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첫 연애를 시작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지난번에 딸이 내게 추천해 준 노래 ‘g0nny’의 ‘기대‘도 음악을 좋아한다는 그가 딸에게 추천해 준 거라고 했다. 담담하게 툭툭 내뱉는 목소리로 내 어깨에 기대도 된다고 흔들리지 않을 영원한 마음을 노래하는 ’ 기대‘라는 곡을 시작으로 나 또한 g0nny에 푹 빠져 있었다.
“음악도 그렇고 좋아하는 영화나 여행 취향도 꽤 잘 맞는 거 같아.” 잘 만나고 있냐는 나의 물음에 광대가 한껏 올라간 딸이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 배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겠는지 자꾸만 쿡쿡 웃는 딸의 얼굴은 누가 봐도 달달한 연애를 하고 있구나 알겠다.
다른 직장에 비해 퇴근이 많이 늦는 딸은 퇴근 후 데이트까지 하느라 하루 걸러 막차를 타고 귀가했다. 너무 늦게 귀가하는 것도 수면시간이 훅 줄어드는 것도 걱정이 돼서 괜찮은지 물어보니 “피곤해도 뭐 괜찮아. (웃음) 엄마, 서울역 근처에 너무 괜찮은 바가 있는데 거기 단골 될 거 같아. (웃음) 엄마도 좋아할 만한 곳이야. 나중에 같이 가자.” 한다. 암, 괜찮겠지 며칠 밤을 새운대도 에너지가 폴폴 솟을 시기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딸의 별명은 ‘쌈닭’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쭉 대안학교에 다닌 딸이 고등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되면서 ‘개념 없는’ 남자들의 말과 행동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런 상대에게 불편함을 이야기하면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오히려 화를 내거나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구체적 설명을 다그치거나 아예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학년이 올라가도 남자애들은 변한 게 없는데 자기와 비슷한 어려움을 호소하며 힘들어 후배들을 보고 교내에서 진행하는 페미니즘 캠프에 중심이 되어 몇 차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그즈음부터 눈에 띄게 ‘퀴어’ 관련 영화나 책을 찾아보는 딸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었다.
그랬던 딸이 드디어 연애를 한다니 반갑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놀랍기도 했다. “그런데 너랑 가치관 이런 것도 잘 맞아? 만나면서 불편하다 싶은 부분은 없어?” 내내 궁금하던 질문을 했더니 딸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럴 리가 없잖아.” 슬쩍 웃으며 눈을 맞추는 딸.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왜 없지? 그럴 리가 없다는 건... 그렇다는 건... 어... 혹시??’
그랬다. ‘그럴 리가 없는’ 딸의 애인은 세 살 연상의 여자 사람이다. 처음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동안 띠이- 하고 이명이 들렸던 거 같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릿속에서 뱅그르르 뱅그르르 버퍼링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금 딸의 나이였던 시절, 바통터치를 하듯 쉬지 않고 연애를 했었다. 가부장제 끝판왕인 우리 집 남자들한테 도망치기 위해서 다른 집 남자를 고르고 골랐다. 하지만 세상 서윗했던 다른 집 남자가 막상 우리 집 남자가 되고 보니 정도만 다른 그놈이 그놈이더라. ‘고쳐 살자’ 정신으로 이십 년을 넘게 ‘쌈닭’으로 살아보니 이제는 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하지만 부단한 노력의 결실로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던 우리 집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집안일을 ‘돕는다.’고 표현하지 않고, 자꾸만 가르치려 드는 자신을 살짝 조절하고 공감의 말을 먼저 건네는 연습을 하고 있다. 뭐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시오’에 걸려버리는 끝도 없는 주사위 게임을 하고 있지만.
“딸이 드디어 연애한다네... 상대가 세 살 연상의 여자 사람이야.”
“어? 어... 그래.... 난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그냥 모른 척할까?”
“왜 모른 척해? 상대가 여자라서? 남자였다면 안 그랬을 거잖아.”
“음, 나는 가영이처럼 열려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 좀... ”
예상한 반응이다. 나라는 ‘열린 사람’은 처음 들었을 때부터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는 듯 우리 집 남자에게 설명한다. 딸이 취향이 너무나 잘 맞는 사람과 첫 연애를 시작했다는 건 그 자체로 축하해줘야 할 일이 아닌지, 그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게 앞의 전제에 영향을 줄 만한 이유가 되는지, 사실 생각해 보면 동성을 만나고 있기에 오히려 안심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거, 같은 이유로 내게도 선택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그땐 동성의 사람과 진하게 연애를 해 보고 싶다고 뭐 이런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고백하자면, 그를 핑계 삼아 나 스스로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편이 말한다. “음... 듣고 보니 그러네. 딸 오면 축하해 줘야겠어.” 오, 이해성공? “그런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야겠지?” 응? ‘처음으로 돌아가시오’, 에라잇!
딸은 지금 연인과 제주도 여행 중이다. 중간중간 가족 대화방에 사진을 보내온다. 제주의 겨울 풍경, 꼭 함께 가자던 비건 식당의 음식들, 아마도 연인이 찍어 주었을 한껏 폼을 낸 딸의 모습, 그리고 둘이 다정하게 같이 찍은 사진도. 사진을 보다 너와 꼭 닮은 나의 광대가 슬며시 올라간다. ‘짜슥, 부럽네.’ 훅 들어와 당혹스럽던 불편함이 소화가 되고 있다. 나조차 정체를 몰라 드러내지도 다시 넣기도 힘들었던 불편함…….
어쩌면 그건, 반짝거리는 모래사장을 신나게 걷다가 갑자기 모래 한 알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때 느껴지는 이물감,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눈물 한 방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