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헌 단편소설집_3
이곳에 사인하시면 된다고, 젊은 간호사는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밴드가 덕지덕지 붙여 있었다. 그 손을 통해 안락사 동의서, 귀책사유, 반려견 사망 이후 절차 안내서 등등 다양한 서류들이 연주에게 다가왔다.
봄이는 최근 밥을 잘 먹지 못했다. 평생 먹은 사료가 딱딱한가 싶어 따듯한 물로 불려보아도, 그렇게 좋아하던 육포 간식을 코 앞에 두더라도, 그 아이는 먹지 않았다. 단순히 하루종일 눈을 감은채 잠만 자고 있었다. 가끔씩 닭가슴살을 푹 삶아 얇게 찢어줘야지만, 그제서야 입을 살짝씩 벌려 몸 안에 욱여넣을 뿐이었다. 그 행동이 4일 차를 넘어갔을 때, 아빠는 연주에게 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오라고 말했다.
동물병원 의사는 연주에게 다양한 말들을 꺼냈다. 노견, 노화, 신부전, 안락사 등등. 의사의 말투에는 다정함이 섞여있었지만 거침없었고 그 단어들은 차갑게 시리지만 어딘가 뜨거운 단어들이기도 했다. 연주는 어느새 진료실을 나가 간호사 앞에 앉아 다양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연주는 집에 돌아온 후, 봄이를 오래된 캔넬에서 풀어주었다. 봄이는 자연스레 아빠방에 있는 자신의 오래된 방석에 몸을 말았다. 그리고는 고작 40분가량의 병원진료가 고됐다는 마냥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연주는 아빠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봄이가 신부전에 걸려 고통스럽다는 말, 나이가 너무 많아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 불필요한 연명 치료보다는 안락사를 권유받은 말, 그래서 연주가 한 달 뒤 있을 안락사 진행에 동의를 하여 사인을 하고 온일 등등…
아빠는 토요일 점심이 지났음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아, 잔업이 있어 오후 늦게 들어오는 듯했다. 연주는 그 남은 시간을 신부전, 안락사 같은 단어들을 이쁘게 정리하는 데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주전, 아빠가 정년퇴임을 했다. 30명이 채 안 되는 조그마한 운송회사에서 아빠는 적어도 20년 이상 근무를 했다. 하청에 하청을 담당하는 회사에 반장까지 올라간 아빠는 회사에 대한 별다른 미련이나 아쉬움이 보이지는 않았다. 퇴직 당일, 점심을 먹고 이르게 퇴근한 아빠는 집에 들어와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곧바로 암막커튼을 치고 잠을 잤다.
아빠는 항상 감정을 읽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분명 그의 하루에도 다양한 일들이 있을 터였다. 사장에게 금일봉을 받는 기쁨이나 혹은 한참 어린 거래처 청년에게 아쉬운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그런 상황들. 하지만 집에 돌아온 아빠의 표정은 항상 동일했다. 아빠는 자신의 기쁨과 굴욕을 별달리 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오직 그의 하루 행적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빠의 걸음걸이뿐이었다. 그가 힘들 때면 발과 발의 사이에 긴 공백이 존재했다. 어쩔 때는 쓰윽, 쓰윽… 어쩔 때는 터벅, 터벅. 그의 발걸음에는 그날의 하루가 담겨있었고 항상 인생의 운율이 담겨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발소리로 20년을 버틴 아빠는 퇴직 후 “사장님”소리 듣는 자영업자가 되기에는 퇴직금이 상당히 아쉬운 모양이었다. 반면 그렇다고 28년 전 얻은 첫째 딸 하나, 26년 전 얻은 둘째 딸에게 효도받으며 노후를 보내기에는 자존심이 매우 쌨다. 물론 연주와 동생이 아빠를 모실 수 있을 만큼 사회에서 자리 잡은 것도 아니었기에 연주는 아빠의 그 자존심을 굳이 막지 않았다. 그렇게 아빠는 자식의 손 벌림 없이 곧바로 정년 이후 직장을 구했다. 아빠의 새로운 직장은 아파트 경비원이었다.
