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헌 Sep 10. 2024

단편소설 - 고쿤캅

김주헌 단편소설집_1

“나이뜨 미뜨 포(for) 유”


고쿤캅이 나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명백한 동남아시아인의 부족한 영어발음이었다. 나 역시 아시아인이었지만, 서로가 듣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굽어진 영어였다. 게스트 하우스 소파에 앉아있던 그는 나를 오랜 친구를 본 것처럼 대했다. 나는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의 손은 어두운 갈색이 많이 섞였고, 나의 손은 밝은 노란색이 많이 섞여있는 피부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아시아인 치고도 하얗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반면 그는 동남아인 치고도 매우 짙은 색의 피부였다.

태국의 길거리는 뜨거운 습기들로 땀이 마르지 않았고, 은은한 하수구 냄새가 은연하게 깔려있었다. 동남아 특유의 길거리 호객, 택시 기사와의 말싸움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숙소였다. 수많은 후기를 보며 고민하고 잡은 게스트 하우스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고쿤캅은 게스트하우스에서 관광보조를 한다고 했다. 이 시기만 되면 한, 중, 일 손님들이 제일 많이 온다고, 그중에서 한국 사람들이 제일 ”친절”하다고, 그래서 공짜로 자기 나라 관광을 시켜준다고 말했다. 나는 게스트하우스에 오는 동안에도 수많은 호객과 택시기사들과의 실랑이로 지쳐있었기에, 계속해서 뿌리(free)를 강조하는 그를 굳이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별다른 대꾸가 없어도(혹은 대놓고 무시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태국은 겨울에 많이 오는데 여름에 오는 사람은 드물다고, 원래 성수기인 겨울에만 추첨을 통해 공짜로 관광가이드를 해주는데, 너는 특별히 지금 공짜로 해주겠다고. 일방적으로 쉴 새 없이 나를 향해 떠들어댔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정식 가이드가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의 고국에 놀러 온 관광객이 좋은, 그래서 좋은 기억을 심어주고 싶어 참견하는, 또래의 “사람”이었다.

나는 좁은 1층 침대에 짐을 풀며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날 게스트 하우스의 손님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그는 내 뒷자리 빈 침대에 앉아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듣기 어려운 꼬부랑 영어들이 속사포로 지나갔지만, 나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첫날부터 피곤해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멈출 수 없었다.


“헤이 왓츄어 네임”

 

나는 말을 멈출 줄 모르는 그에게 이름을 물어봤다. 그는 신나게 떠들어 대던 꼬부랑 영어를 멈추고 말했다.


“고쿤캅, 마이네임 이즈…’고쿤캅’”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감사합니다”라고 소개했다. 

본명이 있어보였지만 별달리 묻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에 대해 깊게 파고 들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그의 말을 끊고 잠시라도 조용해진 상황으로 만족했다.


                                                                         



나는 얼마 전 일을 그만두고 도서관에 다니며 갈만한 여행지를 찾아다녔다. 인터넷에는 정보가 너무 많아 고르기 쉽지 않았다. 수백, 수천 개의 도시와 관광지가 쏟아져 나왔고 그들 중 뭐가 진짜 알짜 정보인지, 광고성 가짜 정보일지 분류할 수 없었다. 나는 곧 동네 오래된 도서관에 가 여행 코너의 오래된 책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3년 이상 지나 최신 가이드북으로는 이용가치가 낮아 보이는 책들이었다.


