 도망가겠지.

피식 웃고 말았다. 그저 손님이잖아?라고 생각하며.


“손님, 치킨버거 세트 나왔습니다.”




... 그래.


... 그러기를 열댓번, 그 정도였는데!


이게 웬 떡이냐... 가 아니라 어쨌든, 기적과도 같은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혹시 내가 잘못 봤던 걸까? 사람들의 편견이야 그렇다 치고 누군가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웃으며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 있던 버스 정류장을 나서 같은 목적지인 석남동을 향해 걸었다. 자연스레 말을 이어간 건 그녀였다.


“집에서 아르바이트 나가는 길에 항상 그쪽 매장을 지나치게 돼서 종종 들르곤 하거든요. 몇 번 뵈었던 거 같아요.”


“아, 저도요. 패스트푸드 좋아하세요?”


“음... 그냥저냥? 밥 차려 먹기는 귀찮고...”


“아... 역시, 편하니까. 저도 그 귀찮은 기분 잘 알아요. 집에 자주 혼자 있다 보니.”


“그래요? 안 그래 보이는데...”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쳐다봤고, 난 속으로 약간 당황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거, 좋은 의미죠?”


그러자 그녀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네, 뭐...”


“흐...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닌 것 같은데...”


“아뇨. 예쁨 받으며 곱게 자랐을 거 같은데, 나름대로 생활력 강하신 거 아닌가 해서...”


“예쁨 받는 자식이었다면 용돈이 부족해서 그런 데서 햄버거 패티나 튀기고 있진 않겠죠?”


난 피곤에 절은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였고, 그녀는 그걸 보더니 살포시 웃었다.


“그건 그러네요.”


그녀와의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진 건 아니었으나, 우린 서로 심심찮게 말을 주고받았으며 가끔 대화가 끊길 때는 저물어가는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또각또각. 보도블록을 밟는 그녀의 발소리가 붉게 물든 거리 위로 퍼져가고, 조금씩 쌀쌀해지는 바람이 우리 사이를 휘돌았다. 방학이라 사복으로 한껏 치장한 여고생들은 재잘거리며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슈퍼에서 찬거리를 사들고 나온 아주머니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없이 일상적인 풍경 가운데 나만 다른 세계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난 다시 그녀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그녀는 생면부지의 나 같은 녀석에게 말을 걸었을까. 그리고 왜 멀다면 먼 이 길을 나와 함께 걷기로 마음먹은 걸까.


혹시 나처럼 걷는 걸 좋아하나?


“혹시 걷는 거 좋아하세요?”


빌어먹을 입아, 이건 아니잖니? 너에게는 심사숙고라는 단어가 외계어 같니?

그녀는 날 힐끗 바라보곤 말했다. 움찔.


“아뇨, 걷는 건 다리도 아프고 별로 안 좋아해요.”


“어, 그럼 왜...”


내가 당황해서 물어보자 그녀는 시선을 일부러 내 반대편 쪽으로 주며,


“보통은 버스를 타고 다니죠. 오늘은 특별 케이스예요.”


“아, 네에...”


제길, 모르겠어! 내가 뭐라고 치고 들어가야 되지?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혹시 그 특별 케이스가 저 때문인가요? 그 특별 케이스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 입이란 녀석은 방정맞을 뿐 용기가 없어.


우리는 어느새 가좌동과 석남동을 잇는 고가도로로 오르는 계단에 이르렀다. 그 계단이 놓인 내리막길은 골목에 오래된 주택가가 있고 작은 빌라들이 고가도로 아래쪽 길가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꽤나 한적하다는 느낌을 주곤 했다.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낙후된 공간이지만, 난간 옆에 높다랗게 서있는 은행나무들과 느긋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도시 속에서 고즈넉하다는 표현마저 떠올리게 했다. 여담이지만 어렸을 적엔 너무 무서워서 다닐 때마다 노래를 부르곤 했던 길인데, 지금은 그 계단에 오르기 전에 있는 은행나무들이나 고가도로 위를 걸을 때 보이는 도시의 풍경 모두 좋아져서 매일 걸어갈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지금 그 길 위를, 그 계단을 그녀가 내 옆에서 그림처럼 밟고 있었다. 조금은 피곤한 듯, 어쩌면 조금 지루한 듯. 그녀라면 저 높은 계단의 끝에 세워져 있는 깨진 가로등 밑에 서 있더라도 아름다워 보이겠지.


해는 순식간에 져서 우리가 고가도로를 내려왔을 즈음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동안에 우리들은 몇 마디의 말을 더 주고받았다. 난 그녀가 하는 아르바이트가 뭔지 물어봤는데, 석남동에 있는 일식 겸 호프집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늘 깔끔하게 차려입는 것도 그 가게 분위기 때문이라고. 난 누가 봐도 애송이 티를 벗지 못한 고등학생이었기에 다음에 한번 들르겠다는 말도, 언젠가 일하고 있던 그녀를 본 것 같다는 입에 발린 거짓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쉽네요, 한번 놀러 오라는 말도 할 수 없으니까...”


“곧 졸업이니까요, 뭐. 그때 되면 자주...”


