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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elite Jul 30. 2015

왜 행성이 맞고 혹성은 틀리나?

용어 교정이 잘 된 사례

'혹성 탈출'(Planet of the Apes, 1968)이라는 영화를 아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1968년 원작이 충격적인 반전으로 워낙 유명해서, TV시리즈가 추가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여러 가지 리메이크(remake) 버전이 만들어지다가 최근에는 프리퀄(prequel) 시리즈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 제목에는 혹성(惑星)이라고 지금은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혹성은 지금 쓰는 용어로 행성(行星, planet)이라는 의미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행성 대신에 혹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거든. 왜냐구?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식으로 교육받은 영향 -_-; 일본에서는 행성 대신 혹성이라고 하기 때문에...

1968년 원작 '혹성 탈출' 영화의 포스터



행성


행성이 뭘까 1편에서 자세히 설명했던 내용 중에서 이 글에 필요한 부분을 요약해 보자.


• 고대 사람들은 항성과 별자리 사이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별을 행성이라고 했음.

• 고대인도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는 행성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5개를 알고 있었음.

• 그런데, 원인은 다르지만 태양도 역시 별자리 사이를 규칙적으로 움직임.

• 고대 세계에서 일찍부터 천문학이 발달했던 바빌로니아에서는 5행성+태양+달을 모두 묶어 7행성으로 보았고, 이 전통이 그대로 유럽의 현대 천문학까지 이어짐.

• 중국 문화권에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보아 5개의 행성과 태양+달을 따로 구분했음.


행성을 뜻하는 영어 Planet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Wandering Star', 즉 별자리 사이를 방랑하는 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고, 유럽 각국에서도 비슷한 말을 행성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어에서도 똑같이 Planet이고, 프랑스어에서는 Planète,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에서는 Planeta...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자어를 사용하는 중국문화권에서는 Planet에 대응하는 용어로 대부분 行星을 사용한다. 별자리 사이를 움직이는(行) 별이라는 뜻이라서 Planet과 의미가 유사하고, 음양오'행'이라며 행성 이름과 맞추던 관습과도 통한다.



일본의 혹성


그런데, 같은 한자문화권인데도 일본 만 유독 惑星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왜 일본만 유독 그런지, 아래 일본어 위키의 惑星 항목 등을 번역기 돌려가면서(이야기했듯이 내가 외국어 쥐약 -_-;) 확인해 봤더니,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있었다.

https://ja.wikipedia.org/wiki/惑星

http://www.geocities.jp/planetnekonta2/hanasi/yuusei/yuusei.html


중세 시대 일본에서는 행성 대신 遊星(유성, 별자리 사이를 노니는 별)이라는 말을 주로 썼고, 중국에서 유입된 과학서를 번역할 때나 行星이란 용어를 가끔씩 사용했다고 한다. 遊星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왜 사용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에 비해 惑星 혹성이라는 용어는 그 기원이 명확한데, 1790년대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소개하던 번역자가 처음 사용한 말로, 일종의 당대 신조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어에서 '惑'이 갈팡질팡하다/오락가락하다 의미가 있었고, 별자리 사이를 갈팡질팡 위치를 옮기는 별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단다.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로,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외교적으로 쇄국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국가 중에서 네덜란드(일본식 한자로 화란 和蘭)와는 교역하였고, 교역 과정에서 유럽의 과학 기술과 서적도 수입하였다. 이렇게 네덜란드를 통해 유입된 유럽 학문에서 파생된 일본의 여러 학문을 통칭해서 난학(蘭学)이라고 했다. 1700년대 후반에 본격화된 난학에서는 네덜란드 학술서와 학술 용어를 일본어로 번역하기에 힘썼으며, 이런 번역 과정에서 새로운 일본식 학술 용어를 만들어내는 일이 흔했다. '혹성'도 네덜란드를 통해 수입된 유럽 천문학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용어 중 하나였다.

    이 후, 일본에서는 행성을 가리키는 말로 遊星과 惑星을 혼용해서 사용하다가, 1800년대 후반에 학술 표준 용어로는 惑星을 사용하기로 정했다. 그 후로 遊星은 사용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지만, 1900년대 말까지 일부 학자들도 사용했다고 한다.


세간에서는 일본어로 行星과 恒星(항성)의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을 줄이기 위해 行星 대신 惑星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설명도 널리 퍼져있다. 한 때 나도 그런 설명을 그대로 믿기도 했는데 -_-;

    일본 고어(古語)나 사투리까지는 모르겠지만 현대 일본어 표준 발음을 기준으로 할 때, 行星과 恒星이 혼동을 유발할 정도로 비슷하긴 하다. 일본에서 원래 행성을 의미했던 遊星의 경우, 한국에서는 流星(유성, 한/일 모두 별똥별)과 발음이 같고, 일본에서도 遊星과 流星의 발음이 상당히 비슷하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중국식 行星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니 恒星과 발음이 비슷하고, 일본 전통에 따라 遊星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니 流星과 발음이 비슷해서 신조어를 만들었다는 설명이 가능은 하다. 다만, 현재까지 파악된 것으로는 발음 때문이라는 설명은 그냥 떠도는 이야기일 뿐 근거 자료가 없다. 때문에, 발음 때문이라는 설명은 현재로서는 근거 부족하게 시중에 유포되는 여러 설명 중 하나 정도로 볼 수 밖에 없다.