“대부분은 겨울에 가는 추세다. 태국의 여름은 최고기온 45도까지 올라가며, 우기 기간이 겹쳐 소나기 ‘스콜’로 인해 돌아다니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나는 “태국(Thailand)” 가이드북의 맨 앞 문장에 이끌려 곧바로 태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한국은 제일 더운 7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한국보다 더욱 끓는 곳을 찾아 떠나는 나를 보며 주변사람들은 미친놈이라고 혀를 찼지만, 나는 나 자신을 낯설게 해야 하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여행 중에 길을 잃어 패닉에 빠지고,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본능적으로 뛰어야 하며, 지나친 더위로 인해 목이 타고 배를 굶주려 오직 “음식”하나만을 찾아야 하는, 그런 본능적인 욕구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1년 하고 며칠 넘게 다닌 회사의 퇴직금은 한 달 월급의 몇만 원이 포함된 돈이었다. 회사사람들은 나의 퇴사가 정해지자,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서 마주칠 때도 나를 “곧 나갈 사람 취급”를 하기 시작했다. 그곳이 곧 사실이기에 나는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었다. 한국은 자원하나 나지 않는 국가였고, 대부분이 사람으로 수수료를 떼먹어야 하는 장사가 천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만큼 “갈려”야했다. 야근이 주 업무과정에 포함되었고 회사에서 아침과 저녁을 먹는 날이 더 많았다. 오히려 정시 퇴근 이후 집에 돌아오면 공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2천1백만 원.


급여 계좌를 열어 1년 동안 모은 돈을 바라본다. 별달리 악착같이 모은 돈은 아니었다. 원체 돈 쓰는 버릇이 없었고, 돈 또한 시간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듯했다. 나의 지출 중 가장 크게 빠져나가는 건 월세였다. 강남에 위치한 회사였기에, 직장 주변 자취방은 쳐다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한 번을 갈아타고), 한 시간 정도 걸리는 7호선 서쪽 방향에 자취방을 구해야 했다. 보증금 500에 월세 45만 원짜리 구축 원룸이었다. 그 자취방은 싱크대, 주방, 침대가 어지럽게 섞여있는 공간이었다. 침대에는 싱크대 하수구 냄새가 깔려있었고 화장실에서는 잊을만하면 주방 좁쌀벌레가 나왔다. 가장 버티기 힘든 것은 한여름의 에어컨과 한겨울의 난방비를 아끼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부록같이 붙어있던 자취방은 여름에는 눅눅하게 뜨거웠고 겨울에는 건조하게 추웠다. 그럴 때면 조그마한 유리 구 모형에다 여름의 따듯하고 습한 공기를 모아 겨울에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싶었다. 마치 눅눅하고 끈적거리는 바셀린을 바르듯. 혹은 겨울의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를 모아다가 여름에 토너 바르듯 사용하고 싶었다. 그곳은 항상 아쉬워하며 살아야 했다. 과거의 따듯함과, 과거의 차가움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는 공간이었다.

때로는 식비를 줄이기 위해 점심은 도시락을 싸볼까 했지만 출퇴근길이 녹록지 않아 포기했다. 한 뼘의 공간도 없이 빈틈없이 메꿔진 지하철에서 삭은 김치냄새와 비릿한 멸치 볶음 냄새를 퍼트릴 순 없었다. 대신 편의점 도시락을 할인받아먹거나, 회사 탕비실에 작은 컵라면을 먹곤 했다. 회사에서 먹는 밥은 언제나 까끌거렸고, 겨우 목구멍을 넘긴 밥은 몸안 공허한 구멍에 얹힌 듯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항상 속에 천공이 있는 듯 허기가 느껴졌지만, 막상 밥을 먹으면 속이 좋지 않아 반그릇 이상 먹지 못했다. 회사에서 연차가 쌓여갈수록 나의 볼살은 점점 파여갔다. 보이지 않았던 광대가 튀어나왔고 눈 주변이 푹 꺼져 거 무스래 해졌다. 나는 쉴 새 없이 채하고, 말라갔다.

“너도 진짜 한국인 다됐구나” 오랜만에 나를 보는 주변 지인들은 말했다.

그래서 내가 퇴사 이후 가장 크게 벌린 일은 바로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사회의 규율과 규칙의 호들갑에서 멀어지는 것, 그것이 나의 최종 목표였다. 비록 저렴한 항공기를 위해 여행 전날 인천공항에서 노숙을 했고, 비행기 안에서 3살 배기 우는 아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가족들을 보면서도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비행기가 날수록, 나의 삶에서 (혹은 체함과 허기에서) 더욱 멀어지기에. 그 “멀어짐”이라는 목표는 태국에서도 여전해야 했다. 그 “고쿤캅”만 아니었다면.



