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와 알프레도의 <시네마천국>처럼 대단한 이야깃거리는 없지만, 극장은 제게 추억이 어려있는 곳입니다.
서울 종로에서 일하셨던 할아버지께선 저희 남매가 서울을 찾으면 종종 아카데미극장에서 영화를 보여주신 후 꼭 경양식집에서 돈까스를 사주셨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꽤 귀족 같은 문화생활을 했더랬죠. 사람 머리에 거미 다리의 요괴가 나왔던 <손오공>,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했던 동생의 모습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꼬맹이 여자애가 귀여웠는지, 할아버지의 부탁 때문이었는지 가게 사장님은근처중국집에짜장면주문을 해주셨습니다!)
중학생 땐 할아버지뻘 되는(어쩌면 더 높은)친척 어르신 내외께서 집 근처로 이사를 왔는데, 남편분이영사기사였습니다. 당시 상영관을 세 개나 지녔던, 수원에서 알아주는 대한극장에서 몇 년 간 일하셨죠.어르신 덕분에 영사실을 비롯한 극장 건물을 견학하고 <쥬라기공원>, <쉰들러 리스트>, <백발마녀전> 등의 작품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아마 고등학생이 아니었다면 매일같이 극장에서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중고교 시절 좋아했던 배우는 임청하였습니다. <백발마녀전>을 비롯, 많은 중국영화를 대한극장에서 봤습니다.
이렇듯 제게 ‘극장’은 영화관이나 멀티플렉스와는 다른, 뭔가 그립고 정감이 어우러지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국도극장>은 그 제목만으로도 관심이 갔고, 저도 모르게 ‘바로 보기’를 선택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시골 고향 집에 내려온 기태.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오랫동안 사법고시를 준비했던 인물입니다. 직장생활도 좀 했고요. 어쨌거나 사법고시는 폐지됐고, 기태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고향에 내려오게 됩니다. 친구 회사의 일자리를 부탁해보려 했지만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임시적으로 재개봉 영화 상영관 ‘국도극장’에 들어가는 한편, 서울에 있는 회사에도 입사원서를 넣으며 돌아갈 방법을 생각하죠. 그랬던 그곳에서 미술 담당인 오 실장을 만나 함께 담배 피우고 이야기 나누는 사이가 되고, 어릴 적 동창생인 영은과 우정도 쌓아갑니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주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납니다. 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형네 가족, 치매로 요양병원에 들어간 어머니, 가수의 꿈을 좇아 서울에 올라간 영은, 대장암 치료를 위해 국도극장에서 나간 오 실장…. 이제 카메라는 국도극장 앞에 앉아 있는 기태를 향합니다.
시골마을의 조그만 재개봉 영화 상영관 <국도극장>을 배경으로 영화가 전개됩니다.
잔잔한 아날로그풍의 영화네요.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고, 그저 약간 웃픕니다.사실 제 타입의 작품은 아닙니다. 상업영화에 취해 있는 저로서는 강력한 한방이나, 제대로 된 웃음, 가슴 저미는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이런 류의 영화를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일상은 영화만큼 극적이지 않고 지루하다’며 롱테이크기법을 주로 사용하는 사실주의 영화들, 학교 과제를 하면서도 고역이었습니다.^^) 등장 인물들의 감정을 조금만 더 고조시키거나, 아님 <찬실이는 복도 많지>처럼 런닝셔츠 입은 장국영이라도 출연시켰으면 저 같은 사람도 재미 요소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깊이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참 재미없는 영화다’ 지나쳤을 겁니다. 되씹어보니 딱딱한 껍질 속의 과즙이 느껴지네요!
‘당신은 지금, 괜찮은가요?’영화 포스터에 적힌 이 문구가 와 닿습니다. 현실은 헐리우드 영화처럼 환상적이거나 감동적이지 않은 법이죠. 자신이 지금 위치한 그곳은 누구나 힘듭니다. 자식들을 위해 자기 몸 아픈 것도 돌보지 않는 엄마, ‘이번엔 붙겠지’ ‘다음번엔 문제없을 거야’ 하는 기대로 고시생 생활을 이어온 기태, 집안 빚과 가족들 뒤치다꺼리에 지친 희태(기태 형) 모두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꿈을 위해 여러 가지 고된 알바를 하는 영은이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륜에 빠진 친구 아내도, 취하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는 오 실장도 괜찮지 않습니다. 그 ‘괜찮지 않음’을 품은 채로 가끔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때론 꾹 담은 입술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다들 현실을 벗어나려 애씁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괜찮지 않습니다. 괜찮지 않은 연기를 배우들이 잘 소화해 냈습니다.
이 같은 모습을 나타낸 이동휘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참 좋습니다. (다만 뭔가 극적인 걸 바라는 제 마음이, 정말 현실처럼 연기하는 배우들을 자꾸 거부할 뿐입니다.^^)
고시생의 꿈을 접고, 서울에 함께 가자는 영은이의 제안에도 “미안해”라고 응답한 기태.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실패자이자, 구렁텅이에 빠져 모든 의욕을 잃은 인물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두 괜찮지 않은 현실’을 깨달은 시선으로 보면,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것도 같습니다. 그의 말처럼 "될 때까지 하다가 늙어 죽을 수는 없는" 법이고, 만약 조금 일찍 목표를 달성한다 해도 또 다른 욕망이 그를 배고프게 할 테니까요. 서울에서 재취직하는 방법을 내려놓고, 스스로 국도극장 영업부장이 되어 ‘안분지족’하는 모습... 뭔가 해탈한 것 같지 않나요? 결국, 남이 아닌 자신의 결정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국도극장 앞 보도블록 사이에 핀 들꽃을 홀로 바라보는 기태는 분명 슬프기보다는 행복했을 겁니다.
가끔은 이렇게 함께 담배 피울 수 있는 사람이 결에 있는 것만으로 족할 때가 있습니다.
문득 저 자신을 돌아보며 ‘이쯤만 해도 충분히 성공했는데, 뭘 더 이루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거지?’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아내에게 이야기 꺼냈다가 “몽상에서 깨어나. 당신은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 현실을 직시해!” 따끔한 충고 덕에 다시금 바짝 정신을 차렸습니다!^^)
<국도극장>. 삶이 전혀 괜찮지 않은 사람들을 보여줌으로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하려는 것인지, 그 가운데서도 자기만의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일깨우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극장이 삶 가운데 자리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습니다. 어쩌면 더 이상 바닥이 없을 것 같은 그곳에서 나를 부장으로 만들어줄, 자칭 오 실장인 오씨 같은 인물을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함께 얘기하다 보면 인생살이의 소소한 기쁨을 맛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