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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Jun 05. 2023

“저는 화를 안 내요, 슬퍼하죠.”

 분노는 미개한 감정이다. 이기적이고, 파괴적이며,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분노를 여과 없이 터뜨리는 사람은 말을 배우기 전 아기와 같다. 주변의 상황과 반응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신의 본능에만 충실하다. 분노가 터진 사람은 자신이 분노 중이라는 이유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비정상적인 행동을, 때론 고함과 욕설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가끔 물리적인 폭력을 행할 때도 있는데 이건 눈 뜨고 봐주기 힘들다. 최악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분노로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분노 따위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꽤 괜찮은 지성인이다. 분노하는 사람과는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다. 그들은 미개하니까.     


 # 기억

  “ 아이고, 너네 엄마는 도대체 왜 그런다니? ” 할머니가, 고모들이, 아빠가, 어린 내게 이렇게 묻곤 했다. 답을 요하는 질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늘 난감하다. 짧은 고민의 시간, ‘나도 피해자예요.’를 선택한다. 당장 눈물이 흐를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다. 잠시 침묵… 한숨… “그래, 너네가 무슨 죄니? 너네가 제일 안쓰럽지.”, 끝. 나는 무죄다. 당신들과 같은 편이다. 그녀만이 유죄다. 그녀의 죄명은 ‘분노’. 그녀에게 주어질 벌은 언제나처럼 ‘고립’이다. 고립의 기간은 그녀가 정한다. 분노를 지우고 다시 웃으며 언제나처럼 조용히 살 준비가 되면 나온다. 나오고 얼마간 오버스러운 상냥함과 비굴함을 유지한다면 사람들이 그녀를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엄마는 여전히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조절하지 않는다’로 써야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분노는 중간이 없다. 어쩌면 엄마의 분노 게이지는 늘 중간 이상을 유지 중이다. 그러다 ‘콰콰아쾅!’ 갑자기 터지는 분노. 주변이 잠시동안 얼어버린다. 무력화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결론은 늘 같다. 사람들은 엄마를 슬슬 피하고 엄마는 고립된다. 그제야 나머지 사람들이 서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왜 그러냐, 언제까지 그럴 거냐?”라고. 신기한 건, 아무도 엄마에게 제대로 물어보지 않는다. 엄마에게는 자꾸만 그만하라고 한다. 조용히 좀 살자고 한다. 그만하면 되었다고 한다. 


# 조금 더 오래된 

 엄마를 위해 기도하러 왔다는 사람들이 동그랗게 앉아 있다. 종종 멍하니 정신을 놓고 가끔 옹알이같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는 엄마를 치료해 주러 온 감사한 사람들이다. 이제 엄마는 정상으로 돌아올 거다, 다른 엄마들처럼. 기도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단체로 울부짖는다. 무섭다. 그렇지만 도망치면 안 된다. 난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엄마의 유일한 보호자다. ‘샤스브로바트로소주시오소서.. 도하오시고 무샤하고주시오소서…’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그 단체 옹알이에 엄마가 으앙 으아아앙 운다. 양손을 하늘로 올리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그러다 엄마가 납작 엎드린다. 탁, 타탁, 탁, 탁, 탁, 타다닥, 탁, 울부짖던 사람 중 한 명이 엄마의 등과 머리와 어깨, 팔과 다리를 때린다. 주위 사람들이 더 크게 울부짖는다. 얼마 뒤 엄마가 스르르르 일어난다. 양손을 올리고 방을 뱅글뱅글 돈다. 그러다 웃옷을 벗는다... 단추들이 떨어져 뒹군다. 내가 도망친다. 며칠 뒤, 엄마가 입원한다.     


 평생 하나님 품에서만 살 것 같던 엄마가 퇴원 후 불교로 개종했다. 귀가 엄청나게 큰 부처님은 꽤 오랜 기간 엄마의 이야기를 (유일하게) 끝까지 들어주고 계신다. 내내 들으시다가 엄마에게 어떤 대답을 주시기도 한단다. 몇 달만 참고 이겨내라든지, 이제 곧 다 해결이 될 거라든지, 북쪽은 조심하라든지, 한 번 해보라든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엄마는 은밀한 고백을 받은 소녀같이 반짝거린다. 엄마는 고백에 대한 감사함을 가~득 봉투에 담아 절에 전달한다. 든든한 백을 가지게 된 후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특히 부처님의 동의(?)로 시작한 식당이 대박이 나면서 (그즈음 아빠는 퇴직금을 털어 넣은 사업을 말아먹었다) 엄마는 갑자기 우리 집 가장이 되었고, 엄마의 목소리에는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더불어 간신히 우리 네 남매에만 쪼륵 쪼르륵 쏟아내던 분노가 제대로 그 대상에게 정조준되어 쏟아졌다. 무뎌진 줄 알았지만, 단단히 벼린 날로 추는 칼춤은 상황도 대상도 제한도 없다. 그 순간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막으면 그 사람도 오늘 칼춤의 대상이 된다. 제지받지 않고 실컷 칼춤을 추고 돌아서면 엄마는 또다시 혼자다. 고립. 도대체 왜 그런다니?    