                                                                                 


고쿤캅은 이곳저곳 친구가 많아 보였다. 그와 길거리를 다닐 때마다 사람들은 “고쿤캅”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신기하게 “감사”해 하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길거리에서 만난 시장 아줌마를 자신의 이모라고 소개했고, 곧 죽어가는 소리가 나는 오토바이를 탄 아저씨는 자신의 예전 옆집 이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람과 친구, 가족이었고 그와 거리를 다닐 때면 자연스레 주변의 관심이 주목되었다. 나에게 감사해하는 그들에게 나는 웃어야만 했다. 그것은 나의 천성적인 본능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나는 곧 “고쿤캅”에게 약간의 귀찮은 비음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고쿤캅, 아 윌 워크 어라운드 바이 마이셀프, 땡큐소머치”

“아 오케이오케이, 아이엠 뿌리,뿌리(free), 돈워리, 유알 마이 베스트 프렌드”


어느새 나는 그의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혼자 가볼 때가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뿌리뿌리” 거리며 나를 뛰 쫒았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길거리 택시를 잡고자 했다. 그러자 그는 두 손바닥을 나에게 펼치며 “콤 따움”(calm dawn)”이라고 말하며 그리고 곧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신의 친한 친구 중 택시기사가 있고, 나를 목적지까지 싼값에 태워다 주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말했던 택시비는 3년이 지난 가이드북의 나온 요금에 비해 절반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나는 그 제안을 쉽사리 거절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돈을 못쓰던 버릇은 태국에서도 고스란히 유지되었다. 결국 나는 고쿤캅과 첫날 여행지를 같이 돌아다니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고쿤캅의 친구는 정식 택시기사가 아닌 오래된 중고차 자가용으로 나를 태워준 것이었다

고쿤캅은 오래된 중고차에 내리며 자신의 가짜 택시기사 친구에게 “고쿤캅”이라고 말했다. 차가 심하게 흔들리고 비좁아 가는 내내 멀미를 해야 했지만, 나는 또 역시 웃음을 보여야만 했다. 그 또한 나에게 고쿤캅이라고 말했기에. 고쿤캅은 지인의 가짜 택시에 내리고 나서도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며 관광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황금으로 된 누워있는 불상 앞에서는 “비 꽈이엇” 이라며 주변 다른 관광객들을 윽박 줬고, 신성한 연못이라고 불리던 호수에서는 다리 위가 사진이 제일 잘 나오는 스팟이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나를 부르곤 했다. 항상 그런 식이 었다. 그와 함께 다니면 어디서든지 이목이 끌렸다. 모두가 우리를 쳐다봤고 힐끔거렸다. 나는 그럴 때마다 또다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삼촌과의 통화가 끝난 이후 매번 그런 말을 했다. ‘하이고 이놈아…’ 엄마의 한숨에는 항상 깊은 응어리가 있었다. 그 응어리는 아주 조금의 혐오, 약간의 답답함, 그리고 대다수의 동정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어두운 구체였다. 그 구체는 조금씩 분열해 가는 암세포처럼 엄마의 마음속에서 커져갔다. 그리고 구체는 우리 엄마뿐 아니라 할머니, 작은 삼촌,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빠에게도 존재하는 듯했다. 아빠는 항상 명절날 외갓집에 갈 때마다 “너네 삼촌이…” 라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너네 삼촌이 그 기업만 여전히 다니고 있었어도… 지금 연봉이 억은 넘을 거다.”

