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 편씩 에세이 글을 작성해 올리던 지난해, 어느 날 인가부터 내 브런치에는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라는 배지가 달렸다. 구독자가 많은 것도, 글을 써온 세월이 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꾸준히 글을 올리던 때였다. 이후 나의 글쓰기 생활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 열 글자가 주는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계속 쓰고 싶은 마음, 지치지 않고 계속 쓸 수 있는 용기 같은 것이 피어났다.
그렇게 한동안 쏟아져 나오는 내면의 이야기들을 활자로 적어 내려가면서 나의 브런치는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풍성해졌다. 하지만 늘 그렇듯 부스터를 달고 내달리던 나의 글쓰기 생활에도 어김없이 소강기가 찾아오곤 했다. 긴 연휴를 맞아 잠시 집을 떠날 때면 더욱 그러했다.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즐거움에 매료되고 나면 한동안은 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브런치 작가님께 새로운 제안이 도착했습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낯선 제목의 메일을 클릭했다. 작가 소개란에 적어둔 이메일을 통해 들어온 '원고 청탁 메일'이었다. '원고 청탁이라니!' 갑자기 가슴이 웅장해졌다. 난생처음 받아 본 글 의뢰였다. 나는 의식적으로 길게 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메일을 읽어 내려갔다.
'청탁', '고료', '마감일'...
타인의 것처럼 느껴졌던 단어들이 눈앞에 펼쳐지자, 그간 축 늘어져있던 '글 쓰는 자아'에기분 좋은 긴장감 같은 것이 더해졌다. 느슨해진 마음이 팽팽해지며 생기있게 살아났다. 한껏 격양된 마음을 애써 누른채 나는 최대한 담백한 어조로 청탁 수락 메일을 보냈다.
원고 마감일까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많을 때는 하루에도 두, 세 편의 글을 쓰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녹록지 않았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 줄을 겨우 썼다 지워내고, 힘겹게 한 문단을 썼다 통으로 잘라냈다.
'이런 내용으로 써볼까?'
'아니야, 매체에 처음으로 내보이는 글인데... 좀 더 의미 있는 주제로 써보고 싶어.'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 어떤 게 있을까?'
차고 넘치는 시간 앞에서도 나는 자꾸만 초조해졌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뿐, 쓰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기를 십여 일, 가족 여행을 하루 앞두고서야 나는 자리에 앉아 '일단 쓰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과 함게 떠나는 여행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긴 여정 중에는 쓰기는커녕 혼자만의 시간조차 갖기 어려울 터였다.
생각을 멈추고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복잡하게 엉켜 휘몰아치던 상념들이 고요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가벼운 이야기들은 휘발되고 단단한 이야기들이 글로 남았다. 그렇게 '자체적인' 마감일에 맞춰 글의 초안이 완성되었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여행 짐을 꾸릴 수 있었다.
손안에 쏙 들어오도록 빽빽하게 출력한 글의 초안은 여행 내내 틈틈이 읽히며 다듬어졌다. 멀리 떠났다 돌아온 날 밤, 아이들을 재우고 가장 먼저 한 일 또한 책상으로 달려가 원고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퇴고를 끝내고 송고를 하던 날, 나는 또다시 긴 호흡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거기엔 태어나 처음으로 의뢰받은 글을 무사히 완성했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이 반반씩 섞여있었다.
그렇게 나의 첫 청탁 원고는 내 손을 떠났다.
늦 봄 혹은 여름에 지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낼 나의 글은 어떤 폰트를 입고 어떤 지면에 얼굴을 내밀게 될까? 보이는 모습이야 어떻든, 부디 글에 담은 나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올 다음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사부작사부작 써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