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전하는 구구절절-
‘엄마, 아빠, 아들, 딸이 3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집에는 화장실이 딸린 큰 방이 하나, 작은 방이 두 개. 이 가족은 어떻게 방을 나누어 쓸까?’ 누군가 이런 질문을 연령, 성별을 특정하지 않은 행인 1 행인 2 행인 3에서 행인100에까지 한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그 결과가 몹시 궁금... 할까? 난 안 그럴 거 같아. 답이 너무 빤하잖아. 상상력이 과하게 풍부하거나 못 견디게 장난이 치고 싶은 누군가의 답을 제외하면 아마 대부분 답이 같을 거잖아. 그렇지! 엄마 아빠가 화장실이 딸린 큰 방을 사용하고 아들이 방 하나, 딸이 나머지 방 하나를 사용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네 남매, 할머니, 고모까지 한집에서 살았어. 그런 상황에서 내 방을 갖는다는 것은 꿈에서도 어려운 일이었지(오빠는 꽤 오래전부터 혼자만의 방이 있었지만). 그나마 고모들이 다 시집가고 결혼 전 얼마간 세 자매가 함께 방을 썼는데 그때 막연하게 ‘내 공간’을 (그때도 여전히 ‘우리’ 공간이었지만) 갖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느꼈던 거 같아. 우린 더운 여름에도 문을 꼭꼭 닫고 지냈어. 가끔은 잠그기도 하고. 딱히 비밀스러운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그래야 진정한 내(우리) 공간이 된 느낌이 들었으니까. 아, 비밀스러운 무엇도 꽤 하긴 했지. 야한 책도 보고, 조금 더 야한 영상을 보기도 하고. 참! 우린 방에 있는 큰 창문 창틀에 올라가 몸을 밖으로 한껏 빼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어. 그 방 창문은 옆 건물이랑 꽤 가까웠는데 마주 보고 있는 면이 창이 없는 벽이라 몰래 담배를 피우기는 그만이었지. 생각해 보면 담배의 맛보다는 일탈의 맛에 더 끌렸던 거 같아. 셋이서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술이 조금씩 오르면 별로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도 눈물이 쏙 빠지도록 웃었어. 방에서 몰래 술 마시는 거 들킬까 봐 소리를 낮춰야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더 웃긴 거야. 엄청나게 웃다가 눈 마주치면 또 웃고, 쉿 쉿 거리다가 또 웃고. 물론 싸우기도 엄청나게 싸웠지. 방이 생기니 싸우기도 아주 그만이야. 오가다 누가 제지할 일도 없고. 방문이 잠기고 나면 싸우는 동안 우리 방은 사각의 링이 되는 거지. Ready, Fight!!! 상상되니?
그러다 결혼을 한 거야. 결혼하니 그 어떤 것보다 좋은 것이 나만의 공간, 나만의 물건이 생겼다는 거였어. 그때는 친정을 가거나 어디 좋은 곳에 여행을 가도 ‘아, 얼른 내 집에 가고 싶다.’ 생각이 들 정도였지. 매일 매일 쓸고 닦고 계절에 따라 이리저리 배치를 바꿔 보기도 하고, 유치원 근무하며 교실 꾸미기 하던 솜씨를 집에서 발휘해 보기도 하고 말이야.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집을 좋아했던 거 같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아빠도 퇴근해서 집에 오면 우리 집이 최고라고 하고, 집에 온 손님들도 우리 집을 연예인 집 같다며 칭찬해 줬어. 그때는 신혼이라 그랬을까? 아니야, 그런 거 같지는 않아. 지금까지 꽤 여러 번의 이사를 했잖아? 그런데 난 각각의 집들을 각각의 이유로 아끼고 좋아했던 거 같아. 물론, 지금 사는 집도 그렇고.
그런데 최근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이 집 어디에도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이 없다고. 언제부터 사라진 걸까? 출산하고부터?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나만을 위한 공간이 있었나? 집 전체가 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랬나? 혼자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서 그렇게 착각했던 건 아니었나? 도저히 모르겠더라. 그저 확실한 한 가지는, 난 나만의 공간이 너무나 절실하다는 거. 잠이 들어서도 한껏 예민한 나를 위해 자극을 차단해 줄 수 있는 공간, 자는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공간. 그땐 정말이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많았거든. 그리고 잠자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무엇에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원하는 만큼 머무름이 가능한 공간.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음악도 듣고 멍 때기도 하고, 그러다 가끔은 그 옛날처럼 비밀스러운 뭔가를 하기도 하고 말이야. 예를 들면? 잠이 안 오는 밤에 여러 번 봐도 매번 똑같이 흥분되는 영화를 본다든지. 그 영화는 볼 때마다 딱 그 장면에서 간질간질해지거든. 그러다가... 뭐, 방법까지 말해줘?