엄마의 첫 번째 동생인 삼촌은 서울대를 나와 글로벌 1등 기업에 취업한 수재 중에 수재였다. 온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시선을 받는 그런 사람. 하지만 삼촌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가면을 쓰지 못했다. 1류 기업에 취업한 뒤 적응하지 못했고, 이곳저곳 이직을 하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결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모아놓은 돈을 지인들의 혀에 발린 달콤한 소리에 이곳저곳 투자를 하다 전 재산을 날리곤 했고, 그 재산에는 타인의 재산 또한 엮여 있어 외가 쪽 식구들이 곤욕을 치러야 할 때도 있었다. 머리는 비상했기에 이것저것 손을 벌렸지만 좋게 마무리된 게 없었고, 결국 삼촌은 쉰 살이 넘고도 할머니집에 얹혀살고 있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렸을 적 삼촌 회사 계열 백화점이나 놀이공원, 동물원을 공짜로 돌아다니던 우리는 이제 삼촌을 모두가 한없이 걱정하고, 염려해야 되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엄마와 할머니는 항상 둘이 있을 때면 내가 안 보인다는 듯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개가 사회에 적응만 잘했어도… 애가 바보같이 사회성이 없어서 문제지… 애는 얼마나 착한데. 너 한번 생각해 봐라 개가 표정 찡그리며 화를 낸 적이 있나. 개는 항상 웃고 다니잖아 어떤 일이 있어도…”

내 기억 속에서 삼촌은 항상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밥을 먹기 전이면 그의 큰 턱이 기도하는 두 손에 얹혔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충만함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시옵소서”

삼촌의 기도가 끝나면 할머니, 엄마, 나는 눈을 감고 끝말을 따라 했다. (삼촌이) 감사합니다…(우리가)합니다. (삼촌이) 주시옵소서…(우리가) 옵소서. 나는 무엇을 감사해야 하고 무엇을 고마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아무 의미 없이 끝말만 따라 했다. 여전히 삼촌을 생각하면 여전히 나의 귀에는 그 소리만이 떠오른다.

“(삼촌) 감사합니다…(누군가) … 합니다. (삼촌) 고맙습니다…(누군가)… 습니다.”


                                                                                 



“파티 윌 스따뚜(start) 히얼, 어 베리 빅 파티!” 

나는 이곳에서 곧 파티가 열린다는 고쿤캅의 말을 국숫집에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국숫집은 조그마한 트럭에서 운영되는 야외 노상 국숫집이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조잡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손으로 그릇을 들고 국수를 먹어야 했다. 만약 경찰 단속이 뜨면 주인장은 그릇과 의자를 순식간에 뺏어 곧바로 트럭에 싣고 도망간다고 했다. 그러면 손님들은 입에 국수 몇 다발과 나무 젓가락만 손에 들린 채 길거리에 멍 한채 서 있어야 한다고, 그 모습이 참 재밌다고 고쿤캅은 말했다. 나 그 사실이 재미있었다. 그곳은 시끄럽고 복잡했으며, 이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는 확신을 주는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사연들 속에서 나는 조용히 물들어 갔다. 단 한 가지, “고쿤캅”과 함께라는 것이 껄끄러웠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는 누군가가 차로치고 간다고 하더라도, 사과하는 상대방에게 웃으며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사람이었다. 그의 웃음은 본능적이자 선천적이었다. 그것은 나와 같았지만 달랐다. 나의 웃음에는 항상 무겁고 어두운 구체가 수면 위로 둥둥 떠다녔다. 그 구체는 수면 위를 빙글빙글 좌우로 돌며 미끌거렸다.

나는 나와 다른 웃음을 가진 고쿤캅을 보며 약간의 짜증과 애잔함, 심지어는 약간의 혐오까지 느꼈다. 나는 그를 보며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내 자신을 자책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분명 그와 떨어져야 했다.

“왓 파티?” 나는 관심도 없으면서 물었다.

“서머 파티!, 잇뜨 베리 퍼니!”

나는 머리를 굴렸다. 그를 떨어트리고 “감사”와 멀어질 기회를 위해.

“고쿤캅, 아이원트 기브 유 어 기프트(gift)”

“노노, 아이엠뿌리, 뿌리 돈워리.”