그곳은 아주 오래된 아파트였다. 한창 80~90년대 사람들이 각기 다양한 이유들로 서울로 몰리고, 그 수요를 맞추기 위해 뚝딱 지어 올려진, 1기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도미노처럼 일렬로 세워진 아파트들이었다. 커다란 벚나무가 연달아 박혀있고, 협소한 주차 공간으로 인해 항상 차와 차 사이를 좁게 지나가야 하는, 차의 좁은 골목들이 존재하는 곳. 매년 새로운 색깔로 아파트 도색을 해야 되네 말아야 하네 따위를 정해야만 하는, 그런 한국의 평범한 아파트였다.
아빠는 “봄이”를 가장 좋아했다. 봄이는 아빠가 온몸에 끈적거리는 음식물을 묻혀와도, 아파트 새벽 당직을 서며 밤새 피워댔던 담배냄새가 온몸으로 풍겨와도, 언제나 꼬리를 흔들며 아빠를 반겨주었다. 봄이는 연주가 초등학교 시절 주차장에서 주워온 갈색 푸들이었다. 그 갈색개는 “쉽게 버리는 종”이 아니라고, 어딘가 병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엄마는 연주에게 말했다. 하지만 연주는 고집을 부렸다. 대게 또래 아이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여자애가 저렇게 고집이 쌔서 어떡하려고 저래”
아빠는 혀를 차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부터 봄이는 우리와 함께 지냈다. 하지만 결국 실질적으로 봄이를 키우는 건 엄마와 아빠의 몫이었다. 엄마가 주로 목욕과 발톱, 치석 같은 자잘한 몸 관리를 했고, 아빠가 퇴근을 하며 사료와 간식 같은 것을 사 오는 식이었다. 봄이는 그 역할을 이해했는지 산책을 다녀오고 나서는 엄마를 피했고, 배가 고프면 아빠를 바라보곤 했다.
아빠는 스테인리스 양푼그릇에 사료를 한가득 쌓아주곤 했다. 엄마가 사라지고 나서는 모든 것이 아빠의 담당이었다. 봄이가 밥을 먹는 시간, 샤워를 하는 시간, 산책을 하는 시간, 잠에서 깨는 시간… 모든 봄이의 시계는 아빠에게 맞춰져 있었다. 봄이 와 아빠는 그렇게 함께 늙어갔다. 오직 둘에게만 맞혀진 그 시계는 빠르고 적확하게 흘러갔다. 마치 아스팔트 도로 위, 초록색 안내판이 머리 위로 지나가듯. 뚜렷하게 보이지만 굉장히 민첩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봄이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는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루에 깨있는 시간보다 잠에 든 시간이 많았고, 입에서는 항상 독한 쓴 내가 났다. 맑았던 눈은 어느새 먼지 막이 덮인 듯 탁했고 털은 군데군데 듬성듬성 빠져있었다. 아빠는 그런 봄이를 계속 쓰다듬어 줬다. 마치 오래된 수석을 씻어 빛나게 하려는 듯. 나는 그런 아빠와 봄이를 번갈아 보곤 했다.
연주는 자신이 어렸을 적 꽤나 바쁘게 산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취준생 기간 때는 그랬다. 회사에서는 높은 스펙을 겸비한 사람을 1순위로 뽑았고 그다음 순위로는 어떤 일이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절박함을 가진 사람을 뽑는 듯했다. 연주는 그 2순위 안에는 들어간 사람이었다. 면접관이 어떤 알바를 해봤나요,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를 물을 때면 연주는 어떤 일을 말할까 항상 고민했다.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하며 술 취한 할아버지의 토를 손으로 받은 일, 냉동창고 안에서 수만 개의 박스 바코드를 찍으며 손이 도르래에 말려들어갔음에도 병가를 못 얻어낸 일, 대학 선배의 추천으로 들어간 일일 알바가 사실은 다단계 회사여서 2층 창문을 열어 몰래 탈출한 일… 어떤 일을 면접관에게 말해야 자신에게 유리할지 고민했다. 오히려 자신의 업무 강도의 수위를 줄여야 하는 상황은 그녀를 충분히 절박하게 보이게 만들었고 그 진심이 중견기업 회사까지는 통한 듯했다.
