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 다 윗더 댄싱. 렛츠 팔로우 미. 아 원츄 컴 온 베이비. 우와 우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이유까진 기억이 안 난다만 담임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가요를 틀어줬다. 그때는 지금처럼 스트리밍 음원사이트가 보편화되지 않았었다. 게다가 우리는 고작 초등학생이었고. 당연히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한 개체였다. 그랬기에 난 반에서 유일하게 음원 사이트를 이용하는 아이였다. 난 당당히 나의 맥스 뮤직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선생님께 알려드렸다. 그렇게 1위 노래인 엔알지의 히트송이 반에 울려 퍼지게 됐다. 난 또 당당히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는 물론이거니와 랩까지. 나는 아직도 그 때 나를 우러러 보던 40여 명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몇몇은 ‘오’라는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신경을 안 쓰는 척 눈을 내리깔고 리듬에 맞춰 가사를 읊조렸지만 난 그 어느 때보다 시선을 의식했다. 물론 가사가 그런 뜻인지는 한참 크고 나서 알았다. 대체 담임 선생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 노래를 틀어줬을까. 아마 그도 그 노래를 잘 몰랐겠지.
어쨌든 고작 10살에 랩을 하는 자신에게 관중이 집중했을 때의 쾌감을 알게 된 나는 지드래곤이나 카디비 같은 랩퍼가 됐으면 딱이겠지만, 아시다시피 그렇지는 않다. 그런 성공 신화를 하도 들어서 익숙하지만, 현실은 아니니까. 지드래곤과 카디비는 세상에 딱 한 명 뿐이지 않은가. 모두가 어떻게 지드래곤이나 카디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드래곤과 카디비는 그렇게 인기를 끌고 돈을 벌 수가 없지! 그들도 어렸을 때부터 랩이야 잘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또래와 비교했을 때 랩을 잘했던 아이 모두가 유명한 랩퍼, 하다못해 랩으로 먹고 살아지는 랩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지드래곤과 카디비가 유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르고. 어쨌든 그런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인과관계도 애매하기에 기록되질 않을 뿐이다. 나 자신도 기억하질 않고. 떡잎부터 달랐다는 결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냥 어렸을 때의 해프닝일 뿐이니까. ‘그래서 뭐 어쩌라고’란 비아냥을 들었을 때, ‘그 때의 그 아이가 이렇게 컸다’라며 응수할 수가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대체 왜 10살 때의 일화를 서두에 썼을까. 랩퍼도 못 됐으면서. 그 이유는 바로 그 아이가 여전히 노래방을 뻔질나게 가는 어른으로 자랐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직접 글로 남겨둬서 기억하려 한다. 나만의 성공 신화 서사를 한번 다져보는 것이다. 물론 더 이상 친구들이 노래를 하는 내게 경탄은커녕 집중도 하지 않는다. 화려한 과거는 정말 잠깐이었다. 4분 남짓에 불과했다. 지금의 친구들은 내가 노래를 할 때, 내가 그러듯이 핸드폰으로 부를 노래를 찾거나 영혼 없는 눈빛으로 탬버린을 치거나, 자기들도 노래를 같이 부를 뿐이다. 더 이상 가사 따위를 외워서 박자에 맞춰 말한다고 날 우러러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전과 위상이 달라진 초라한 나의 모습에 슬프냐. 전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는가. 그게 문제인가. 노래를 부르고, 노래방을 가는 건, 언제나 즐거운데! 지금의 나는 관중이 있건 없건 노래를 부를 때 언제나 즐겁다! 관중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어때! 어쩔 수 없다. 즐거우면 그만이다
이렇듯 20여년이 넘게 내 즐거움의 원천 중 하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나는 그 수 많은 풍파를 겪고 우울의 시간을 버텨왔음에도 그것을 잃지 않았다. 성공했다. 나는 여전히 노래만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심지어 20여 년 전과 달리 관중이 없어도 말이다. 즉, 그 때 보다 더 진짜 노래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타인의 평가나 주목에 상관 없이 노래를 더 좋아하는 인간으로 자랐다! 정말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직도 노래방에서 히트송을 부르면 그렇게 신난다. 심지어 이제는 어른이 돼서 히트송 가사도 이해하면서 부를 수 있다. 더 신난다. 카다비나 지드래곤이 못 됐다고, 유년시절 소중한 일화를 잃을 순 없다. 그것을 널리널리 알리고 싶다. 이왕이면 의미를 잔뜩 부여해서. 그 아이가 글쎄 아직도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어른으로 컸다고 소문을 내고 싶다. 너무 기특하지 않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