그는 나의 선물을 거부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는 역시 거짓말을 못한다. 나는 이어서 말한다. 너에게 꼭 선물을 주고 싶다고, 너무 "감사"해서 주는 거라고, 절대 부담 가지지 말라고 속사포 영어로 밀어붙였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이 선물은 서프라이즈이기 때문에, 너 몰래 주고 싶어, 여기서 파티장에서 잠깐만 나를 기다리고 있어 고쿤캅. 내가 곧 빠르게 선물을 사 올게”


                                                                                 



나는 고쿤캅을 파티의 시작을 준비하는 넓은 공터에 세워두고 나왔다. 그곳은 여름파티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인파의 행렬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파도 같았다. 혹은 무리를 이루어 다니는 바다의 정어리떼 거나. 나는 우리를 지나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와 각자의 사연들을 견디며 그에게 말했다.


“유 머스트 스테이 히얼!, 아윌비백!”


고쿤캅은 얼떨떨한 웃음으로 나에게 답했다. 나는 곧바로 그 인파의 파도에 섞여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아마 나의 뒷모습을 5초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수많은 인파 속에 남겨두고 곧장 게스트 하우스로 향하는 택시를 잡았다. 그곳은 차와 행인들은 뒤죽박죽 섞여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없어졌고, 거리가 마비가 된 수준이었다. 나는 그 복잡함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빨간색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는 게스트하우스까지 고쿤캅의 친구가 받았던 요금의 3배를 불렀지만, 나는 아무런 흥정 없이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 안은 양옆 좌우로 지나가는 인파들 속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마치 싸구려 방음벽 안에 있는 듯, 주변 파티 시작의 흥겨움과 소란스러움이 먹먹하게 택시 안으로 들려왔다.


나갈 때 15분 걸렸던 거리가 돌아올 때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그것이 택시기사의 요금을 늘리기 위한 요행인지, 아니면 정말 사람이 많아서 길이 막혀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곧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 나밖에 없는 침대에 곧바로 몸을 눕혔다. 밖을 돌아다녀 끈적거리던 팔뚝이 이불에 그대로 달라붙어 싸구려 이불 재질이 피부로 생생히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반대편 침대를 바라보았다. 2층짜리 게스트 하우스 침대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오직 고쿤캅의 오래된 가방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아마 몇 시간 후에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올 것이다.


나는 그를 향해 말한다. 


‘길을 잃어버렸어. 미안해’.


그는 나를 향해 말한다.

  

“신이 당신을 지켜 준거야, 무사히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왔잖아” 


그리고 분명 끝에 “고쿤캅”을 붙이겠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약간의 곰팡 네가 섞인 오래된 옷장 냄새가 코에 다가온다. 지금 내 주변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롭다. 나는 수업을 도망친 학생처럼 알 수 없는 쾌감과 희열감,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곧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며 말한다.


“(내가) 감사합니다… (아마도 누군가) ..합니다. 

(내가) 고맙습니다….(아마도 누군가)…합니다”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밖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반팔티와 팬티, 바지가 몸에 완전 달라붙어 있었다. 어두워진 게스트하우스의 방에는 여전히 나 홀로 존재했다. 있어야 할 고쿤캅이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시계를 켜보니 밤 11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고쿤캅이 혹시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나’라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급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까의 통쾌함과 희열이 약간의 불안감으로 변해갔다.

나는 곧 방문을 열고 로비로 나왔다. 게스트하우스 1층 거실에서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모여 조용히 웅성대는 소리였다. 나는 곧장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은 티비 앞에 모여있었다. 서양 커플 2명과,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과 동아시아 투숙객 한 명이 티비앞에 모여있었다. 그들 중 고쿤캅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곧 그들에게 다가가,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티비를 바라보았다. 티비에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어떤 리포터가 노란색 헬멧을 쓰고 긴박하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곳은 아까 나와 고쿤캅이 있던 파티 장소였다. 나는 태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밑 자막을 쳐다보았다. 작게 쓰인 영어 자막에는 “a crushing accident” (압사사고)라고 적혀 있었다.

