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들어가는 날이 정해지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여행이었다. 입사까지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지만, 장기여행을 가기엔 무리였다. 당장 항공권과 숙박을 알아보고 예약하기에는 촉박했다. 귀찮기도 했다. 그렇다고 짧게 근처에 다녀오기는 아쉬웠다. 입사를 하고 나면 당분간은 긴 여행을 못 떠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동행할 친구를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게 필리핀이었다. 맞다, 걔 필리핀에서 일하잖아. 곧장 그에게 연락했다. "나 다음 주에 필리핀 갈래"
운이 좋게도 내가 가려고 하는 그 주에 필리핀도 연휴였다. 딱 그때 친구도 여행을 계획해 놓은 게 아니던가. 친구는 이미 유명한 관광도시행 버스를 예매해 놓은 상태였다. 밤 10시에 출발하여 아침에 도착하는 버스란다. 내 티켓도 바로 끊어줬다. 심지어 그 도시에 알고 지내는 한국인이 살고 있다고 했다. 숙박도 쉽게 해결됐다. 난 할 게 없었다. 정말 몸만 가면 됐다. 이렇게나 순조로운 여행이라니. 친구를 잘 뒀어. 난 운이 좋아.
운이 좋았던 나는 필리핀에 무탈하게 도착했고 무리 없이 친구를 만나 함께 버스에 탑승했다. 우리 빼고는 모두 필리핀 사람 같아 보였다. 연휴라서 그런지 터미널에는 사람이 많았고 분위기도 왁자지껄했다. 비행을 하고 온 터라 피곤했기에 앉자마자 잠들었다. 자고 나면 도착해 있을 줄 알았다. 당연히. 깊게 그리고 길게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도로 위더라. 그래서 아직인가 보다 하고 잤다. 다시 눈을 떴다. 변함없이 도로 위. 그래서 다시 잤다. 다시 눈을 떴고 도로 위. 다시 자고 눈을 뜨고 도로 위. 어? 근데 아까 그 도로랑 똑같은 것 같은데. 그제야 보이는 엄청난 교통 정체와 1차선 비포장도로.
그렇다. 필리핀은 우리나라처럼 교통이 잘 발달 돼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연휴에 맞춰 많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나섰고 그에 따라 그들을 태우는 모든 차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기차나 비행기가 많지 않았기에 대부분은 차를 이용했다. 더군다나 고속도로나 국도 같은 게 잘 돼 있지도 않았다. 창문 너머 주르르 줄 서 있는 수많은 자동차와 버스를 보며 기함할 뻔했다. 잠에서 확 깼다. 대체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해 보려 했지만 주변 필리핀인들은 동요가 없어 보였다. 평온했다. 웃으며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음식을 꺼내 먹었다. 그러자 우리는 우리가 배고프기까지 하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음식을 챙겨 올 생각은 못했다. 아침이면 당연히 도착해 있을 줄 알았다고요.
시간은 계속 흘렀다. 몇몇은 지루한지 버스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 우리는 그럴 힘이 없었다. 배고팠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는 굶주린 우리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저 배를 부여잡고 곧 도착할 거야를 되뇌어 봤다. 하지만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려 해도 버스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차라리 잠에 들어서 배고픔을, 이 속절없는 기다림을 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여기는 휴게소도 없는 걸까. 절망적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 든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게 아니던가. 휴게소였다. 드디어 무언가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식당같이 보이는 데로 뛰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시장이 반찬이었다. 옛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배는 반드시 든든히 채워놔야 했다.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으니 언제 다시 먹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사실 그 어떤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관광하려던 도시에 도착한 건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8시쯤이었다. 무려 22시간을 버스에 있었다. 분명 아침 9시쯤 도착할 거라고 했는데, 누가 우리에게 사기를 친 건지, 무엇을 원망해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를 기다리던 한국인의 환대가 반가울 뿐이었다. 우린 저녁을 해결하러 식당을 찾아다녔다. 근처에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연 식당이 별로 없어서 선택권이 많지는 않았다. 다행히 영업 중인 파스타집을 발견해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난 아직도 그때만큼 맛있는 파스타를 먹어본 적이 없다. 맛있었다. 굉장히. 무척. 아주. 엄청. 매우. 너무. 내가 아는 모든 부사를 쓰고 싶다. 맛있어서 맘 속으로 울었다.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다가도, 가끔 그때 그 버스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1차선 비포장도로 위, 엄청난 교통체증 중심에 놓인 것만 같은 기분. 목적지에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고, 사실 목적지 자체도 잘 알지 못하는. 모든 게 미지수인. 배는 고프고 힘도 든다. 그런데 같은 처지로 보이는 사람들은 즐겁게 먹고 떠들 때. 나만 모든 게 낯선 외국인인 것 같을 때. 혼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는 것 같을 때. 그러면 나만, 또 나만 힘든 것 같아 괜히 속으로 하릴없이 투정을 부리게 된다.
그렇게 불만을 가득 안았다가도 매 번 맘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여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덕분이다. 어차피 여행은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까, 예상치 못한 일에 부딪치는 건 너무 당연하다. 그러려고 여행을 하는 거 아니겠는가. 좀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어쩌면 22시간 버스에 있었던 덕에, 휴게소에서의 음식도 도착한 후 파스타도 눈물 나게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거니까.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관광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한국인이 너무 반가울 수 있었던 거니까.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예상치 못했고 상당히 힘들기까지 한 22시간 자체가 내게 꽤 인상적인 추억으로 남았다는 건 위로가 될까. 여전히 틈만 나면 친구와 난 그때를 입에 올린다. 필리핀을 추억할 때마다 우리가 떠드는 건 관광보다는, 버스에서의 시간이다. 회상할 때마다 유쾌하다. 낄낄거리게 된다. 기억과 경험이 꽤 다르다는 게 어떨 때는 큰 힘이 된다. '그때 진짜 힘들었어. 근데 또 생각해 보면 즐겁지 않았냐.'
어쩌면 난 지금도 여행 중인가 보다. 삶이 자주 녹록지 않고 여러 변수가 날 당황케 하는 걸 보면. 일상의 루틴은 너무나 쉽게 깨진다. 날 귀찮게 한다. 가끔은 괴롭기까지 할 정도로. 그럴 때마다 마음가짐을 바꿔본다. 난 여행 중이다! 난 여행을 왔다! 그것도 운 좋게 이곳으로. 애초에 여행지에 살고 있는 친구가 마침 여행 계획을 다 짜놨어서 가능한 일이었다며. 그 덕에 버스까진 별 노력 없이 탔으니 버스에서의 시간엔 관대해지자고. 이 정도 어려운 일쯤은 너그럽게 맞아주자고. 퉁 치자고.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일에 처했는지는 모르지만, 굳이 원인을 찾아내서 탓하지도 않겠다고. 어떻게 여차 저차 넘기면 언젠가는 낄낄대며 입에 올릴 수도 있지 않겠어.
'그때 진짜 힘들었어. 근데 또 생각해 보면 즐겁지 않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