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에 유치원을 조기 졸업(?)한 제게 문학소년의 길은 필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직장 근처로 이사해 7살을 맞은 소년의 가장 친한 친구는 금성사가 출판한 64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이었습니다. 조그만 방 한 칸에서 소공녀 세라를 걱정하다가, 달타냥과 익힌 검술을 바탕으로 톰 소여와 함께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한 것도, 취미가 딱히 적을 게 떠오르지 않으면 ‘독서’라고 말하는 것의 시작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문학, 특히 소설을 좋아했는데 최근 1~2년 새 그런 작품들이 눈에서 멀어졌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책 정도를 빼곤 눈에 보여도 마음에 읽히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달에 한두 권을 읽었던 게 분기, 반기, 연간으로 변해갔지요. 그러면서도 <릿터>와 <월간 현대문학> 정도를 대충 훑으며 여전히 문학소년 인양 거들먹거리는 모습 하고는...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저와는 반대로 문학 세계를 즐기는 아내를 보며 ‘이래선 안 돼. 초심을 회복해야 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작품이 <미국의 목가>입니다.
두 권으로 구성된 <미국의 목가>. 문학동네에서 2014년에 출판했습니다.
<미국의 목가>는 예전 홍보팀 선배(라고는 하지만 제가 대리 때 부장이셨으니까 엄청 높으셨던 분)께서 지난해 초에 추천했던 책입니다. ‘스승보다 나은 제자 없다’고 저에 비해 독서량은 물론, 교양과 지혜가 뛰어난 분이시죠. 당시 두 권의 책을 사서 살짝 들춰보고 덮어뒀던 것을, 이번 근로자의 날을 낀 연휴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일단은) 읽어냈습니다!^^
1945년 위퀘이크 고등학교 졸업생 시모어 레보브(이하 스위드). 그는 유대인 이민 3세로 농구, 미식축구, 야구 등 미국 스포츠 전 분야에 뛰어난 지역 스타였습니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아버지의 장갑 공장을 물려받았으며, 미스 뉴저지 출신의 여성과 결혼해 딸을 낳고 아름다운 집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뤘지요. 부모에게 효자이고 남편과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며 이웃에게까지 친절한 젠틀맨이고, 부와 명예를 갖춘, 부족할 게 없는 성공한 미국인입니다.
하지만 사랑스런 딸 메리가 미국의 베트남 참전에 반대하며 마을에 폭탄테러를 일으키고, 부족할 게 없는 미국인의 표상으로 보였던 스위드 가족의 모습이 다시 비춰집니다. 연쇄 테러 주동자 딸을 비롯해 독선적 아버지,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는 아내, 바람난 부부, 이혼을 반복하는 동생 등….
레보브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찌 이리된 것일까요?(이 질문은 소설 마지막 문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고등학생 때인가 미국의 문화를 ‘melting pot’에 비유해 풀어놓은 수능 예문이 있었습니다. 여러 문제집에서 똑같은 지문을 봐서 그런지 여전히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다른 인종이든 용광로처럼 융합해 하나로 만드는 게 미국의 힘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용광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미묘한 균열이 느껴집니다. 잘 버무려진 듯하지만 합쳐지지 않는 사회의 비대칭성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중심은 테러리스트 메리로 인해 깨져버린 스위드 가정사입니다. 하지만 스위드의 생각 흐름을 따라가 보면 비극적인 가정사보다 더 큰 미국 사회의 문제점과 편견이 드러납니다. 유대인·흑인을 향한 차별, 성공한 이민자들에 대한 질투, 드러나는 외양만으로 판단하려는 시선이 소설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런 편견 속에서 스위드는 미국 망상을 좇는 이민자요, 노동자들을 착취해 부를 거머쥔 악덕 자본가요, 딸이 말을 더듬고 테러리스트가 되도록 가정환경을 제공한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아내 역시 허영심으로 미인대회에 출전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를 키우고, ‘어머니’가 아닌 ‘미스 뉴저지’로 딸을 잘못 키운 사람으로 치부되고 맙니다. 진실과 상관없이 그렇게 낙인찍혀 평가받는 것이지요.