쿵쿵

내 귀에서는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압사사고가 일어난 그곳은, 내가 고쿤캅에게 기다리라고 했던 그 장소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곧바로 게스트하우스에서 택시를 타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수많은 구급대원들과 카메라를 든 기자, 술에 취한 인파들이 한 곳에 뒤섞여있었다. 그곳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사람이 많았으며,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분의 경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어떤 이들은 급하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열심히 찍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 누워 하얀 부직포가 다리부터 얼굴까지 덮여 있었다. 몇몇 인원들은 널따란 행사 천막을 사용해 누워있는 사람들을 옮기기도 했다. 나는 삶과 죽음이 명백히 정해져 있지 않은 경계선에서, 그러한 곳에서 “고쿤캅” 이름을 외치며 뛰어다녔다. 목이 터져라 “감사”를 찾기 위해 뛰었고, 외쳤다. 하지만 나의 “감사”에도 아무도 답변해주지 않았고 나는 텅 빈 진공에 소리치듯 귀의 먹먹함이 느껴졌다.

온몸이 땀으로 젖게 소리쳐도 소용이 없자 나는 무엇인가를 급하게 옮기는 구급대원을 잡고 말했다.


“아이엠 룩킹폴 고쿤... 섬원. 히 이즈 마이 프렌드. 어..암”


구급대원은 더듬거리는 나의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구석에 깔린 천막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급하게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천막은 피해자 신원을 조회하기 위해 거치된 임시 천막이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울고 있는 중년의 여성과 애타게 전화를 하고 있는 아저씨와 영문도 모른 채 홀로 앉아 있는 태국 꼬마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고쿤캅의 신원을 작성해야 했다.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고쿤캅” 세 글자 이름밖에 없었다. 그 마저도 가명일 확률이 높았지만, 나는 서류상 “KOKUNKAB”이라고 영어로 적어 제출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한없이 기다렸다.

나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무엇을 먹을 수도 없었다.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천막을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수십 개의 사진을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일렬로 걸고 있었다. 마치 졸업사진 같던 사진들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다. 나는 곧 해가 뜰 때쯤, 아래서 세 번째 줄에서 고쿤캅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쏨쑹”이었다.

나는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와 오늘까지였던 숙박 기간을 연장했다. 그리고 예약해 두었던 치앙마이 호텔과 투어들을 모두 취소했다. 게스트 하우스는 적막했다. 모든 관광객들이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듯했다. 나 또한 개인 메신저를 통해 주변 지인들이 나의 안부를 물어왔다. 나는 그들에게 ‘나는 괜찮아’라고 짧은 답장을 보냈다.

‘나는 괜찮아’ 

내 주변지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내뱉은 이 문자들을 보며,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막막해졌다. 고쿤캅은 정말 말 그대로 서있다가 죽었을까…그 인파들 속에서 나를 기다리며 죽어갔을까…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서있었다면…

CNN 등 다양한 해외 언론들이 사건을 보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찍은 압사 영상들이 인터넷에 퍼져나갔다. 전혀 어떠한 모자이크나 일말의 필터도 없이, 사람들이 사람들에 깔려 죽어있는 모습들이 은연하게 전 세계 사람들이 뇌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반대편 침대에 있는 고쿤캅의 가방을 열어보았다. 작고 오래된 메신저백안에는 수첩, 볼펜, 오래된 책이 보였다. 나는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그것들을 침대 위에 털어놓았다. 다양한 물품들이 침대 위를 통통거리며 튀어나왔다. 그중 가장 마지막에 떨어진 것은 “사진”이었다. 고쿤캅의 가족사진 같아 보였다. 족히 10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한 곳에서 웃고 있었다. 그중 고쿤캅은 맨 왼쪽 두 번째에서 한 아이를 앉고 웃고 있었다. 내가 게스트 하우스에서 그에게 한없이 받은, 그 웃음과 똑같았다.


