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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Jun 05. 2020

신이여 부디 제발

<날씨의 아이> 내겐 날씨보다 소중한...

놀이공원만큼 제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것을 손꼽으라면 ‘애니메이션’을 뺄 수 없습니다. 여동생과 함께 참 많은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봤었지요. <태권브이> 시리즈 속 김 박사 같은 과학자가 되겠단 꿈을 키웠고, <금발의 제니>를 보며 전쟁의 참혹함과 사랑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아기공룡 둘리> 노래를 따라 부르고, <독고탁><하니>의 뛰어난 운동신경을 동경하기도 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사랑은 커서도 이어져서 서른 즈음에 본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명작 중의 명작으로 생각하고, 극장판 <명탐정 코난>은 신작이 나올 때마다 찾아보고 있습니다(도대체 코난은 언제 끝난단 말입니까?).

그리고 어제, <날씨의 아이>를 만났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 작년 가을에 개봉한 작품이었군요. 저는 이번에 IPTV를 통해 접했습니다.

<초속 5센티미터>, <너의 이름으로>의 감독 신카이 마코토 작품입니다.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을 볼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던 마흔, 아내에게 끌려가 <너의 이름으로>를 보았었죠. 이야기 중간에 경쾌한 주제가가 흐르는 게 이색적이었는데, <날씨의 아이>에서 다시금 제대로 그때의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다만 대규모 지진이 발생한 마을이었던 배경이, 이상기온으로 비가 계속 내리는 도쿄로 바뀌었습니다.     


섬마을을 떠나 도쿄로 건너온 16살 소년 호다카.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가출 청소년인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갈 곳 없는 그는 배에서 알게된 남성 스가를 찾아가고, 스가가 운영하는 미스터리 잡지사의 기자로 일하게 됩니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100% 맑음 소녀를 취재하라’는 것! 호다카는 점성술사, 기상청 연구원 등을 만나 열심히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18살 소녀 히나를 만납니다.     

그녀는 만났던 인물입니다. 도쿄에 온 호다카가 일자리를 찾겠다고 애쓰며 3일 연속 패스트푸드점 햄버거로 배를 채울 때 남몰래 한 개를 챙겨준 아르바이트생이었습니다. 그런 여자아이가 유흥가 남자들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죠. 차마 피해갈 수 없었던 호다카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들에게서 도망쳐 나옵니다.    

히나는 기도로 (잠깐이지만) 맑은 날씨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닌 소녀입니다.

알고 보니 히나는 날씨를 맑게 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1년 전 병상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날 간절한 마음으로 맑게 해달라고 기도한 이후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히나가 바로 ‘100% 맑음 소녀’였습니다. 호다카와 히나는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길 원하는 이들의 소원을 이뤄주고 사례금을 받는 사업모델을 만들어 실행에 나섭니다. 히나가 기도하는 곳마다 빗줄기는 햇살로 바뀌고 사람들의 얼굴도 환해집니다.     

하지만 날씨의 아이에겐 커다란 비밀이 있습니다. 오래된 신관으로부터 스가가 들은 바에 따르면 ‘무녀(날씨의 아이)가 사람들을 위한 제물이 되어야 이상기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운명의 날이 다가옵니다.     


“지금부터 하늘이 맑아질 거야.”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마음은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처음 히나의 바람으로 날씨가 맑아진 건 아픈 어머니의 마지막이 화창하길 바라는 그녀의 소원에 신이 내린 선물이었을 겁니다. 호다카보다 나이 많은 누나인 척하고 “하늘이 맑아질 거야”며 위로를 건넨 건 낯선 도쿄에서 외로이 있는 남자아이를 보살펴주고 힘내도록 하고픈 마음 때문이었지요. (그녀 역시 부모 잃은 , 15살의 소녀가장일 뿐인데 말입니다.) 의뢰하는 사람들의 부탁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기 몸이 투명하게 소멸되는 희생에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였기에 그녀의 기도는 하늘도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렇듯 기이한 기적은 절실한 간구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간절한 마음, 100% 맑음 소녀의 기도 응답 비결입니다.

“이젠 괜찮아, 날씨 따위 계속 미쳐있어도 돼.”

맑은 날씨는 중요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우린 가끔 잊을 때가 있죠. “호다카는 이 비가 그치길 원해?”라는 히나의 질문에 당연한 듯 무심코 “응”이라 대답하는 호다카처럼 말입니다. 100% 맑음 소녀 능력 발휘로 투명해진 히나의 몸을  봤는데도 호다카는 여전히 맑은 날씨가 좋습니다.

따지고 보면 맑은 날씨는 호다카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섬마을에 있던 그가 도쿄에 나온 것도 빛이 비치는 지역을 따라온 것이지요. 그리고 거기서 빛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제 자기가 원하는 목표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목표 달성에 시선을 뺏겨 함께하는 이의 절실한 노력과 뼈아픈 희생은 놓쳐버린다는 게 문제입니다. 호다카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날씨일까요, 아니면 히나일까요? 히나 없는 맑은 날씨가 그에게 어떤 기쁨을 줄 수 있을까요?    

이왕이면 맑은 날씨가 좋겠습니다만, 함께 걷는 빗길도 나쁘진 않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수를 위해 누구 하나쯤은 제물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제겐 없을까요? 제물이 될 날씨의 아이가 나와 측근만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아니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진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런 마음으로 인간은 계속 하늘의 뜻을 거슬러온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색깔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산, 바다, 꽃 등의 자연과 공장, 플랫폼, 건널목 등 인공을 동시에 나타내면서 판타지 요소를 섞고, 이야기 중심에 특별한 둘 사이의 유대관계를 그려냈습니다. 기존 작품보다 훨씬 제 스타일입니다. 현실적이지만 우울한 마무리를 보여줬던 <초속 5센티미터>, 긍정적 정서를 열린 결말이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너의 이름은>은 왠지 아쉬웠거든요. 구성이 단순하고, 인류애가 없다는 비판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느낌이 <날씨에 아이>에서도 이어집니다. 마지막 둘의 만남은 여지껏 다른 애니메이션보다 확실하고 깔끔했습니다!

하지만 뭐, 날씨 따위는 저와 상관없습니다. 혹 이로 인해 물이 불고 땅이 얼어 <설국열차>가 보여주는 미래에 닿을지라도... 저는 그저 당신이 소중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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