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글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올해 6월, <월간에세이> 잡지에 실린 제 글 전문을 공유합니다. 브런치 독자님들에게도 공감이 되는 내용이 되기를 바라보아요.
“엄마 잘 잤어? 사랑해”
햇살이 창에 어른 거리는 일요일 아침, 여섯 살 아이의 달콤한 사랑고백에 눈을 뜬다.
“응, 우리 딸도 잘 잤지? 엄마가 사랑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내뱉는 사랑 고백에 아이도 두 팔을 힘껏 뻗어 자신의 사랑을 그려 보인다.
자신의 것은 엄마의 그것보다 더 크다며 발끝까지 세우며 몸을 부풀리는 아이. 눈앞에서 애를 태우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아이는 이내 무릎에 와 앉으며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띈다.
‘어쩜 이럴까? 내가 이토록 완전하고 충만한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내리사랑이라고는 하지만 때로 아이는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부모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티 없이 맑고 의심 없이 완전한 사랑. 실망할 틈 없이, 일말의 계산도 없이 언제나 해맑게 돌아오는 사랑이었다. 살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 찾아올 때면 현실감을 잃고는 했는데 끊임없이 사랑을 뿜어내는 아이를 바라볼 때면 꼭 그러했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 나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느라 꽤 오랜 시간 동안 휘청였다. 아이의 출생과 동시에 나도 엄마로 태어났기에 모든 것이 낯설었던 때였다. 내가 아닌 ‘우리’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직업도 일상도 내려놓은 채 처음으로 누군가의 세상에서 ‘전부’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서있는 곳에 따라 ‘전부’인 존재는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도 했다. 언제나 내 것이었던 익숙한 세상이 매정하게 등을 돌린 채 혼자서만 달려나가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아무도 귀띔해 주지 않았던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이밀고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었다.
모든 것이 버거울 땐 시간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보 엄마의 시간은 참으로 요상하게 흘렀다. 하루는 몹시도 더디 갔지만 달력은 금세 넘어갔고 일 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다행인 건 그 사이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고 나의 품도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꼭 붙어 한 몸처럼 버둥거리던 둘 사이에도 시간이 지나간 자리만큼의 여유가 생겨났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이의 시간이 달음질치기 시작했다고 느낀 것은. 아이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모래시계가 놓인 것 같았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고운 모래들은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아래로 쏟아지다 결국 그 시간을 다하곤 하는데… 아이가 뿜어내는 완전한 사랑 또한 그 끝에 다다라 멈추게 되는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품 안의 아이는 곧 소녀가 되고 독립적인 인격을 갖추게 될 테니까. 꼭 엄마만큼의 세상 안에서 자라던 아이는 그보다 더 큰 세상을 궁금해하며 좀 더 자주 바깥을 내다보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이의 세상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내가 지금 이 순간을 몹시도 그리워 할거라는 생각에 쓸쓸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이가 스스로 고른 옷을 입고 신나게 등원을 할 때, 홀로 샤워부스에 들어가 고사리 손으로 만든 거품을 내보이며 웃어 보이는 순간에, 엄마가 읽어주곤 했던 책을 들고 와 ‘오늘은 내가 읽어 줄게.’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한다.
‘금방이라도 달음질칠 것 같은 너의 시간을 꼭 붙들고 싶다고, 지금 이 순간의 너를 눈에 담아두겠다고.’
유치원 하원 차에서 내린 아이가 말갛게 웃으며 나를 향해 달려온다. 그 모습에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 깊숙한 곳에 찔러 넣는다. 두 팔을 벌려 아이를 꼭 안으며 눈을 맞춘다. 그렇게 아직 내 품 안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너와의 순간들을 소중히 붙잡아 본다. 언젠가 세상 구경에 빠져 잠시 나의 손을 놓더라도 그 추억을 붙들고 어서 돌아와 서로 부둥켜안을 수 있도록. 지금 눈앞에서 생글거리며 종알 종알 이야기하고 있는 너의 손을 꼭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