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극장을 찾은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재택근무와 IPTV 시청이 겹쳐 완전 집돌이가 되고 말았지요.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영화를 보는 게 편하긴 하지만, 최신작은 별로 없다는 아쉬움이 존재합니다. 이때 시끌시끌한 소문과 함께 넷플릭스를 찾아온 작품이 있으니, 바로 <사냥의 시간>입니다.
넷플릭스 상영작 <사냥의 시간>. 침울한 도시배경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3년간의 교도소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준석. 그의 절친 기훈, 장호, 상수는 준석에게 몸과 마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수감당시 거금을 훔쳤지만 원화 가치 폭락으로 휴짓조각이 되어버린 현실, 준석의 주도로 넷은 불법 도박장 금고를 털어 대만으로 떠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무장강도작전 성공으로 거액의 달러를 손에 쥡니다.
하지만 증거 인멸을 위해 가져온 하드디스크에 도박장 VIP 등 기밀정보가 들어있다는 게 문제! 이로 인해 네 친구는 목숨을 노리는 의문의 사나이로부터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사냥의 시간>이란 제목만 알고 시청한 저는, 처음에는 준석을 비롯한 친구들이 뭔가를 사냥하는 내용이거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제목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실제는 X(준석 무리를 쫓는 의문의 사나이, 그냥 제 마음대로 X라고 칭하겠습니다)가 사냥꾼이고 네 친구가 사냥감인 영화네요.
도입 부분이 낯설었습니다. 장국영과 유덕화가 익숙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비장한 주윤발ㆍ적룡보다는 웃긴 주성치 쪽을 좋아했더랬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흐르는 홍콩 느와르 풍의 이색적인 분위기가 왠지 어색했습니다. 시대 배경도 모호하게 느껴졌고요. (만화 <20세기 소년>, 영화 <매드맥스>가 떠올랐습니다. 미래인 것 같은데 과거에 매여 있고, 현재의 부조리를 극적으로 담아낸 듯한... 그런 느낌 같은 느낌 말입니다.)
게다가 너무 욕을 많이 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요. 도박장 테러에 나설 때까지의 배경 설명이 다소 길게 느껴져서 조금은 졸리기도 했습니다.
준석과 친구들은 법망 밖의 불법도박장 금고털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도박장 금고털이 이후의 이야기는 가슴 졸이며 잘 봤습니다. 뭣보다 이제훈과 박해수 두 배우가 존재감을 나타내며 긴장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최우식, 안재홍, 박정민 등 최근 잘 나가는 배우들이 연기한, 다소 지질하면서도 우애 깊은 친구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의도 희망도 없는 디스토피아에서 (기훈 부모 정도를 빼고는) 모두가 범법자이고 나쁜 놈들이지만, 그나마 어리고 선량한 이들이 먹잇감이 되어 하나둘 죽어가는 게 씁쓸합니다.
물론 네 친구 역시 사냥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지리 궁상 삶을 벗어나 행복해지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 돈을 사냥감으로 삼았지요. 희열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잠깐의 희열 뒤 맞이한 것은 정체 모를 막강한 존재 X한테서 오는 공포와 절망이었습니다.
막강킬러 X. 어디서 이 괴물이 만들어졌을까요?
“기회를 줄게요, 갈 수 있는 최대한 멀리 한 번 가봐요”
“시작을 했으면 끝을 내야죠”
파놉티콘의 감시관처럼 먹잇감이 도망가는 것을 지켜보며 놓아줬다 잡기를 반복하고, 주변에 본보기용 사체를 만들어내는 X. 마치 “도망쳐봐, 넌 어차피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어” 말하며 심장을 더 옥죄는 것 같습니다. 기를 쓰며 뛰고 날아봐도 X 손바닥 위의 손오공일 뿐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절대권력 앞에 울부짖으며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 서민을 닮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X의 사냥은 네 친구의 사냥과는 다릅니다. 자기 동생을 죽인 원수를 갚으려는 총포상과도 다르고요. 네 친구나 총포상은 명확한 대상이 있지만, 그저 추적과 살인을 즐기는 X에게는 게임 속 타겟이 될 만한 무엇이 존재하면 될 뿐 그게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순수한 ‘악인’이라고 할까요? (물론 진짜 악인은 X를 그렇게 만들고 마음껏 활동하도록 해이익을 얻는, 베일 속 더 위쪽의 존재겠지만요.)
많은 이들의 희생 끝에 목적지인 대만에 이른 준석의 마지막 선택은 얼핏 이해가 안 되기도 하지만, 어쩌면 여전히 존재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필연의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비로소 제대로 목표물을 잡은 준석의 새로운 ‘사냥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준석 친구들이 운영했던 자전거 매장. 세상이 변하기 전 이들은 여기서 소박한 행복을 꿈꿨을 겁니다.
‘내 시간을 사냥당했다’ 등 영화를 본 이들의 혹평이 엄청 많습니다. 그 심정도 이해됩니다. 스토리 구성이 촘촘하지 않고 공감이 떨어지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그래도 제 느낌에는 10점 만점에 5점대 평점을 받을 정도로 나쁜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상한 배경과 이상한 구성을 통해 이상한 현실을 전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 수작이라 평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다 제멋에 사는 것일까요? 제겐 나름 봐줄 만한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