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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Mar 30. 2020

“내가 주님을 버렸나이다”

<기도하는 남자> 자기 죄를 느낄 수 있다는 은혜

재택근무가 한 달을 지난 것처럼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 예배를 드린 시간도 한 달이 흘러갔습니다. 교회는 주일 언제든, 당연히 열려있고 내 선택에 따라 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게 실은 상당한 은혜였음을 깨닫습니다.     


코로나 19의 국내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친 신천지와 더불어, 최근 여러 정통 교회들이 욕먹고 있습니다. 정보 공개 지연으로 국민 전체의 안전을 위협한 이단 집단, 경각심 덜한 대규모 모임이 우려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오래 전부터 사유재산화되고 정치세력화된 교회와 목회자 등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왔던 현실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신의 뜻을 구하는 척 자신의 욕망을 좇는 이중적인 모습, 그로 인해 우리는 안팎에서 ‘개독교’로 불리는 것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문제가 교회 밖의 인물들 이야기가 아님을...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습니다. 또 일부 교회에 가려진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이 이 같은 내부의 문제점을 스스로 드러내고, 개혁하려 기도와 행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주일 저녁 만난 영화 <기도하는 남자>는 신앙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합니다.  

영화 <기도하는 남자> 포스터. 경제적 한계상황 속에서 목사 부부의 선택을 묻습니다.

허름한 지하상가 공간을 빌려 개척교회를 이끄는 목사 태욱. 예배드리는 이는 채 10명이 되지 않고, 피아노도 없이 노래 반주기에 맞춰 찬양을 불러야 하는 교회입니다. 그래도 태욱은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봉사활동도 열심입니다. 작은 교회다 보니 헌금 등 걷히는 게 없어 밤에는 대리운전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성도 한 명은 몇 주 전부터 안 보이고, 이제 주축이 된 신혼부부는 이사로 교회를 옮긴다고 합니다. 재개발로 지금 공간에서는 나가야 하고, 장모님은 암에 걸려 5천만 원에 이르는 수술비까지 필요해집니다. 여기저기 아는 이들에게 손을 벌려보지만, 돈을 마련하기에는 턱도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이때 마침 대리운전을 하다가 신학교 후배를 만납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대형 교회를 물려받을 인물로, 술에 취해 불륜녀와 함께 이동하는 차를 태욱이 몰게 된 것이죠. 이걸 빌미로 금전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 정인에게는 동침을 조건으로 5천만 원을 빌려주겠다는 학창시절 친구의 제안이 들어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술 말고는 전혀 방도가 없는 어머니를 둔 둔 정인에게 5천만 원은 꼭 필요한 돈입니다. 때마침 은밀한 제안이 왔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영화는 극한의 ‘경제적·심리적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기도로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질문을 던집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극한의 상황이 닥치면 어떤 악이라도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조명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태욱의 행동을 따라가며 인간 내면의 갈등과, 결국에는 드러나는 이중성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 현실을 돌아보면 사명감을 지닌 수많은 목회자의 삶이 이처럼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이 멀리있지 않습니다. 매주 회사 신우회를 찾아와 예배를 이끌어 주시는 목사님이 그렇고, 대학·청년 시절 제가 존경했던 (당시) 전도사님 중 개척의 길을 나섰던 분도 그렇습니다.

생활고로 인해 방향을 바꾸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나 있는 매제 또한 신학대학원에 다니다 그만두고 직장생활에 나선 인물이기도 하고요.

그렇다 보니 괜히 제가 더 <기도하는 남자>를 몰입하며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장 15절)”

극한의 상황이란 게 참 상대적입니다. 사실 스스로는 매번 극한이죠. 우리는, 적어도 저는 그 순간 욕심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우리는 자주 한계상황에 빠집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엔 기도도 아무 소용 없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분들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을까 생각듭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판 가룟 유다나, 그를 모른다고 계속 부인한 베드로나 본질상 같은 위선자이고 죄인입니다. 작은 불안과 갈등, 경제적 필요, 생명의 위태로움 속에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나를 위한 이 욕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은혜와, 실제로 돌이키는 믿음에 따라 둘의 길은 완전히 다르게 갈라집니다.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죄가 자기 정당화의 늪에 빠져 주님을 보지 못하면 사망의 길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부끄럽게 여기고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교회 안의 많은 사례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기도하는 남자>와 다수 보도에서 보여주는 초대형 교회 세습, 목회자들의 타락, 목사·장로 등 지도층의 비리·범죄 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바로 곁에서 이를 만나게 됩니다.

모든 게 주의 것이라면서 헌금을 아까워하거나, 편력을 일삼아 여럿에게 아픔을 주면서도 자신은 사랑 많은 사람이라며 문제를 외면하기도 합니다. 이웃과 나눔을 강조하면서 내가 가질 것을 먼저 챙기고, 소외된 자를 위해 기도하자면서 가족은 내팽겨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평소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인지라 성경 말씀 앞에서 더 많이 기도하고 입술에 재갈을 물려야 하는데, 상대 눈의 티끌을 보지 말고 제 눈에 있는 들보를 봐야 하는데... 제 잘난 맛에 취해 떠들고 남 잘못 꼬집기를 즐깁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부터, 제 가족부터, 제 지인들부터 먼저 돌이켜 회개해 영화 제목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삶이 형편없는데도 겁 없이 CCM을 컬러링으로 설정해 둡니다. 제 정체성을 전하는 것임과 동시에, 제 잘못이 보인다면 “그런 곡이 컬러링이면서 부끄럽지 않냐”고 대놓고 말씀해 주십사 하는 의미입니다.-

삶의 여정 가운데 늘 돌이켜 기도하는 사람이길 소원합니다.

영화에서 태욱의 선택, 장모의 태도, 마지막 에필로그 등을 두고 많은 해석이 존재할 수 있어 보입니다만, 결국 확실히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영화의 평가도 그렇게 맡깁니다. 저는 그저 마지막 순간에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문득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버렸나이다”란 고백이 인상적인 찬양도 생각납니다. 찬양 속 “내가 주님을 버렸나이다”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동의어로 들리네요.      


신앙, 참 어렵습니다. 구도자의 삶 가운데 끝까지 하늘을 바라보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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