꽤 오래 고민했어. 너희가 초등학교에 갈 무렵부터 우리 가족도 너무나 당연하게 이렇게 (아까 4인 가족 질문에 답처럼) 살았잖아. 이제부터라도 ‘상상력이 과하게 풍부하거나 못 견디게 장난이 치고 싶은 누군가’가 되어 다른 답을 찾아보고 싶었어. 그러다가 제안하게 된 거야. 가장 큰 방을 아빠랑 아들이 함께 쓰고 작은 방 하나는 이전처럼 네가, 나머지 하나는 내 방으로. 기발한 생각 아니니?
처음 제안했을 때 너희 아빠가 아주 펄쩍 뛰었지. 아빠를 이해시키는 게 가장 힘들었던 거 같아.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이 어떤 상황에서도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부부는 꼭 살을 붙이고 자야 한다는 뭐 그런 게 있었거든. 아빠도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 잠을 따로 자다 보면 결국 관계가 소원해질 거라는 그런 생각. 우리 둘의 수면습관이(잠들 때 소음에 대한 민감성, 편안한 빛의 정도, 숙면을 위한 온도 등등) 완벽히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야. 그렇게나 다름에도 불구하고 살을 붙이고 자면 좋은 점이... 있기는 하겠지? 음... 정말 있을까? 이것 봐! 찾아봤더니, 두 사람이 함께 자면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낮아질 수 있고, 또 염증을 유발하는 사이토카인 수치도 줄어들 수 있고... 불안감을 완화시켜주는 이른바 ‘사랑 호르몬’인 옥시토신 분비는 늘어 결국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된대. (미국 피츠버그대학 심리학과 연구자료)
어이 구야, 많구나, 좋은 점. 그런데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이거 연구하신 분도 그렇고 연구 대상도 거의 다 남자가 아니었을까? 내 주변 언니들 여럿한테 물어봤는데 서로 불편해서 벌써부터 방을 따로 쓰고 있다는 언니, 따로 잠을 잘 때만 숙면을 취한다는 언니, 방을 나누는 게 어려워 침대나마 싱글 두 개로 바꿨다는 언니도 있어. 물론 아주 드물게는 여전히 딱 붙어 자는 게 좋다는 언니도 있긴 해.
좋은 점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난 한 개도 부럽지가 않아. 전혀 부럽지가 않아(장기하 님 노래처럼). 난 내 방이 생겨서 너무너무너무 좋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로지 나만의 방을 갖게 된 거잖아. 그 자체로도 엄청나게 소중하지만, 촉감을 기준으로 각별히 선별한 내 침구, 침구 한쪽에 늘 함께하는 보들보들 애착 담요, 침대 옆에는 좋아하는 아로마 오일, 밝기가 조절되는 키 큰 조명, 손닿는 아무거나 꺼내도 좋은 책들로만 모아놓은 책장, 그 앞에 놓인 캠핑 의자, 의자 주변에 초록 초록한 식물들, 베란다 한쪽 벽을 따라 줄 세워 두는 와인친구들, ‘친구들아 안녕? 조만간 만나자! 킥킥’ 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내 방은 그래.
부럽다고? 너도 네가 애정하는 것으로 네 방을 좀 꾸며 보는 건 어때? 정리해야 할 것은 정리하고. 음, 그래 맞아, 생각만큼 그게 쉽지 않지? 그렇지만 내가 느끼는 이 충족감을 너도 꼭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어.
하아~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 봐. 조금 졸리네. 쉬는 날 낮에 이렇게 침대에 기대듯 앉아 와인 홀짝이며 책을 읽으면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어. 기분에 취하고 와인에 취하고 졸다가 자다가 일어나면 새로운 한 주를 살아갈 에너지가 생겨. 그래, 나 좀 잘래. 눈이 벌써 감긴다.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이따 봐. 나갈 때 방문 닫아주는 거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