“우리 가게 생각보다 메뉴가 비싼데.”


“그럼 가끔...”


“네, 놀러 와요. 나도 언제까지 일할지는 모르겠지만.”


“예, 하하.”


우린 동네의 중심부격인 사거리의 한쪽 건널목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내가 알기로는 이 건널목을 건너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그녀가 말한 호프집이 있었다. 자세히 본 적은 없지만 그 가게가 오픈하는 시각이 아마 이 즈음이었지.

우리의 옆에선 커플로 보이는 중학생 두 명이 손을 꼭 붙잡고 다정다감하게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귀여운 새들을 바라보듯 그들을 슬쩍 바라보더니 곧 담담하게 앞을 바라봤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눈부신 노란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내 눈에 그녀의 손에 들려 달랑거리는 종이봉투가 들어왔다.


“식을 텐데...”


“네?”


그녀는 작게 반문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건조한 목소리로.


“햄버거요. 보통 식으면 맛없잖아요. 게다가 만든 지 한 시간 반 정도 지나면 폐기처리 하거든요, 매장에서도. 가서 일찍 드세요.”


내가 웃으면서 롯데리아 아르바이트생다운 배려의 말을 건네자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원래 가자마자 먹어요.”


“아, 네, 그래요?”


내가 당황해 하자 그녀는 재미있어하며 말했다.


“가자마자 먹어도 식어 있긴 마찬가지예요. 다들 그게 뭐가 맛있냐고 하죠.”


“솔직히 그렇지 않아요? 제가 그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제가 일하는 곳에 가자마자 밥을 주지는 않거든요. 알아서 먹고 와야 되는데, 귀찮고... 악순환이에요.”


신호가 바뀌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만한 폭의 건널목을 지나 이동통신사 대리점을 지나고, 낡고 허름한 횟집을 지나고, 구멍가게 같은 슈퍼를 지나 그녀가 일하는 호프집 앞에 도착했다. 입구의 외벽을 통나무로 갖다 붙인, 이 동네 치고는 나름대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한 호프집이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요코하마라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식 겸 호프집. 나 같은 녀석이 갈 일은 거의 연중행사로도 없을 법한 가게였다.


“다 왔네...”


그녀는 무언가 마침표를 찍듯이 말했고, 나는 그만큼 아쉬움이 남아서 그녀에게 물었다.


“몇 시까지 일하세요?”


그러자 그녀는 날 놀려먹으려는 듯, 콧등을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다음날 해 뜰 때까지요.”


그 말은 곧 ‘착한 어린이는 잠자리에 파묻혀 있을 시간까지요.’라고 들렸다. 뭐람, 난 20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 어엿한 청년인데.

하지만 말문이 막힌 건 사실이다. 아침에 다시 뵙고 싶다는 말은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다면 후약은 어떻게 잡는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난 다급하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 저기요.”


“네?”


너무하잖습니까. 불러 세운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것 같은 그 말투와 표정은.


“혹시 다음번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난 아까부터 그녀의 웃는 표정을 보면 이 생각부터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음... 글쎄, 만약 걷는 게 좋아지면요.”


겨우 돌아온 그녀의 대답에 난 그야말로 계면쩍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용히 돌아서며 이 한마디를 남겼다.


“그땐, 버스보다 먼저 도착해보세요.”


그녀의 말을 듣고 놀람과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른다는.


“저기, 이민철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돌아서 인사하듯이 답했다.


“유지영이에요.”


나는 그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멀뚱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이후에 난 그녀를 어렵지 않게 다시 볼 수 있었다. 예의 그 버스정류장에서. 운이 좋게도 두 번째, 세 번째로 만날 땐 버스와 마주칠 일이 없었고 따끈따끈한 햄버거 세트가 든 봉지를 들고 기다리던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막 끝내고 나온 나와 당연한 듯이 그 길을 걸었다. 우리는 점점 편한 사이가 되었고, 말도 놓게 됐다. 연인? 친구? 뭔가 애매한 그런 사이로.

행복감에 젖은 일상이 마치 꿈인 듯 실감 나지 않던 어느 날엔가, 난 불쑥 그녀의 집에 가게 됐다.


“어...”


그녀가 조금 멍한 표정으로 그 호프집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익숙하게 그녀를 보내려다가 궁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녀는 겨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오늘은... 아르바이트 쉬는 날이었던 것 같아.”


풋 하고 나는 짧게 웃고선,


“그래?”


“어.”


조금씩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그녀는 약간 싱겁다 싶을 정도로 멍한 구석이 있었다. 짧은 대답과 긴 시간의 공백... 분명 그 머릿속에선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지는 중일 거라 생각하지만, 그녀가 먼저 그것들을 내비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난 내심 신이 나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래? 나도 아르바이트가 끝난 참이고... 커피숍이라도 갈까? 아님 뭐라도 먹으러 갈래?”


“그냥... 집에나 들렀다 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초대였다.


“그러지, 뭐.”