연주는 그렇게 23살에 이른 취업을 했고, 본격적으로 빠르게 사회에 진출했다. 중견정도 되는 화장품 회사는 적당한 연봉과 적당한 복지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빠듯하게 최신 휴대폰을 사고, 빠듯하게 아침과 저녁을 차려 먹고, 빠듯하게 보세 옷과 길거리 향수로 치장을 할 수 있는 삶. 다만 그 평범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평범한 회사 생활까지 바라면 안 되는 듯했다. 그녀는 법정 근로시간보다 포괄로 정해진 야근시간에 퇴근하는 삶이 더 많았고, 회사 내에 높은 분들의 다양한 수치심이 섞인 욕설들과 행동들이 “사회경험” 으로 포장되어 그것들을 모두 마땅히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 삶에서 약간의 회환과 체념을 느껴야 했을때, 연주는 그제야 가끔씩 “아빠는 자신의 나이 때 무엇을 했을까”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빠는 어렸을 적에도 눈썹이 오래 쓴 붓 마냥 거칠고 삐뚤삐뚤했을까. 젊은 날의 군인일 때도 머리에 흰색 털이 섞여있었을까. 연주는 아빠가 옛날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직업군인으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창 군홧발로 모든 것을 평정하던 시절, 갑자기 서울 인근 부대에 전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거나, 뜬금없이 펑 소리가 나면 쿠데타가 일어났구나 생각하던 시절, 아빠는 그 시절에 최전방 직업 군인이었다. 아빠의 성격이 군인에 맞아서인지, 아니면 군인이기에 그런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몰라도 아빠에게 군인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아빠는 항상 보수적이었고, 힘든 아버지가 아니라 남자다운 아버지로 보이고 싶어 했기에. 하지만 나중에 들은 사실로는, 아빠는 그런 천직에서 어느 순간 “불명예 전역”을 받고 군대를 나오게 되었다. 아직은 부대에서 상급 부사관들의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중대에 일어난 자살 사건을 홀로 책임지고 나왔다. 그 당시 군 내부 자살사건은 비일비재했지만, 그 “당연한 일”을 오직 아빠만이 책임을 지고 나온 듯했다.
“그래야죠 그럼”
아마도 아빠는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운 상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집안에서보다 바깥에서 더 배려를 베푸는 사람, 밖에서는 못했던 말들을 집에 와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사람, 집에서 표현하지 않았던 보드라움을 밖에서는 헤프게 표현하는 사람, 집 밖에서보다 안에서 이기적인 사람, 또 그렇게 쉽게 손해를 보는 사람.
아빠는 흙냄새를 묻혀왔던 군복에서 담배쩐내가 나는 택배 조끼로 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그 무너진 자존심을 그대로 집안에 들고 와 밥상에서 술로 풀곤 했다. 그래서 연주가 어렸을 적 기억하는 집안 분위기는 항상 무거웠다. 아빠의 그날 기분에 따라 모두 행동을 조심하고 눈치를 봐야 했던 점, 아빠가 퇴근한 저녁이면 항상 집안에 냉랭한 분위기가 돌았던 것들이 연주의 어두운 구석 모서리 부분에 옅은 곰팡이처럼 존재했다.
특히 동생은 엄마가 사라진 이후로 그 어떠한 상황도 아빠와 “상담” 하지 않았다. 동생이 높은 성적으로 사립 명문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있음에도 일반 고등학교를 가야만 했을 때도, 고등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투는 성적을 받아와 비교적 높은 대학교를 가고 싶어 했을 때도, 동생은 아빠와 어떠한 말도 나누지 않았다. 좀만 무리해서라도 다양한 전형을 통해 높은 대학교에 지원해야 한다는 동생의 담임선생님의 전화에 아빠는 이렇게 답했다.
“그러시죠 그럼”
아빠는 가족의 중대한 결정에 있어 항상 수긍하고 동의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다. 만약 엄마였다면, 높은 입학금과 더불어 서울 타향살이를 들며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어떻게든 돈을 끌어모아 동생을 서울로 올려 보냈을 것이다. 죽은 엄마와 살아 있는 아빠는 그렇게 너무나도 달랐다. 결국 동생의 입학금과 서울 관악구 반지하 자취 보증금은 연주의 알바비와 국가에서 대학생들에게 빌려주는 저렴한 이자의 대출금으로 충당되었다. 이후 동생은 알바와 성적 장학금을 통해 그 돈을 계획적으로 갚아나갔다. 그 이후로도 동생은 우수한 대학교 성적과 남다른 논문으로 미국 대학원 연계 프로그램을 갈 때도,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최고 공학대학교에 입학해 추가 공부를 할 때도, 아빠에게 어떠한 상의도 하지 않았다.
