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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모모씨 Jun 24. 2023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엔 품이 든다

사랑을 노력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감정이니까. 감정은 저절로 생겨나서 자기 알아서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감정 아닌가. 이성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오직 우뇌만 쓰여야 한다. 즉, 사랑에는 품이 들면 안 된다! 그래야만 사랑이라고 여겼다. 주변인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며 이를 주창한 것은 아니다만, 비밀스레 간직해 온 나만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나는 변치 않을 나의 사랑을 믿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곧 나니까.


사랑, 그러니까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몇몇 취미들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고 유지되어 왔었다. 개중에 하나가 책이었다. 초등학교 땐 틈만 나면 집에 있는 세계 문학 전집을 읽었다. 다 읽고서 스티커를 붙이는 게 그렇게 뿌듯했다. 중학생 시절엔 학교 시험이 끝나서 친구들이 학원에 오지 않으면, 혼자 근처 서점에 가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수능 공부 이외의 모든 활동이 사치라고 여겼던 시기인 고등학교 땐 언어문제집을 사자마자 문학 지문을 싹 다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대학생이 돼서도 학교 도서관에 책을 예악 하고, 기다리고, 대출하고, 읽고, 반납했다.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것만 같은 도서관 앱을 열심히 이용하며 책에 관한 후기를 짧게나마 남기곤 했다. 제발 누군가 내 후기에 댓글을 달아주길 매번 바랐지만 졸업할 때까지 아무도 남겨주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오래 지속된 사랑이 변하려면 당연히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했다. 20여 년이 넘게 지속된 사랑이 식는 데 말이다.


물론 자만이었다. 사랑, 그러니까 내가 나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단시간에 쉬이 변할 수 있었다. 변덕스러웠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키나 혈액형 같이 그냥 영원히 나와 함께 하는 내 정체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입사와 동시에 책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생활 반경과 패턴이 완전히 변한 탓이었다. 주중에는 일한 후 술자리에 갔고 주말에는 그냥 술자리에 갔다. 가끔 돈을 써서 옷을 왕창 지르고 그 옷을 입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자연스레 책과는 멀어졌다. 읽을 시간이 없었다. 혼란에 빠졌다. 뭐지. 나 책 안 사랑하나 봐. 그냥 할 일 없어서 한 거였나 봐.


문제는 책을 사랑하지 않는 내가 별로였다는 것이다. 신념대로 사랑이 식은 거는 어쩔 수 없으니 맘이 아파도 작별하면 되지 않나 했는데, 쿨하게 보내줄 수가 없었다. 네가 없는 내가 내게 너무 별로라서. 일하는 내 모습도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고 술자리에서 웃고 떠드는 나도 꽤나 유쾌했다. 새로운 옷을 입는 나도 예뻤고 여행을 가는 나도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모습은 책을 읽는 나였다.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을 길 가면서 하고 자기 전에 하고 그냥 계속하다가 갑자기 혼자 깨닫고 이를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내거나 누군가와 대화하는 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알아줄 수도 없다 해도 말이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을 사랑했다. 이따금씩 고통과 환멸을 안기는 다른 곳에서의 내 모습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사랑하는 내 모습이 나를 버텨 주기 때문이었다. 삶의 열정을 품게 하고 나를 긍정하게 했으니까. 그걸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부재가 존재의 힘을 증명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다시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에 회사 선배가 알려준 게 한 독서모임이었다. 일주일에 한 권이라도 반강제적으로 읽고 90분 사람들과 떠들어보자. 노력을 해보자. 돈과 시간을 쓰자. 그 다짐으로 시작했다. 신념을 바꿔봤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선 품이 든다는 것을 인정하고, 노력을 해본 것이다. 사랑도 노력이 필요할지 몰라. 노력하는 사랑도 사랑일 수 있다며. 그렇게 일정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써주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덕에 사랑은 복구가 됐다. 더불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주객이 전도된 게 아닌 가 싶다. 사랑을 되살리기 위해 시작한 독서모임이 가끔은 책 보다 좋을 때가 있다. 독서모임을 하는 내 모습 자체가 꽤나 맘에 들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만들어준 매주 목요일 90분도 무척 맘에 든다. 90분을 함께 하며 내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그렇게까지 가깝지 않아도, 술을 전혀 하지 않아도,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과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나의 모습이 좋다. 매주 목요일은 나를 사랑하기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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