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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Jun 05. 2023

차분하게 크레이지

 “형제가 어떻게 되세요?”

여럿이 밥을 먹다 누군가 질문한다. 가장 먼저 그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저는 세 남매 중 막내예요.’ 한다. 막내인 줄 전혀 몰랐다는 반응도 있고 살짝 그런 거 같기도 했다는 반응도 있다. 한차례 애교가 많고, 개방적이고, 의외로 독립심이 강한 주변 막내들의 특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바통은 바로 옆 그에게로. ‘장남이고 밑으로 동생이 하나 있어요.’ 그의 대답에는 ‘오호’나 ‘우와’ 같은 감탄사와 함께 독립적이고 사교성도 좋아 외동인 줄 알았다는 반응이 많다. 어쩌다 보니 다음 차례는 나. ‘네 남매 중 장녀예요.’ 내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끝나기도 전인가?) 주변 여럿은 완벽히 하나로 반응한다. “그럴 줄 알았어요!” “맞아 맞아, 완전 인정!” 화기애애 인정 넘치는 분위기, 역시나. 나도 당신들이 그럴 줄 알았다. 이런 질문에 내가 답을 하면 백이면 백 그럴 줄 알았다고 하니까. 바위 뒤에 기린 목 같다니까.     


 “역시, 큰딸은 달라!” 

시키기 전에 ‘미리’ ‘알아서’ ‘잘’할 때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내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또렷이 남아있는 어떤 날의 기억, 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다. 그때는 택시에 정원 이상 끼어 타는 게 가능했다. 친척 여럿과 한 택시에 타게 되어 나는 엄마의 무릎에 앉게 되었다. 불편해서 어떻게 하냐는 다른 이들의 걱정에 엄마는 애가 작아서 괜찮다고 했다. 내 생각에 나는 작지 않았고 엄마도 나도 전혀 괜찮지 않을 거 같았다. 도착할 때까지 내내 스쿼트자세로 있었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자꾸만 걸리는 빨간 불에 화가 났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짜증 섞인 한숨을 몰아쉬는데 엄청 행복한 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얘가 지 엄마 힘들까 봐 엉덩이를 내리지도 않고 오는 내내 요렇게 들고 있더라니까, 큰딸이라 뭔가 달라도 달라요. 호호호” 엄마에게 쏠렸던 시선이 우르르 내게로 쏠렸다. 앞다투어 다가와 ‘세상에’ ‘어이구’ 같은 감탄사를 뱉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엄마한테 잘하라며 만 원짜리를 쥐어주기도 했다. 그 순간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돌아오는 길 달라도 뭐가 다른 큰딸의 착한 엉덩이가 또 한 번의 공중 부양을 했다는 것뿐.     


 ‘큰딸은 다르다’는 말이, 엄마한테 잘하라며 쥐어주는 지폐처럼 내내 가불 받는 마음이 든다는 걸 엄마는 그때도 지금도 알지 못한다. 중등 저학년까지 엄마랑 떨어져 살아야 했을 때, 수시로 오빠한테 끌려들어 가 맞으면서도 할머니한테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받으면서도 방학 때 만나는 엄마 앞에서도 제대로 한 번 울지 않았던 건, 큰딸이니 너라도 알고 있으라며 할머니와 고모들이 들려주는 ‘너네 엄마’ 이야기를 정말 나만 알고 꾹꾹 삼켰던 건, 그간 엄마한테 받아온 가불에 대한 대가였다. 최근까지도 엄마는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될 일에 꼭 ‘큰딸’을 붙인다. ‘역시 큰딸이어서’ ‘큰딸이 있으니’ ‘큰딸이라 다르네’처럼. 그러면 나는 엄마를 위해 내가 한 일이 정말 우러나서 한 일인지, 큰딸이라 해야 할 일을 한 건지 나조차 헷갈리곤 한다. 이제는 큰딸 말고 다른 딸 말고 그냥 엄마 딸만 해도 괜찮을 텐데, 엄마는 내가 아직 크지도 않은 큰딸이었던 때나 내게도 큰딸이 생긴 지금이나 똑같이 내가 원한 적 없는 가불을 해 주고 있다. 이런 덕분인지 난 ‘미리’ ‘알아서’ ‘잘’ 스쿼트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원해서 나를 위해 시작한 스쿼트가 아니었는데 자꾸만 하다 보니 심지어 잘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러니 바위 뒤에 숨어 빼꼼 튀어나오는 기린 목처럼 잘 들킬 수밖에.      


장녀 건들지 마 눈빛이 차분하다고 얌전한 게 아니라 차분하게 돌아있는 것뿐이야 
건들지 마 경고했어 크레이지 아시안 걸 중에서 제일 크레이지는 장녀야 기억해 
SNS에서 찾은 장녀에 대한 유머 글을 읽다 뿜었다. ‘딱이야!’ 했다.      


 오늘 아침. 오빠한테 맞은 옛날얘기를 뭘 그렇게 자꾸 글에 쓰냐며 실실 웃는 남편 때문에 눈이 뒤집혔다. 남편의 머리채를 잡고 (그날의 오빠처럼) 방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다, 생각보다 머리가 많이 짧아서 결국 멱살을 잡고 들어가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딸깍 방문을 잠갔다 (오빠처럼). 웃어? 웃기냐? 언제까지 처웃나 보자고 사정없이 패버렸다. 문밖에서 할머니가 “문 따! 어여 문 따래도!” 해도 열어주지 않았다(오빠처럼). 때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오빠처럼). 때리는 일이 그만 시시해질 때쯤 “좆같은 게! 한 번 더 싸가지 없게 웃으면 다음번에는 진짜 죽을 줄 알아!” 가르침을 준 다음 문을 꽝 닫고 나왔다(오빠처럼). 사실 난 하루에 두세 명은 이렇게 패버린다. 머릿속으로지만, 난 천하무적 의정부 왕 주먹이다. 실제로도 난 라지사이즈 고무장갑만 쓴다. 

 지난 화요일 직장에서 주방 마감할 때, 엄청난 설거지를 쌓아놓고 하던 K에게 “이거 내가 할 테니 K님은 다른 거해요.” 했던 건 장녀 특유의 넓은 품이나 배려 아니고, 설거지하는 K의 손이 너무 느려서, 퇴근 늦어질까 봐, 오랜만에 잡힌 술 약속에 늦을까 봐 그런 거였다. 간신히 맞춰간 술자리에서 K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K 뒷담화를 안주 삼는 나.       


 품이 넓고 책임감 강하고 배려심 깊고 리더십 강하고 차분하면서도 큰일 앞에서 담력도 센 당신들의 장녀와 내가 얼마나 다른지, 마음대로 내 어깨에 얹어버리는 장녀 프레임 때문에 종종 어깨에 선명한 흉터가 나기도 한다는 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알 리 없다. 그러면서 자꾸만 ‘그럴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럴 줄 알았다는 말로 납작해지고 싶지 않다.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못돼 먹고 때로는 얍삽해 보이더라도 바위 뒤에 가려진 몸통, 몸통 위에 새겨진 고유한 무늬, 언제든 바위를 떠나 어디든 달려갈 수 있는 튼실한 다리가 있다는 걸 알아주기를, 모르겠다면 도저히 모르겠다고 크게 세 번쯤 ‘못 찾겠다, 꾀꼬리!’ 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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