“주연이는 잘 지낸다니”
아빠는 가끔씩 혼자 집에서 술을 먹으며 연주에게 넋두리를 뱉듯이 물어봤다. 그럴 때마다 연주는 아빠에게 대답했다.
“그럴 거야 아마”
그 말투는 아빠와 비슷한 말투였다.
아빠는 분명 경비일을 시작한 뒤 색채를 잃어갔다. 볼살이 빠져 거칠게 말라갔고, 온 얼굴에 그늘이 진 듯 표정이 없어졌다. 경비원이 된 이후에도 아빠의 삶에는 여전히 출근과 퇴근, 하루의 마무리를 위한 반주만이 존재했다. 연주는 그럴 때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아빠가 실존 인물이 아닌, 하나의 늙은 그림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런 대꾸도, 미동도 없이 햇빛의 각도에 따라 수동적으로 모습을 바꾸는, 어둡고 어두운 그림자. 그래서 연주는 하루에 아빠를 보는 시간보다 못 보는 시간이 더욱 길었다. 오직 그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빠가 쌓아놓은 얕은 설거지감과 수북이 쌓여있는 봄이의 밥그릇뿐이었다.
연주는 가끔 아빠의 퇴근과 자신의 퇴근이 겹쳐 집안에 같이 있을 때, 아빠에게 묻곤 했다.
“요즘 일은 어때”
마치 부모가 자식에 묻는듯한 말투였다. 연주의 질문에 아빠는 항상 침묵으로 대답했다. 침묵 속 아빠는 항상 어두운 거실에서 홀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매초마다 번쩍거리는 티비의 초라한 빛이 아빠에게 최면을 거는 듯했다. 그렇게 최면에 걸린 아빠의 옆에는 항상 초록색으로 된 소주병이 두 개 정도는 나열되어 있었다.
저녁 7시30분, 밥이 식어가던 어두운 식탁 위, 요란한 소리와 빛을 내며 울린 휴대폰이 울렸다. 아빠가 아닌 032 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였다. 연주는 식탁 위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 신원 확인 차 연락드렸어요. 따님 이연주 씨 맞으시죠?”
아빠는 그날 저녁 6시가 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날 점심, 오후 일찍 출근을 했던 아빠가 지금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주말이어도, 아무리 바쁜 명절 전주라고 해도 너무 늦은 퇴근이었다. 바깥에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질 준비를 하며 빨간색 석양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빠를 위해 저녁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에 흰 쌀을 4번 정도 씻어 밥솥에 안쳤고, 각각의 통들에 담긴 반찬들을 조그마한 종자에 담아 먹기 좋게 담았다. 멸치볶음, 가지 무침, 콩자반… 다양한 색상의 반찬들이 따듯한 냄새를 풍기며 식탁 위에 올라왔다. 집안은 음식의 열기와 냄새로 가득했다. 봄이는 그때까지도 아빠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빠의 사인은 원인모를 심장마비라고 했다. 조그마한 1평 조금 넘는 경비실에서, 옆칸에 무성의하게 설치된 오래된 세면대의 비릿한 하수구 냄새와 함께, 책상 위 엎드려 잠을 자는 모습으로 아빠는 차갑게 죽어갔다. 아빠는 그날 분명 새벽에 퇴근을 했어야 했다. 분리수거를 알맞게 마치고,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순찰을 돌고, 외부인 차량에 경고 스티커를 붙이며 일과를 보낸 다음, 차가운 새벽공기가 묻은 옷을 털며, 현관문 앞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맞이하는 봄이를 안으며, 그렇게 집에 들어왔어야 했다. 하지만 아빠는 돌아오지 못했다. 엎드려 잠시 청한 잠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경찰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연주에게 말했다.