나는 행여 놀란 마음을 들킬까 봐 얼른 대답하며,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약간 작았다. 덕분에 그녀의 옆에서 걸을 때면 바람에 가볍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그 아래의 여린 몸으로 시선이 옮겨가곤 했다. 그녀의 연약해 보이는 어깨를 볼 때마다 언제나 감싸 주고 싶은 욕망이 일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엔 쉽사리 손대고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어른과 아이의 갭이라고 할까, 21살과 19살이면 별로 큰 나이차도 아니건만 옷차림으로 보나 자연스레 묻어나는 분위기로 보나 난 그녀의 키 큰 동생 같은 느낌밖에 나지 않았다.


“배고파?”


동네 편의점이 앞에 보이자 그녀가 물었다. 별로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들어주는 무엇이라도 먹고 싶었다.


“어, 조금. 라면이라도 사 가자.”


그녀는 뭐가 좋은지 옅게 웃으며 내 얼굴을 한번 곁눈질하고는 말없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왠지 그날따라 그녀는 더욱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녀가 라면을 고르고, 난 음료 코너를 기웃거렸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 집에 먹을 거 별로 없으니까.”


“아냐, 됐어.”


계산은 그녀가 하고, 봉지는 내가 받았다. 서로들 묵묵히 계산하고 돈을 내미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그녀를 보고 있자니 왠지 얼마 전에 날 보는 것 같아서 조금 우스웠다.

혹시 이 아르바이트생도 남몰래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가 내가 옆에 붙어있는 걸 보게 돼서 엄청난 쇼크라도 받은 거 아냐? 이거 괜히 우쭐하면서도 미안해지는데?


그녀의 집은 도로변에 위치한 이 편의점 옆으로 난 길로 들어가서, 다시 또 골목으로 들어가야 했다. 절대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결국 날 데리고 도착한 곳은 층층이 계단식으로 되어 올라가는 좁은 골목길 가운데 난, 놀랄 만큼 허름한 집이었다. 지은 지 10년도 더 되어 보이는 그 집은, 보수공사를 언제 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골목길과 더불어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길바닥의 깨진 콘크리트 사이론 하수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이 골목길로 접어드는 귀퉁이에 서 있는 전신주 가로등도 퀭하니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이 동네 자체가 별로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동네를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포장이 부실한 골목길에 자리 잡은 집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들어와.”


덜컹, 하고 오래된 녹색 철문은 온몸을 울리며 열렸다.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칠 사이로 건드리면 가루가 되어 떨어질 것 같은 녹 덩이가 붙어 있었다. 그 현관문을 들어서서 나온 2, 3평방미터의 작은 마당에는 어른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법한 키 높은 화단과 벽이 쳐진 두 칸의 생활공간, 그리고 본 집이 있었다. 화단에는 이름 모를 앙상한 나무가 가시 같은 가지를 담 넘어 옆집까지 뻗치고 있었고, 그 두 칸의 생활공간은 재래식 화장실과 샤워장처럼 보였다. 시골에서나 볼 법한 그 모습에 난 빈말이라도 괜찮은 집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별다른 말없이 본 집 안으로 들어가는 유리문을 열었다. 나도 묵묵히 그녀를 뒤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싸늘하게 저며 오는 냉기와, 햇빛이 별로 들지 않는 음침한 실내가 허전하다 못해 쓸쓸한 느낌을 줬다. 그녀는 누구누구와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걸까, 이곳에서 산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연달아서 머릿속을 때렸다.

그녀는 어색하게 서 있던 내게 문 옆 장식장 아래쪽에 있던 슬리퍼를 내밀었다.


“춥지? 보일러 틀 테니까 따뜻해지기 전까진 슬리퍼 신고 있어.”


“어, 흐흐. 조금 썰렁하네.”


그녀는 가볍게 슬리퍼를 끌며 정면에 바로 놓아져 있는 싱크대로 다가갔다. 그리곤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저기 앉아 있어. 라면 끓여줄게.”


그녀가 가리킨 곳은 문도 없이 작은 커튼으로 가려진 방 안에 있는 침대였다. 그건 따뜻해 보이는 하얀 솜이불로 덮여 있었다.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어 방에 머뭇거리며 들어가긴 했지만, 대뜸 침대에 앉지는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그 옆에 놓인 컴퓨터 책상으로 다가갔다. 컴퓨터는 몇 년이나 지난 구형 모델이었다.


“아, 그냥 인터넷이나 좀 하고 있을게.”


“그러든지.”


바깥에선 비닐봉지를 뒤지는 소리와 냄비에 물을 담는 소리가 들리고, 다음에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녀의 방 안을 구경했다.

그녀의 방은 천장이 높고 벽에 큰 책장들이 비치되어 있어 오래된 서재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었다. 입구 정면에 위치한 컴퓨터 책상엔 구형 PC 한 대와 프린터, 몇 개의 CD가 놓여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침대와 바깥을 바로 비추는 큰 창문이, 왼쪽으로는 크고 작은 책장들이 있었다. 침대 발치엔 입식 옷걸이가 놓여 있었는데,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지만 들어오고 나면 쉽게 보이게 되어 있었다. 왼쪽에 있는 책장들은 모두 3개로 작은 것 하나와 큰 책장 두 개였다. 책장에 꽂혀있는 건 대부분 고전 명작들로, 간혹 오래된 대중 소설책들도 섞여 있었다. 한 20~30년쯤 된 걸로 보이는 오래된 책들은 그녀의 부모님이 읽으시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되었다.