이 같은 오류가 시대적 사실-인종 갈등, 베트남 참전에 대한 논란, 워터게이트 사건, 성 상품화 등-과 만나 상상력을 더해감으로써 가정의 비극과 사회의 비극이 뒤엉켜 증폭됩니다.
루 레보브(스위드의 아버지)와 스위드, 그리고 메리의 관계에 국한해서 보면 이 소설에는 미국에서의 세대 갈등 문제도 드러납니다.
미국에 건너온 아버지를 따라 산전수전을 겪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루 레보브. 그는 가난과 굶주림의 고통을 아는 시대를 살았으며, 공포 가득한 세계대전의 아픔과 상처를 견디고 이겨냈습니다. 자존심 강한 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스위드의 경우 세계대전 승리로 초강대국이 된 미국과, 아버지 세대의 지원 속에 경제적 풍요와 행복을 누리는 세대지요. 어떤 부족함도 없어 보입니다.
반면 메리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할아버지나, 가진 것을 누리기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스위드 세대까지 이어진 목가는 가진 자의 사치로만 보여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기에 “나 때는 말이야”란 말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에 닿지 않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이야기입니다. 라떼를 좋아하든, 말을 좋아하든 그 같은 태도는 메리에게 말을 더듬게 하고, 베트남 반전 모임에 참여하게 만들며, 마을 우체국을 폭파하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들은 절대 어우러지지 않습니다. 마치 다른 시대를 살아온 경험에 인해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 밀레니얼 세대 등이 갈등을 일으키는 우리나라의 현 모습을 보는 듯해 안쓰럽기도 합니다.
미국 사회의 인종과 계급, 세대 갈등을 그려낸 이 소설의 구조와 시점은 생소하고 인상적입니다.
소설가이자 스위드 동생인 제리의 친구인 네이선 주커먼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해 스위드에 대한 서사가 이어집니다. 초반 네이선 주커먼이 스위드와 제리, 학창시절 동료들을 만나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 부분은 스위드-메리 가족사와는 다른, 그들의 찬란했던 과거를 조명하는 액자의 모습을 띱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인 듯한 형태로, 성공시대에서 비극사로 건너뛰는 액자식 구성을 만들어냈습니다.
본격적으로 스위드 이야기로 접어들면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전개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스위드 내면의 의식 흐름을 따라 (마치 1인칭 주인공 시점처럼) 이야기 폭이 급속하게 변해갑니다. 스위드가 겪는 현실과 의식세계가 교차하며 나타남으로써 앞서 언급했던 미국 사회의 모순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솔직히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작가인 필립 로스가 네이선 주커먼이고, 그가 곧 스위드라고 생각 들었습니다.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작이었군요. 거장 필립 로스의 생각을 읽기에는 한없이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미국의 목가>란 제목과는 다르게 아름답고 서정적인 목가는 현실이 아닌, 의식 속에서만 존재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현실인 듯 현실 아닌 모호하고 공허한 미국 사회의 모습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거장 필립 로스가 굳이 이렇게 복잡한 구성과 산만한 의식 흐름 기법으로 이 작품을 서술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책에 빠져 있던 동안 즐거웠습니다만, 오랜만에 접하는 장편소설치고는 상당히 읽기 어려운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학에 대한 근력을 키워야겠습니다.
이런 월간지 훑는 것에 그치지 말고, 제대로 근력을 키워야겠습니다.
※ 문득 최근에 본 일드 <나기의 휴식> 이 떠오릅니다. 스위드의 모습이 드라마 속 가족을 짊어지고 사는 남녀 주인공과 얼핏 겹쳐 보입니다. (스위드의 짐이 몇 배는 무겁게 느껴집니다.) 버릴 수 없는 가족, 그들을 품어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드라마 속 나기처럼, 쉬지 않고 달려온 소설 속 스위드도 잠시 쉬어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