                                                                                 



오래된 버스 내부는 매연냄새로 가득했다. 고쿤캅의 집은 한없이 동쪽으로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지독히 산골동네였다. 방콕에서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중간에 대중교통이 끊어진 곳은 택시를 타고 다음 동네로 넘어가야 했다. 게스트 하우스의 사장은 고쿤캅의 먼 친척 중 한 명이었고, 그는 나에게 고쿤캅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고쿤캅은 알고 보니 전 세계 전염병으로 인해 공장이 폐쇄되어 게스트 하우스에서 잠깐 일을 도와주는 중이었다고 했다.

고쿤캅의 동네는 순 이동시간만 16시간 정도 걸렸다. 마지막에는 기차의 종착역에서 택시를 타야 했는데, 아무도 그 산골동네에 가려고 하지 않아 하루치 택시비를 모두 준다고 개인적으로 흥정해야만 했다. 그 마저도 거친 산길 비포장도로가 나오자, 택시기사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고 걸어 올라가야 된다고 말했다. 그곳은 휴대폰조차 잘 터지지 않아 텅 빈 지도 위 GPS만 보고 길을 따라 올라갔다.

관리 안된 산길 곳곳에는 오래된 집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중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어떤 작은 남자아이는 나를 보며 숨었지만, 어떤 여자아이는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 나는 그 여자 아이에게 고쿤캅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수많은 사람들 중 이 아이들이 어떤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 여자아이는 사진을 보더니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고 더욱 깊은 산골로 나를 안내했다. 아이는 5~6살에 밖에 안 돼 보이는 것에 비해 훨씬 날렵했다.

곧 낮은 언덕에 세 개의 조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그 건물은 언덕에 높낮이가 달라 모두 각 별채로 있었다. 맨 아래 건물은 주방, 맨 윗 건물은 부모님과 어린아이들이, 중간건물은 창고 겸 삼촌, 이모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인 듯했다. 나는 맨 아래 있는 주방 건물에 다가갔다. 그 주방은 전기가 안 통하는지 바깥에 비해 너무 어두 었다. 그 안에서 한 여성이 무엇인가를 볶고 있었다. 자작자작 거리는 소리가 어두운 내부에서 들려왔다. 작은 키, 큰 엉덩이를 가진 다부진 체격의 여성이었다. 여성은 갑자기 찾아온 노란색 피부의 동양인에 놀란 듯했다. 주방 밖에서는 아이들이 나무뒤에 숨어 키득거리고 있었다. 중년 여성은 그 웃음소리가 거슬렸는지, 주방 밖 얼굴만 내민 채 아이들을 향해 무엇인가를 소리쳤다. 그러자 아이들은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숨어버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주방 안에서도 크게 울려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나는 그 여성에게 고쿤캅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맨 왼쪽 두 번째 고쿤캅을 가리키며 말했다.


“암어..프렌드. 히이즈 마이 베스트 프랜드(friend).” 


그리고 곧 그의 가방과 소지품들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나는 그들이 고쿤캅의 죽음을 들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짐을 받고는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고쿤캅”


                                                                                 



나는 또다시 16시간이 걸리는 루트를 통해 방콕으로 돌아와, 이전 예매한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당일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또다시 월세 45만 원짜리의 건조한 한기와, 눅눅한 뜨거움의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급하게 예약한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한 구석에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미세하게 내 몸 안에 있는 어두운 구체가 수면 위에 약간의 출렁거림이 느껴졌다. 마치 물고기가 낚시찌를 톡톡 건드리듯 약간의 진동과 떨림뿐이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커다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회색빛 구름이 하늘 전체를 덮고 있었다. 어떤 햇빛도 새지 않을 구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회색 구름 위, 찬란하게 펼쳐져 있을 하늘을 가늠해 봤다. 밑에서 보이지 않을, 검은 구름 위에는 찬란하게 햇빛이 펼쳐져 있는 그 하늘을. 마치 어둡고 더러운 구름을 하늘에 널어 햇빛에 말리듯, 누군가 억지로 검은 구름을 펼쳐놓은 듯한, 그런 하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막연히 그런 생각들을 하며 또 중얼거렸다.


(내가) 감사합니다…(누군가)… 합니다.

(내가 또) 고맙습니다…(누군가 또)… 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