곧 그 방안의 은은한 향기 사이로 라면 냄새가 풍겨왔다.


“자, 어서 나와 드시죠.”


“음, 감사히 먹겠습니다.”


난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으며 말했고, 그녀는 모든 세팅을 맞춰놓고 그릇과 젓가락을 든 채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내가 먼저 시식하길 기다렸다. 후루룩대며 한 젓가락을 먹고 난 감탄한 듯이 말했다.


“맛있는데?”


“당연하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과연 날 먹으라고 차려준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적극적인 자세로 냄비를 향해 덤벼들었다. 물론 나도 지지 않을 만큼 분투했고.

방금 식탁 의자에 앉을 때, 난 새삼스레 느꼈다. 이 집은 춥다. 보일러를 틀었다곤 하지만 이 집은 벽 속에까지 한기가 서려있어서 전혀 덥혀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여기에 사는 건 분명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과장된 것 같은 밝음은...


“그러고 보니 김치 없는데 김치도 살걸.”


“난 괜찮아. 라면 먹을 때 김치 안 먹거든.”


“그래?”


“아후~ 후~ 어.”


어느새 냄비는 바닥을 보였다.


“잘 먹었습니다.”


“그릇은 놔둬, 내가 치울게. 커피나 한잔 마실래?”


그녀가 손 빠르게 그릇을 치워, 난 두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래준다면 땡큐.”


“역시, 받아먹는 데 익숙한 온실 도련님.”


“웃기지 마.”


난 그녀의 구형 컴퓨터로 음악을 틀어 놓고 인터넷을 쓸데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곧 그녀가 찻잔을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그리곤 내 옆으로 와 머리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나 뭣 좀 할 거 있는데, 잠깐만 비켜줘.”


“어어, 알았어.”


그녀의 머리카락과 귓가가 바로 코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난 당황해서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내게 내밀고, 자기 건 컴퓨터 책상 앞에 내려놓은 채 인터넷 쇼핑몰을 뒤적거렸다. 그대로 서 있는 것도 어색하고 해서, 나는 그녀의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우스울 만큼 찻잔을 꼭 쥐고.

그녀는 몇 분 뒤 웹서핑을 마치고 익스플로러를 닫았다. 덕분에 나오던 음악까지 꺼졌다.


“끝.”


거의 마시지 않은 찻잔을 집어든 그녀는, 커피가 넘치지 않도록 천천히 의자를 회전시켜 내 쪽을 향해 앉았다.

사실, 난 그때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에 이미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직도 춥지.”


“아니, 별로.”


“그걸로... 손이라도 녹여.”


그녀는 좀 전의 과장된 쾌활함이 사라진 쓸쓸한 눈동자로, 계속 자상한 말을 내뱉고 있었으니까.


그런 따뜻한 말을 들어야 할 건 내가 아냐. 얼어붙은 것 같은 당신의 눈동자가 혼자 울고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거야.


한참을 그녀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만이 정적 속에서 빗방울처럼 하나둘씩 떨어지고, 그것이 모여 흐르고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으로 인해 무릎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찻잔에서 나는 김이 그녀의 눈가에까지 피어올랐다. 난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내 잔을 컴퓨터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오른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미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한쪽 어깨를 붙잡힌 채 어린아이처럼 날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안 돼.”


분명 그녀도 겨우 입 밖으로 냈을 딱딱하게 끊어진 그 말을 무시하고, 난 그녀의 찻잔을 빼앗아 컴퓨터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때 커피가 조금 튀어 내 팔과 그녀의 어깨를 적셨다. 난 그대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그저 가만히 나를 받아들였다. 우리의 입맞춤은 느리고, 따뜻하고, 이 방에 흐르는 시간보다 길었다. 그러고 나서 난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몸을 감싸 안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그런 내 품 안에서 그녀는 멍하니 따르는 듯하다가, 갑자기 순간적으로 날 힘껏 밀쳐버렸다. 예상치 못한 강한 저항에 난 중심을 잃고 침대에 엉덩방아를 찧었고,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충동에 흔들려 밀어붙인 건 나였지만, 결국 허락해야 하는 건 그녀였으니.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감정 없는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녀의 깊게 가라앉은 슬픔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당신도... 날 상처 입힐 건가요?'


아니야, 난 당신을 상처 입히지 않아. 제발... 내게 그 상처를 보여줘. 내가 어떻게든 치유할 수 있게. 내 손으로 당신을 치유하고 싶어.


‘아니, 보여줄 수 없어요. 이건 나만의 것이니까.’


그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침대에 앉은 채, 뒤로 손을 짚고 있던 나는 내 앞 침대 모서리에 다리를 모아 앉는 그녀가 마치 느린 화면처럼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옆으로 앉아서 가만히 있었고, 난 다시 용기를 내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얼굴을 밀착시켰다. 그러자 불쑥 그녀는, 다가오던 내 이마를 검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어린애면서.”


