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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Apr 20. 2020

뒤틀어진 사회, 일그러진 얼굴

<조커> 사회 속 우울과 직면하다


금·토요일 올빼미족 생활을 즐기는 아내를 둔 덕분에 주말 오전 6시부터 10경까지는 제게 자유시간입니다. 보통 거실에서 혼자 뒹굴거리며 영화를 한두 편 봅니다. 영화 선택은 그 날 기분에 따라 다른데요, 지난 토요일 아침은 무척 우울했습니다. 전날 밤 아내에게 루미큐브 게임을 연속적으로 패해 '챔피언' 지위를 빼앗겼기 때문일까요? 때마침 음악 앱을 통해 흘러나왔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가 아침에도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조커>를 골랐습니다.


극찬과 불쾌감이 맞물리는 영화('기생충'도 이 같은 대조적 느낌이 많았던 듯) <조커>. 지난해 가을 "꼭 보고 싶다"는 지인이 계셔서 극장에서 본 작품입니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었는데... 아니러니하게도 보자고 했던 이는 "갑자기 아이 치과에 가게됐다"며  함께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제가 꼭 봐야하는 영화였던 모양입니다!^^)

<조커>의 주인공 아서, 그는 선량한 시민이자 삐에로였습니다.

<배트맨>에 나오는 악당, 사이코패스 '조커'의 등장 배경을 다룬 영화입니다.

광대 삐에로 일을 하며 코미디언이 되기를 꿈꾸는 아서. 고용주의 갑질, 비행 청소년들의 폭행 등을 당하면서도 웃음지으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어느날 동료로부터 선물받은 총을 갖고 일한 게 문제가 되어 해고 당하고 말죠. 지하철 안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은행원에게 방아쇠를 당긴 그는, 희열감으로 '조커'가 되어 살인 대상을 확대해 갑니다. 또 여러 시민들 또한 그에 동조돼 폭동을 일으킵니다.    


마음이 뒤틀리고, 그 뒤틀림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왜곡과 모순의 사회. 그 곳에서 살아가는 아서는 삐에로입니다. 실제 삐에로가 아닌 어떤 배역을 맡았다 하더라고 그는 삐에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가면과 같은 분장칠 없이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란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실상의 괴로움을 삐에로의 웃음으로 감추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가면을 쓰면 괴력을 얻었던 코믹영화 <마스크>와는 달리, 그저 현실의 아픔을 감추고 회피하는 도구가 삐에로 분장이란 점에서 우리는 우울을 느낍니다.

영화 <마스크>(1994년작). 마스크를 쓰면 제멋대로 성격과 폭발적 힘을 지닌 존재가 됐죠. 하지만 <조커>에 담긴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 몇년 이슈가 됐던 몇몇의 갑질 사건을 꺼내놓지 않더라도, "기득권과 지배층은 웃음 짓는 얼굴을 하지 않아도 된다. 착취 당하는 이들이 생존을 위해 더 많이 웃음을 보여야 하는 시대다"란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조커>를 관람한 동료가 감상을 나누며 한 말입니다.) 권력과 부를 지니지 못한 약자는 존 스튜어트 밀의 지적처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됩니다.


<식스센스>를 연상시키는 기괴하고 안타까운 아서의 과대망상은, 비뚤어진 운동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발버둥치는 이들의 숨구멍입니다. '도시의 유력인사가 자기 아버지라도 됐으면', '새로 만난 옆집 여자와 사랑이라도 했으면' 하는 상상이 절망 가운데 있는 그에게 희망을 줬던 것입니다.

아서처럼 이 시대를 견뎌내는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기에 그의 망상은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영화 속 어머니로부터 받아온 학대처럼,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냉대와 천시가 만들어낸 환경적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아서일 때 힘없던 삐에로 분장은, 그가 조커가 되는 순간 비로소 '마스크'의 놀라운 파워를 발휘합니다. 이 사회 속에서 존버를 꾀하던 자아가 이를 놓아버린 순간, 좋게 말하면 '인식의 해방'이고 나쁘게 말하면 '통제를 벗어난 일탈'에 나선 그 때 괴력의 조커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는 <23 아이덴티티> 속 비스트의 탄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더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폭발한 결과지요.

영화 <23 아이덴티티>(2017년작). 어릴적 읽었던 소설 <24인의 사이코>가 원작입니다. 영화 속 '비스트'는 괴력을 지닌, 마지막 숨겨진 인격입니다.

영화 말미에 나타난 삐에로로 분장한 시민들의 폭동은 선뜻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당히 공감되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폭동꾼들이 아닙니다. 사회 속에서 울분을 감추며 살아왔던 또 다른 아서이자, 어쩌면 가끔 폭주를 꿈꾸는 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삐에로는 진실을 감춘 가면이 아니라, 광기 어린 흥분을 즐기고픈 인간 본성 자체일 수도 있다고 생각듭니다.


문득 앤드류 솔로몬이 쓴 <한낮의 우울>이 떠올라 책장에서 꺼내 몇 부분을 들춰봤습니다. 우울증을 지닌 이들의 고통과 광기어린 행동들이 영화 속 해피, 조커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네요. 무척 두껍고 참 지루하다 여겼던 책인데... 당시 가슴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책 속 서술들이 조커를 통해 영화 밖 제게 전해져오는 느낌입니다.

엔드류 솔로몬이 우울증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담은 <한낮의 우울>. 당시엔 지루했던 이야기가 이제 조금 와 닿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우울함을 품을 수밖에 없는 오늘, "난 차라리 슬픔 아는 삐에로가 좋아"를 외치는 김완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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