 

# 꽤 가까운

 “ 내 나이 스물에 시집와가지고 세상에 시누이가 여섯에 시부님까지 그렇게 다 같이 살았다. 시누이 다 시집보내고, 시아버지는 얼마 안 돼서 치매 걸리고.. 그 살림을 혼자 다... 아이고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하냐. 책을 써도 백 권을 넘을걸. 너네 넷 낳고 산후조리라고 뭐 해 볼 줄 아니? 니 동생들 낳고는 또 딸이냐고 대놓고 인상을 쓰며 휑 나가는데 내가 혼자 울면서 미역국을 먹었다. 너 같으면 살겠니? 니 할머니 시집살이가 아무리 고돼도 니네 아빠가 좀 잘했으면 내가 그나마 살 만했지. 세상에 내내 술에, 놀음에. 월급날은 집에도 안 들어오고 봉투째 들고 화투판에서 밤을 새우고 왔어. 니 할머니는 빨리 가서 안 찾아오냐고 성화고. 아이고, 내가 참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부처님 아니었으면...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아휴, 또 시작이네, 또! 적당히 좀 해. 엄마 그러는 거 다들 불편해하잖아. 엄마 힘들었던 거 누가 몰라? 그냥 좀 지금을 살면 안 돼? 왜 그렇게 케케묵은 것들을 다 끌어내고 그래. 그런다고 뭐가 변해? 이 얘기 백 번도 더 들었어. 그만 좀 해, 제발.”

 고립. 뻔히 알면서 왜 매번 이러시는지?     

 분노하는 엄마가 싫다. 솔직히는 두렵다. 표면적으로 꽤나 잘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집 평화는 언제나 엄마의 분노로 맨살을 드러내니까. 다 같이 엄마를 밟고 서서 두 번째 손가락을 꾹 다문 입술 위에 올리는 평화. 엄마가 비명만 지르지 않으면 참 좋을 것이다. 

 나는 평화를 사랑한다. 평화로운 가정에 사는 친구를 내내 부러워했고, 결혼하면 내 가정은 무조건 평화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난 애들 앞에서 남편과 큰 소리로 싸운 적이 거의 없다. 아이들을 야단칠 때도 최대한 조목조목 책에서 배운 대화법대로 이야기해 나가려 애쓴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분노를 분출하는 상대가 엄마다. 애들 앞이든 남편 앞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리곤 늘 후회한다. 분노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엄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난 고립되고 싶지 않다. 때문에 분노를 어떻게 잘 삭제하는지는 내 안에 오래된 과제다. 난 지금까지 꽤 잘 수행하고 있고, 자제력이 약해질 수 있는 노년기까지 이걸 어떻게 잘해 나갈지 고민이다.            

# 조금 전 

 쿵. 바위가 떨어졌다. 파편이 사정없이 날린다. 파편 속에 엄마가 있다. 몸이 덜덜 떨린다. 제대로 분출되어 본 적 없는 엄마의 분노가 혼령이 되어 내 주위를 맴도는 것 같다. 엄마의 분노를 폄하하고 앞장서서 거세한 사람 중 하나가 나다. 자연스럽게 나의 분노도 검열하고 바로바로 거세해 버리고 있는 나. 책 한 권 (불태워라. 성난 여성들 분노를 쓰다./릴리 댄시거 엮음)이 이렇게나 사정없이 나를 몰아치고 있다. 허락된 적 없는 분노를 가진 엄마, 전혀 사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분노하는 엄마의 자아를 사적인 것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그들, 그들 속 나, 저는 화를 안 내요, 슬퍼하죠라고 자부심을 느끼며 말하는 나... 책 속에서 몇 번을 길을 잃었다. 책을 덮은 지금도 난 여전히 헤매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폄하하고 혐오하고 삭제하려 애쓴 ‘분노’라는 자아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그 고민의 시작점에 엄마가 있다. 엄마의 분노가 있다. 조급해하지 않아야지, 겹겹이 쌓인 그걸 마주할 때는... 그리고... 

 아, 이런! 엄마한테 거의 한 달 동안 전화를 하지 않았다. 엄마 삐지기 전에 일단 전화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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