머리가 뒤로 젖혀질 만큼 세게 누른 건 아니라서, 난 그대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게 뭐 어쨌는데.”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침대에 눕히고 입을 맞췄다. 그녀의 블라우스를 벗기고 내 입술이 그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가슴을 지날 때, 혼잣말처럼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넌... 아무것도...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얼음 조각처럼 차갑지만 곳곳에 과거의 흔적처럼 따스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어디쯤에 내가 모르는 아픔이 있는지 찾고 싶었다.


그럼으로 해서 결국엔 그녀에게 큰 의미가 되고 싶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내 아르바이트가 쉬는 날이면 - 롯데리아는 거의 격일로 쉰다 - 그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침대 안에서. 다른 곳은 너무 추웠으니까.


“보일러 고치고 싶다...”


그녀는 눈 위로만 이불 바깥으로 비죽이 내밀고 말했다. 나는 옆으로 누워 그 뚱한 눈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왜, 힘세고 능력 좋은 인간 보일러 하나 있으면 됐지.”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냈다.


“그럼 가서 온수 좀 만들어봐.”


“... 고치는 게 낫겠다.”


“비싸.”


“얼마나?”


“단돈 십만 원이라도 지금 나한텐 만만찮은 돈이야. 비싸. 그리고 애써 고쳐봤자 얼마 안 가 또 고장 날 테니까...”


“그럼 아예 새로 사버릴까.”


“무슨 돈으로?”


“내가 돈 보태줄게. 아르바이트하잖아.”


“됐어. 차라리 안 고치고 말지. 어차피...”


“어차피?”


“나 이 집에서 잘 안 자. 잠은 거의 가좌동에 있는 오빠네서 자니까.”


친오빠가 있었나? 하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이런 집 팔아버리고 아예 그 집에서 같이 살지?”


그러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말했다.


“몰라.”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잠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옷가지를 대충 걸치고,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싱크대 앞으로 난 작은 창은 옆집의 담장에 가려 빛이 겨우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집에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유복한 가정환경 아래 자라왔다. 태어났을 때부터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살았고, 부자는 아니지만 가끔은 여유로운 소비도 즐길 줄 알았다. 당연히 기본적인 의식주 같은 걸 걱정해 본 일이 없었다. 언제나 나보다 더 잘나고 더 잘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살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를 만나고 이 집에 오기 전까진 이런 데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거의 없었다. 이런 내가 과연 그녀를 이해하며 지낼 수 있을까?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물이 다 끓어 커피를 타고, 그녀가 잠든 침대 곁으로 왔다. 결국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는 숨이 막히는지, 그녀는 얼굴을 내밀고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무뚝뚝한 기색 하나도 없이 예쁘기만 한데...’


나는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아 그녀의 이마와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위에 얹힌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다가, 장난기가 발동해서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꼬았다. 그러자 그녀는 잠투정하듯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조금 뒤척였다. 그게 너무 귀여워 소리 죽여 웃다가,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고 나서 그 옆에 있는 컴퓨터 책상 의자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나지막이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다 깼어. 자는 사람 귀찮게 굴지 마.”


“엇, 미안. 자는 모습이 너무 자극적이라.”


내가 킥킥대며 말하자 그녀는 이불로 가리고 몸을 일으키며 게슴츠레하게 날 째려봤다.


“변태였어? 그런 말을 하게.”


“그래, 이마에 키스만으로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참지 말지 그랬어.”


“응? 지금부터라도 그래볼까.”


“됐어, 거기까지.”


그녀는 침대 위에 손을 짚고 엉금엉금 다가가는 나를 손으로 막아내며 말했다.


“나가자. 이제 슬슬 아르바이트 나갈 시간이야. 목욕탕 갔다가 준비하려면 시간 빠듯해.”


나를 잠시 그 방에서 나가 있게 하고, 그녀는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집 문 밖으로 나서며 난 그녀에게 물었다.


“알바 또 쉬는 날이 언제야?”


“정해진 건 아냐. 그런데 그건 왜?”


그녀는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어디라도 같이 놀러 갈까 해서.”


“한겨울에?”


“왜, 실내에서 놀면 되지. 그래, 롯데월드 같은 데나 갈까. 놀이공원.”


“어린애도 아니구... 아, 너 어린애였지? 참.”


“뭐? 그래, 나이 들어서 좋겠다.”


그녀는 간혹 보여주는 짓궂은 눈으로 웃었다. 나는 한껏 약이 오른 표정을 지었지만 자주 볼 수 없는 그녀의 웃는 모습이 그저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다.


“언제 가고 싶은데?”


그녀가 길을 걸으며 물었다.


“이번 주말쯤. 근데 쉬는 날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거야?”


“글쎄... 한번 해볼게.”


“좋았어. 잔뜩 기대해야겠군.”


그녀는 골목길의 귀퉁이를 지나며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롯데리아에 롯데월드라니... 너 롯데랑 무슨 사연 있어?”


“오, 날카로운데. 롯데 가문의 숨겨진 상속자랄까."


