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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Jun 05. 2023

접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두 번째 생리. 이유 없이 생리를 거른 적은 있지만 한 달에 두 번 하는 생리는 처음이다. 예전 같으면 어찌 된 영문인지, 다른 출혈은 아닌지 병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아는 병이다. 완경이 가까워지고 있다. 딸에게 말하니 부럽단다. 나도 이놈의 생리 좀 안 하면 살 거 같다고 생각한 적이 없지 않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다.

 이유 없이 한쪽 어깨가 쑤시기 시작한 건 한 달 정도 되었다. 역시나 예전 같았으면 치료와 개선에 공을 들이겠지만 역시나 아는 병이다. 그저 통증의 강도를 하루하루 관찰하고 무리되지 않는 선에서 어깨를 단련하고 통증을 줄여주는 요가를 하며 버티는 중이다. 

 굳이 조금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한 자세로 너무 오래 있다 일어나면 어김없이 무릎이 쑤시고, 긴 계단을 내려갈 때 무릎에 과도한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얼마간은 절룩거리며 풀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자다가 갑자기 춥고, 또 갑자기 덥고, 갑자기 너무 슬프고 또 갑자기 너무 흥분한다. 이 모든 게 다 ‘아는 병’의 증상들이다, 갱. 년. 기.     


 “힘들어도 뭐 아는 병이니 어쩌겠니?” 임신하고 입덧 때문에 힘들어하던 내게 시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어머님께 어째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시부모님 앞이라고 최대한 참는 중인데… 어머님의 그 말이 내게는 ‘유난 좀 그만 떨어라, 너만 애 낳는 것도 아닌데.’로 들려 몹시 서운했다. 아마 어머님도 누군가에게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며 세 번의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오롯이 겪었겠지.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거의 일 년 가까이 내 몸을 온전히 나의 몸으로 살 수 없는 낯설고 두려운 시간을 어째서 같은 경험을 한 여성조차 그저 ‘아는 병’이라는 단순하고 깜찍한 (끔찍이 맞다) 단어로 정의하려 할까?      

 초기 내내 속에서 주먹만 한 버터를 녹이는 듯한 입덧의 시기를 지나 중기에는 호르몬 변화로 입 주위에 트러블이 생겨 코미디프로에 나오는 ‘웅이 아버지’ 얼굴로 지내야 했다. 후기에는 부종으로 숙면이 어려웠고 다리 통증 때문에 밤에 화장실 가는 일이 곤욕이었다. 엄마 힘든 게 빤히 보여 그랬는지 쌍둥이는 8개월 만에 세상에 나왔다. 덕분에 나의 첫 ‘아는 병’은 끝이 났다. 임신은 끝났지만 출산 후 아기들을 돌보며 온전히 몸을 회복하기까지 거의 일 년은 걸린 거 같다. 그마저도 임신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반쪽짜리 회복이었지만. 아이가 둘이나 생겼는데 반쪽이면 어떤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충족감은 반쪽을 채우고도 넘쳤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슬금슬금 닳고 있는 내가 있었겠지만, 꾸준히 운동하며 몸을 아껴 쓰자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근래 들어 친하게 지내는 언니들이 하나둘 갱년기 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아주 미쳐버릴 거 같더라고.” 훅 올라온 열감 때문에 한겨울에 부채질을 했다는 언니는 이상하게 쳐다보는 동료들에게 “어쩌겠어요, 내 나이 되면 다들 겪는 건데.” 했다고 한다. 언니 이야기를 듣다가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던 단어, ‘아는 병’이 소환된다. 겉으로는 “언니 너무 힘들겠어요.” “어째요, 뭐 도울 거라도 있어요?” 했지만, 속으로는  ‘에이 그러니 미리미리 운동 좀 하라니까’  ‘몸을 좀 아껴 쓰지!’ 하며 내게는 오지 않을 일처럼 거리를 뒀다. 난 관리하는 여자니까! 하지만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없다! 제아무리 관리하는 여자라도. “오만하고 어리석군.” 두 번째 생리가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이미 하나둘 보이던 증세에 그건 갱년기 때문은 아니라고 잠깐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라고 금방 다시 돌아올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했었다. 또다시 ‘아는 병’으로 향해가는 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깜찍하다.  

 내게 온 두 번째 아는 병은 첫 번째와는 달리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다. 비슷하게 관심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연민에 더 가깝다. 첫 번째는 출산을 통해 반 이나마 회복이 가능하지만 이번에는 회복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점점 짙어지는 증세들에 고비용을 들이는 의료행위로 얼마간 고통을 줄여주거나 지연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좋다!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시기라면 얼마 전 읽은 책 제목처럼 ‘내 몸은 내가 접수’하는 수밖에.      


 이웃에 사는 언니들과 만든 페미니즘 공부 모임 ‘페미꿍꿍’에 갱년기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나누자 제안했다. 다들 겪는 거라고, 그래서 갱년기를 아는 병으로 분류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들은 단순히 증세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미쳐버릴 것 같은’ 증세들이 어째서 여성들에게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지, 갱년기를 맞이한 여성들은 자신의 긴 생의 주기에서 이 시기를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 어떤 돌봄이 필요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돌봄과 누군가에게 요청해야 하는 돌봄은 어떤 것이 있는지… 어쩌면 개별적으로 다르게 느낄 증세보다 훨씬 더 유용하고 중요한 이런 정보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눈 빠지게 찾아야 겨우 하나둘 보일까 말까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겪게 되는, 아는 병이라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면 대부분 약장사, 수술장사, 책장사다. 그마저도 거의 남자. 

‘이봐요, 당신들이 안다고? 확실해요?’


 무지하면 의지할 수밖에 없고 의지하다 보면 스스로 돌볼 힘을 잃는다. 언니들과 함께 공부하며, 누군가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로 우리 몸의 고통과 사랑과 남아 있는 소중한 삶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할머니를 향해가는 아줌마, 지금의 나다. 음, 인정! 여전히 낯설지만 이제 더는 거부하지 않는다.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밀어붙이거나 납작한 존재로 조용히 찌그러지지 않고 지금의 나로 온전히 살아가고 싶다. 그 시작을 여기에 기록한다. 비키니 입은 할머니들이 가득한 이곳, 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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