“동대표라는 분이 따님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해요. 너무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경찰관은 왠지 민망한 듯 끝마디에 조금의 웃음을 섞었다. 일방적으로 전화를 걸어온 동대표는 쉽게 쉽게 말을 이어갔다.
“아가씨,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긴 해요. 뭐 다 잘해보려다가 그런 건데… 참 사는 일이 쉽지 않아들, 이렇게 되는 일이 없어 글쎄.”
한숨이 가득 섞인 동대표의 말이 전화 상으로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연주는 동대표의 구구절절한 걱정과 한탄을 끊고 자세한 경황을 듣기 위해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은 연주에게 몇 가지 신원파악을 한 후 물었다.
“평소 아버지와 관계는 어떠셨어요?”
연주는 집으로 돌아와 티비를 켰다. 밤 12시가 지났음에도 뉴스 전문 채널은 활발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어떤 검은색 cctv 화면이 반복해서 송출되고 있었다. 밑 배너에는 “경비원 심장마비, 배후에는 동대표의 갑질?”라는 문구가 고정으로 박혀 있었다. 그 회색 cctv에서는 얼굴이 모자이크 된 아빠의 모습과 한 남성의 존재가 보였다. 그 남성은 모자이크 된 아빠에게 무엇인가 물건을 던지고, 손가락질을 했고, 가끔은 화내다가도 웃었다. 아빠는 그럴 때마다 움찔거렸다. 그 모든 것이 2.5평 남짓 경비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cctv에 비친 아빠의 모습은 마치 집안에 설치된 흑백 애견 캠에 보이는 강아지 같아 보였다.
“아.. 이 동대표란 분이요. 경찰조사에서 자신은 90넘은 노인 부모를 보살펴야 하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이거에 대해서 주기자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어이가 없죠. 저 돌아가신 경비원분도 누군가에게 아버지일 텐데, 저렇게 하대하고 갑질하는 모습을 보였잖아요. 사람이라면 저러면 안 되는 거고… 참 속이 아픕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요. 이 동대표, 전에도 경비원들 괴롭히는데 선수였다고 합니다. 이전에도 계속 마찰이 있어서 경비를 그만두고 나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여러 기자들이 한 곳에 모여, 이름표를 크게 왼쪽 가슴에 달고 자신의 취재 사실과 감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사실상 뉴스보다는 뉴스채널에서 하는 예능에 가까웠다. 연주는 거기까지만 보고 티비를 꺼버렸다.
“아빠가 죽었어”
연주는 동생에게 말했다. 마치 밥먹었냐는 안부전화같이 덤덤하고, 차분하게.
“언제“
“오늘…아니다. 어제”
동생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곧 말했다.
“알겠어”
동생은 장례식장 이틀차에 나타났다. 큰 캐리어에 다양한 짐을 싼 채로. 지방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던 동생은 곧바로 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조문객들에게 음식을 날랐다. 동생의 행동에는 항상 어떠한 미련이나 궁핍함이 없었다. 그녀는 모든 일을 차례대로 완성시켜 나갔다. 마치 유능한 직장인이 맡겨진 일을 척척 수행해 나가듯이.
“언니 왜 안 울어?”
“어?”
“아니, 엄마 돌아가셨을 때는 그렇게 울었잖아. 어렸을 적 막연히 기억나. 언니 우는 모습”
동생은 장례식장 주차장에 설치된 흡연장에서 연정에게 물었다. 어두운 새벽 흡연장은 고요했다. 오직 동생의 담배 끝이 조금씩 타들어가는 소리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연정은 그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낼 수 없었다. 그냥 단순히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럼 너는 왜 안 우는데_라고 묻고 싶었지만, 연주는 끝내 입을 떼지 않았다.
둘은 끝내 울지 않았다. 아빠 생각이 날 때면 잠시 멍하니 장례식장의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손님이 오면 절을 했고, 동생은 밥을 날랐다. 딱, 그 정도뿐이었다.
동대표는 우리에게 합의의사를 밝혔다. 동대표의 변호사는 말했다. 의도치 않은 사건으로 모두가 힘들어하고 있다고, 그가 많이 반성을 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지나친 비난을 받아 힘들어하고 있다고. 아빠의 과로와 갑질은 법적으로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는 않다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중대한 비밀을 몰래 전하듯 소곤거리며 말했다. 제시한 합의금은 절대 적은 액수가 아니라고.