우리는 조금 웃었다.

며칠이 지나서 금요일이 되었다. 그러나 근 며칠간 그녀는 만날 사람들이 있다며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난 그녀의 번호가 찍힌 핸드폰만 바라보며 조금씩 생겨나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난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이름, 나이, 사는 곳, 핸드폰 번호... 정도밖엔. 사람을 상대하는 데 부족하진 않을 정도의 사항이지만, 함께 있을 때 느끼는 친근함과 실제로 그녀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 수준의 차이는 큰 편이었다. 감정뿐인 관계, 과연 그런 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언젠가 뜬금없이 그녀가 이별을 고한다 해도, 내가 그 이유를 알고 받아들일 수나 있을까.

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을 혼자 걸었다. 내일은 약속했던 날이다. 그녀가 기다리곤 했던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며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바람이 조금씩 쌀쌀해지는 것 같았다. 눈이 오려는 듯이.

고가도로로 오르는 계단을 오르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동안 통화 대기음을 듣다가 포기하고 끊을까 하는데, 그녀가 받았다.


“여보세요.”


“어, 난데. 뭐 해?”


“이제 일 나가려고...”


“오빠네야?”


“응...”


“내일 만나자. 놀러 가기로 했잖아. 시간 비지?”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의 의미를 알 것 같아서, 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돼?”


“다음에 가면 안 될까?”


이번엔 내가 침묵했다. 실망하면 안 되는데, 실망하는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데, 그게 너무 어렵기만 했다.

너를 조금 더 알고 싶어. 그럴 수 있잖아, 우리. 조금 더 많은 대화와 시간을 함께 나눌 수도 있잖아. 그런데... 넌 왜 피하기만 하는 거니.


“시간이 안 돼?”


“아르바이트 쉰다고 말은 했는데, 갑자기 집안 어른이 입원하셨다고 연락이 와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어, 그래? 아쉽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웃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이고 싶어서.

그녀는 수화기 너머에서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는 것인지,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늦게라도 시간 되면 연락해.”


“그럴게.”


“일 잘 나가고, 또 연락할게.”


“어, 그래. 너도 푹 쉬어.”


다음날 오후엔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쉬는 날로 맞췄지만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갑작스레 빠지게 되어 일손이 부족하다며 긴급하게 매니저님한테 연락이 왔고, 큰 고민 없이 승낙했다. 휴대폰엔 그녀에게서 온 전화는 물론 문자조차 없었다.


‘지긋지긋한 기름 냄새, 화상이라도 왕창 당해버릴까.’


일하면서 400도에 육박하는 할로겐 등을 주의하지 않고 감자튀김을 섞다가 손등에 붉은 반점이 생겨, 그날은 조금 핀잔을 들었다.


“야, 너 조심하지 않고 뭐 했어? 손 따갑거나 그러진 않아?”


“아, 괜찮을 줄 알았어요. 언제 이렇게 됐지?”


어느새 4시간이 지나, 열로 인한 독이 응어리진 몸뚱이를 끌고 매장을 나왔다. 바깥엔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가슴속의 독기를 잠재워주진 못했다. 평소엔 그저 피곤과 열기에 찌든 몸이 화끈거릴 뿐이었는데, 그때는 그녀에 대한 생각까지 더해 내뱉는 숨결마다 가슴이 타버린 시커먼 재가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와 더불어 가슴속엔 작고 쓰라린 상처가 하나둘씩 파여 갔다. 완전히 뚫려서 날 죽게 하지도 않는, 아님 무시할 만큼 얕아서 딱지가 생길 때까지 참을 수 있게 하지도 않는.


어둠 속의 길이 펼쳐져 있다. 낮에는 그렇게나 아름답고 싱그러운 길이었는데, 밤이 된 지금은 고요한 쓸쓸함만이 감돈다. 이 길의 완만한 경사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는 걸까, 촘촘히 심어진 이름 모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는 갈까.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자동차들의 빛과 소리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좋아할 수가 없어.

버스가 굉음을 내며 예의 그 정류장을 지나쳐갔다. 정류장엔 아무도 없었다.

기다려 볼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가 지나치면 만날 수도 있고, 행여나 연락을 한다면 두 동네의 중간 즈음이니 어느 쪽이든 늦지 않게 달려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 30분만.


하늘에선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누굴 찾는 걸까. 눈이 올 때면 난 예전부터 그게 누군가를 찾는 것만 같아서, 아련한 기분에 젖어들곤 했다.

검게 물드는 하늘 위를 눈이 조용히 걷고 있었다. 돌보지 않아 해진 옷자락을 끌며, 눈물 하나 없이 그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어디에 있니,

네가 찾는 그 사람은 만날 수 있는 거니.


눈송이가 쌓여 자동차들이 덜덜거리며 서행할 즈음에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를 밝히고 있는 가로등 아래를 지나며, 그녀와 함께 걷던 일을 생각했고 한편으론 한산한 풍경을 즐겼다. 눈발 위로 칠해지는 가로등의 불빛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래, 어차피 혼자였잖아. 이 풍경 속에서 걷던 나는.