한국어에서 문제


우리나라는 한자 惑을 갈팡질팡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같은 영어 문화권이라도 나라마다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사용하듯이, 같은 한자 문화권에서 같은 한자를 사용하더라도 나라마다 의미와 용례를 조금씩 다르게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행성'이라는 용어를 전통적으로 꾸준히 사용해왔고, 음양오행 등 다른 관습과도 연결해 왔다는 점도 일본과 상황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의미에 닿지 않는 '혹성'을 사용할 필요가 없고, 전통(중국에서 유래한)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행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 시대에 교육받거나 그에 영향 받은 사람들, 혹은 무분별하게 일본 문화를 수입하던 사람들이 우리 말에는 맞지 않는 일본식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런 잘못된 용어 사용 관행을 교정하기 위해서 혹성 대신 행성을 사용하자는 학계 등의 움직임이 생겼고, 요새는 행성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기에 이렀다.

    살펴보면,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문화를 무분별하게 수입하는 일이 잦았다. 예를 들어, 행성의 일본식 표현인 遊星을 우리 말로 그냥 유성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흔했고, 그러다가 '遊星仮面'이라는 당대 유명 만화를 '유성가면'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우리 말로 유성이라면 流星 즉 별똥별이라 원래 제목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버리는데... 진짜 완전 무분별하게 잘못 번역했던 셈 -_-;


그럼 영화 '혹성 탈출'은 어떻게 된 거냐? 문제의 발단은, 1960~70년대에는 아무 생각 없이 -_-; 일본식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 관행으로 영화 제목을 '혹성 탈출'로 번역해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이 영화를 TV 방영할 때는, 이를 교정하려고 일부러 '행성 탈출'이라고 제목을 고쳐보기도 했단다. 하지만, 이미 1968년 원작에 대한 번역 제목이 우리나라에서 너무 유명했기 때문에, 다 늦게 '행성 탈출'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혹성 탈출'이라는 영화 제목 만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글쓴이 의견을 적으면... 처음부터 제대로 번역한 제목을 사용하는 것이 제일 나았겠지만, 아니었다면 이미 유명해진 영화 제목 정도는 인정할 수도 있다고 본다.



무조건 일본 배척?


혹시 이 글이 일본식 용어는 무조건 거부하자는 뜻으로 비칠 수도 있어서 추가로 적어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문제니까... 결론을 이야기하면, 무조건 일본식 표현을 배격하자는 의미가 아니고, 잘 맞는 우리 말 표현이 있는데도 우리말과 맞지 않는 일본식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자는 뜻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등 다른 한자 문화권에서도 일본이 유럽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든 일본식 한자 용어를 숱하게 사용하고 있다. 행성과 관련된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는 월요일-화-수-목-금-토-일요일 하는 요일 명칭을 일본과 똑 같이 사용하고 있다. 요일(曜日)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에서 주로 사용했었다. 일본에서는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6요일 관습을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겼었는데, 서양식 1주 7일 관습을 수입하면서 7요일로 번역했던 것이다.

    그런데, 1주 7일이 행성과 무슨 관계냐고? 다른 글에서 자세히 적기로 하고 대략 1주일과 요일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 적으면... 1주일=7일 관습과 요일 명칭은 고대 지중해 문화권(고대 이집트-서아시아-그리스 문화권을 아우르는 문화권)에서 7일 주기로 7행성 이름을 붙이던 관습에서 유래했다. 이것이 인도 등을 거쳐 중국에도 유래했지만, 중국 문화권에서는 실제 사용하지는 않고 "그런 게 있다더라" 수준에서 그쳤었다.

    일본도 과거에는 1주일 관습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나, 유럽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일본의 민간 학자나 상인 등이 유럽의 1주일 7일 주기를 중국-일본 문화에 맞춰 번역한 일-월-화-수-목-금-토요일을 사용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1860년대 후반부터 이뤄진 메이지 유신 때 중국식 음력 대신 유럽의 그레고리력을 공식 달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1주일 주기와 요일 이름도 이 때부터 국가 공식 표준으로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영향력 아래 시행한 1895년 갑오 개혁 때 그레고리력 사용을 공식화했고, 이 때 1주일 제도와 일본식 요일 명칭을 도입해서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일본식 요일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고대 유럽에서 행성 이름에 맞춰 요일 이름 정하던 원리를 중국 문화의 음양오행에 맞게 잘 번역한 명칭이기 때문에 큰 거부감이 없다.


세계 어느 나라나 문화가 발달한 다른 나라에서 문화적 양식과 언어 표현을 수입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동아시아의 거대 제국 중국이 독자적이고 자존심 강한 문화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중국도 필요하면 유럽이나 일본 등에서 문화를 수입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서유럽 각국도 150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를 열면서 문화적 자존심을 높였으나, 그들도 당대 발달했던 중국이나 인도로부터 문화 수입에 애썼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미국도 발전 초기에는 유럽으로부터 문화 수입에 열을 올렸고, 지금도 세계 각지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계속 수입해서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인도와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 문화와 중국에서 전래된 유교/도교 문화가 전통 문화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고, 근대에는 일본에서 전래된 문화와 일본을 통해서 전래된 유럽 문화, 현대에는 유럽에서 직접 유입된 문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 중 어느 하나의 외국 문화 만 잘못되었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하지만, 일상  생활뿐 아니라 학문과 기술 영역에도 사용하는 표준 용어는 선정과 사용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행성'이라는 한국의 언어와 문화, 전통에 일관성 있는 용어가 이미 존재하는데도, 우리 말과 맞지 않는 '혹성'이라는 외국식(! 일본이라서 문제는 아니라는 뜻) 용어를 사용해서, 혼란을 유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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