연주는 집에 돌아와 아빠 방에 있는 봄이의 밥그릇에 사료를 채웠다. 봄이 뒤편에 있는 아빠의 침대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마치 아빠가 방금 전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냉장고 안에 있던 찬 밥을 먹고, 급하게 일을 나간 듯했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그의 이불에는 여전히 그의 텁텁한 땀냄새가 배어 있었다.
“야이 (삐_)롬아, 내가 너 인사 똑바로 하라했지. 어디 (삐_)같이 인사도 못하는 (삐_)같은 애를 데리고 왔어. ”
연주는 계속해서 뉴스에 공개된 녹취록이 떠올랐다. 음성 변조가 들어가 굉장히 고주파의 소리가, 특정 부분은 삐_ 처리되어 나간 그 음성들이. 아빠가 찍힌 또 다른 cctv에는 아침과 저녁 출퇴근 시간, 동 입구에 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출근하는 5층 아저씨를 보며 꾸벅, 코트를 입은 12층 젊은 아가씨에게 꾸벅, 지각한 듯 빠르게 1층을 빠져나가는 어린 초등학생에게 꾸벅. 아빠는 모든 대상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봄이는 장례식이 끝나고도 현관문 앞에서 밤새 아빠를 기다렸다. 온몸을 둥글게 만채, 차가운 싸구려 신발장에서. 연주는 그럴 때마다 말했다.
“봄아. 아빠는 더 이상 안 와. 들어가서 편히 자”
그럴 때마다 봄이는 잠깐 몸을 일으켜 어두운 허공에 나를 바라보고 다시 몸을 둥글게 말았다. 나는 봄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잠들 겁니다. 잠드는 모습 보시고 보호자분께서는 나가시면 됩니다. 수의사는 손에는 라텍스 장갑을 끼어져 있었다. 아빠의 장례식 이후, 2주 뒤 봄이의 안락사 절차가 진행되었다. 아빠가 죽기 전, 미리 연주가 예약해 두었던 그날이었다. 동생은 봄이의 안락사를 지켜보러 다시 지방에서 올라온다고 했다. 동생의 말에 연주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그다지 봄이 와 별다른 유대감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 이후, 2주 만에 본 동생은 약간은 수척해 있었다.
봄이는 아빠가 마지막으로 사준 핑크색 목줄을 차고 있었다. 산책할 때마다 그것이 너무 해져 보여 연주가 새로운 목줄을 사주어도, 아빠는 항상 그 핑크색 목줄만을 사용했다. 수의사는 그것을 봄이에게서 벗겨 연주에게 건넸다. 그 줄이 얼마나 꽉 조였는지, 봄이의 목에 선명한 줄의 패턴이 박혀있었다. 봄이의 몸에 곧 마취제가 들어가고, 봄이가 잠들면 곧 심장이 멈추는 약이 주입될 터였다. 봄이는 여전히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아빠방의 침대 밑에서 곤히 휴식을 취하듯.
안락사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신속하게 끝났다. 마치 허공에 바람이 불고 그것을 피부로 느끼듯, 아주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연주의 손에는 핑크색 목줄이 손에 들려 있었다. 모든 과정을 끝내는데 20분이 채 안걸렸다. 연주는 동생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러다 신호에 차가 멈추고, 연주는 바깥을 쳐다봤다. 한여름 평일 오후 2시임에도, 밖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들 어딘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주의 손에 들린 핑크색 목줄은 여전히 봄이의 체온을 담고 있는 듯 따듯했다. 마치 아빠의 침대 위 헝클어진 이불처럼.
그리고 동생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잠깐동안의 신호에 걸린 사거리에서, 차가 멈추었을때, 그 잠깐의 타이밍에. 동생은 너무나도 서글프게 울었다. 핸들에 머리를 박고, 침과 콧물을 흘려가며, 별달리 슬픔을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이. 연주는 여전히 핑크색 목줄을 손에 꼰채, 굳이 동생을 위로하지 않고 바깥을 쳐다봤다. 주변의 수많은 차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셋을, 아주 조용히 스쳐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