나는 곧 불빛이 거의 없는 언덕길을 지나고, 고가도로로 오르는 계단에 이르렀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 계단에 쌓인 눈이 걸음마다 녹아들고 흩어졌다. 고가도로는 눈 때문인지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 꽤나 잠잠했다.

한 걸음씩 밑을 쳐다보며 올라갔다. 그리고 그 계단이 열 개 남짓 남았을 무렵,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든 내게... 가만히 서서 미소 짓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자신을 찾아 헤맸던 눈을 그 어깨에 앉히고, 남은 한 사람을 부르는 정적인 몸짓으로.


“미안해.”


그녀의 입에서 입김이 작게 뿜어졌다.


“뭐가...”


“약속을 마음대로 어겼으니까.”


“만났으니까 됐어.”


놀라움과 기쁨으로 인해 입술이 떨리려고 하는 걸 꾹 참았다. 사실 내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지만.


“너 오늘... 생일, 맞지?”


“어, 어떻게 알았어?”


“문득 네 휴대폰 번호 끝자리랑 오늘 날짜를 맞춰보니까... 그런 것 같아서.”


“눈치... 정말 빠르다, 빨라.”


“미안하다니까. 어쨌든 그래서... 너한테 생일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그녀는 말을 끊고 그 언제보다도 사랑스럽게 웃었다. 그 따스함에 그녀 곁에 앉아 있던 차가운 눈이 심술을 부리며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이... 내 눈에는 보였다.


“뭔지는 알아맞혀봐.”


답부터 들이민 문제를 내지 말란 말이야. 바보 같으니.


나는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올라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는 내가 덥석 안자 조금 당황하는 듯했지만 그 손을 들어 가볍게 내 등에 얹었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한 시간 하고도... 30분이야. 많이 추웠어."


그래, 당신이 얼마나 차갑든 상관없어. 상처를 보여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어. 내 온기를 주고,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난 가지고 있는 모든 온기를 담아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건 아주 짧았지만, 홍조를 띤 그녀의 얼굴이 추위를 잊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여기도 알고 보면 꽤 괜찮은 곳이야.”


“여기가?”


“자, 여기서 봐봐.”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가도로 가운데 즈음에서 멈춰 섰다. 인명사고가 나지 않도록 쳐진 철망 너머로, 밑에 있는 도로를 비추는 가로등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는 곳. 나는 밤에 혼자서 이곳을 지나며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저기 봐, 내가 찾아낸 ‘빛의 다리’야. 꽤 그럴싸하지 않아?”


그녀는 멀뚱히 한동안 쳐다보더니 실소를 머금었다.


“이게 뭐야, 어이없어.”


“우린 지금 고가도로 위에 있는 게 아니라 그걸 지나는 빛의 다리 위에 서있는 거라구.”


“아하하, 이걸 따라가면 어디로 가는데?”


“몰라. 끝이 없거든, 이건.”


“흐음... 로맨티시스트 같은 구석도 있었구나, 너.”


난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상해?”


“어색해.”


“괜찮아, 어디 가서 안 이러니까.”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근데, 뭐 좋아해?”


“응?”


좋아하는 거라던가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아무거나 알려달라는 내 설명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한참을 생각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 해도, 조금씩 알아 가면 되겠지. 조금씩.



상처.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

그것은 아픔을 수반해서

낫기를, 아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만

그 상처는 마음을 온전히 허락한 사람만

보듬고 치료할 수 있다는 걸

터져 나온 그녀의 말들로

난 배웠다.



그날, 나는 기분 좋게 간식거리를 사들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내 아르바이트가 없던 날 오후 3시. 그녀가 아르바이트 가기까지 꽤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다. 날씨는 다소 우중충했지만 내 기분은 흥겹기만 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걸었을 정도로.

그러나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난 험상궂은 사내들과 마주쳤다. 모두 3명이었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로 봐서 분명 조직 폭력배들 같았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다행히도 멀쩡한 행인에게 시비 따윈 걸지 않았지만, 그녀의 집이 바로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섰을 땐 차라리 조금 전 상황이, 내가 대신 불행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방금 누군가 드나든 듯 열려있는 철문, 폭력배인 것 같이 보였던 남자들. 행여나 하는 마음에 헐레벌떡 골목길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멀쩡한 모습으로 마당에 서 있었다. 아니, 멀쩡하지 않았다. 그 눈가에 눈물이 가득 차 흐르고 있었으니까.


“지영아, 왜 그래! 왜 울어?!”


그녀는 나를 보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듯이 하며 돌아섰다.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쓰지 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방금 나간 사람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신경 쓰지 말라니까...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게 생겼어!”


“신경 쓰지 마!”


그녀의 짜증 섞인 고함에 놀란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찡그린 얼굴로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어지지도 않는 웃음을 억지로 지으며 힘없이 말했다.


“미안해, 그만하자.”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 줘. 오늘은... 그냥.”


더 이상 들어가면 모두가 상처 입는 곳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발걸음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동안 그녀의 아주 작은 흐느낌 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그친 후에 그녀는 날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안 갈 거니?”


그녀는 이제 나를 향해 분명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난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할 거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날 맹렬히 쏘아보기만 했다. 언제라도 날 찌르고 도망칠 기세로.

난 내린 두 주먹을 꽉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필요할 때만 옆에 있으면 되는 애완동물이야? 적어도... 뭐라도 해줄 수 있잖아. 뭐라도 도와줄 수 있잖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그렇게 병신 같아 내가? 하... 그럼... 아니 그냥, 왜 그런지만 알려줘.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싶으면 빠질게.”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아직 그녀를 마주 보지 않고 있던 내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니가... 뭘 도와줄 수 있는데?”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날 싸늘한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알 수 없었기에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니가 뭐 대단한 사람쯤 돼?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 말해줄게. 나, 돈 필요해. 미쳐버릴 만큼 필요해. 이 지긋지긋한 집도, 그 인간들도 보기 싫어서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도와주겠다고? 너... 돈 많니? 아르바이트 월급? 고작 수십만 원? 웃기지 마, 그 걸로는 한 달 이자로도 부족해. 그리고 그게 아니면, 너희 집에서 날 재워주기라도 할 거니?”


그녀의 말이 내 폐부를 쥐어짜서, 숨을 쉬기에도 벅찼다.


“당연히 안 되겠지. 결국, 니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돌아가.”


“돈 같은 건...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래, 어떻게든 만들려고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일만 했어! 내가 진 빚도 아닌데! 뼈 빠지게 벌어서, 갚고 또 갚아도 끝이 없어... 어느새 수천만 원이야... 이젠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될지...”


“부모님은? 오빠라는 사람은?”


“부모님? 이 빚을 누가 진 것 같아? 그리고...”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너 정말 순진하구나. 나 오빠 없어. 혼자야... 이젠 알겠어?”


“그럼...”


“동거하는 사람이야.”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봉지를 놓쳤다. 툭, 하고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고 내가 사 온 과자랑 삼각김밥 등등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니, 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같이 자는 관계야. 니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그런 만남 같은 거, 난 몰라. 너... 생각이나 해봤니? 헤어졌던 사람한테 전화해서 재워달라고 그랬어. 울면서... 나 그렇게 약해, 나 그렇게 막 살아. 그러니까 나 좀 내버려 둬.”


난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미 힘을 잃은 손을 그녀를 향해서 들었지만, 그녀는 내가 다가가는 만큼 뒷걸음질 치며 날카롭게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 나, 소리 지를지도 몰라.”


손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그제야 알았다. 이미 그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으며, 그것과 상관없는 나를 조금이라도 더 멀리 있을 때 떨쳐버리려 한다는 걸.


“지영아.”


마지막이었다.


“만약에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면, 우리가 언제까지 계속 만날 수 있었을까..."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다시 차오르고, 조금씩 흘러내렸다.

늦었지만, 나는 이제야 그녀를 자세히 본다. 어느 날 갑자기 우연처럼 내게 찾아온 사람. 무관심해 보이는 눈동자에 따뜻한 미소를 감춰두었던 사람. 아픔을 숨기고 웃을 수 있었던 사람.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도 어떤 비단보다 곱고, 일그러진 눈가도 부드러운 빛이 나는 사람. 크나큰 짐을 어깨에 얹고서도 시원스레 걸을 수 있었던 사람. 눈과 함께, 여신 같은 아름다움으로 날 기다려준 사람.


안녕.


다시는 전하지 못할 마음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건네고,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골목길로 향하는 길을 되돌아 걸으며, 그 길을 잊었다.




저녁 밤거리를 혼자 걷는다. 한때는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길을. 오늘도 도로엔 지치지 않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그 불빛은 잎이 다 떨어진 가로수들을 훑고 지나간다. 나는 도로변에 가까이 붙어 걸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남겨졌을까.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뭘까. 그깟 돈에 가로막혀 끝나버릴 것이라면, 그렇게 의미 없는 것이라면...


“야! 너 미쳤어? 똑바로 인도에서 걸어다녀 이 새끼야!”


어째서 내 마음은 그것들로 인해 살고, 또 죽었을까.

어느새 발걸음은 그 정류장에서 멈춰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의미 없이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곧 버스 한 대가 멀리서 달려왔다.

저 버스엔 그녀가 타고 있을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확인할 수도 없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타고 와, 나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오른편 창가에 앉아서, 흐린 눈빛으로 이곳에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이다. 가까이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나와도 모르는 사람이 된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버스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나와 그녀는,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온 버스를 탔다. 놀랄 만큼 모두가 낯설었다. 조금 어지러울 정도로. 하지만 내가 약간의 공황상태에 빠진다고 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거칠고 둔탁한 진동이 몸에 퍼지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움직였다. 내가 앉아있었던 정류장을 떠나, 언젠가 노을 지는 하늘 아래 그녀와 걸었던 횡단보도를 가르고, 그녀가 기다림을 선물했던 고가도로를 지났다.

그럼으로 해서 나는 보았다. 버스가 빛의 다리를 끊으며 달려가는 모습을.


모든 빛이 사라졌다.

나는 이제 그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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