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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May 16. 2020

무엇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가?

<이누야시키: 히어로 vs 빌런> 어느 날 기계가 된다면

어차피 밖에 나가기엔 꺼려지는 날이 계속되고 있지만, 특히 비가 오는 날엔 괜히 비 때문에 그런 듯 마음이 더 착잡합니다. 새로운 영화라도 있으면 빠져들 텐데 개봉되는 작품이 있을 리가 없고…. 리모콘을 이리저리 만지던 중에 최근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나왔던 <이누야시키: 히어로 vs 빌런>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람 몸이 각종 무기로 변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비 오는 날엔 오락물이지!’ 하는 생각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주인공 이누야시키 이치로는 고등학생 자녀 둘을 둔 노년의 샐러리맨입니다. 딸아이가 “아빠 늙어서 싫다”며 학교에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나이 들어 결혼했거나 자녀출산이 늦었던 것 같습니다. 대출을 끼고 새집으로 이사했지만 가족들의 환호도 못 받고, 회사에서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 상사에게 “능력 없으니 그만두라!” 며 욕먹고 사는 소심한 찌질남입니다. 게다가 시한부 암 선고까지 받습니다. 이 사실을 가족에게 전해야하는데...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게 씁쓸합니다.

여기저기서 무시당하고 이야기 나눌 이조차 없는 이누야시키 이치로. 떠돌이 개의 처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공원 벤치에서 떠돌이 개와 함께 앉은 늦은 밤, 저편에는 한 남학생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 순간 갑자기 환한 빛이 그들이 덮치고, 이치로는 다음 날 아침 공원에서 눈을 뜨게 됩니다. 밀려오는 갈증을 참을 수 없어 물을 들이켜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이런, 겉가죽만 사람일 뿐 자신이 완전히 로봇으로 변해있음을 알게 됩니다.     


로봇이라 그런지 능력이 대단합니다. 감각기관(사람이 아닌데 감각기관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의 기능과 전투력은 슈퍼맨급이고, 방송 통신 네트웍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죽지만 않았다면)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화타 이상의 능력까지 지녔습니다.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불치의 병으로 죽게 된 환자들을 살리는 데 조용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어느날 깨어보니 로봇이 되어버렸다! 원작 만화책에 따르면 외계인 짓이랍니다.

그런데 그 말고 한 사람이 더 공원에 있었지요? 이치로 딸의 동급생인 히로입니다. 어려서 그런지 히로의 적응력은 이치로보다 훨씬 빠릅니다. 집단 따돌림을 당해온 친구 안즈를 돕는데 강력한 로봇의 힘을 발휘한 히로. 하지만 엄마와 이혼 후 재혼해서 잘살고 있는 아빠에 대한 반감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단란하게 이야기 나누는 한 가정에 침입, 세 식구 모두를 죽이고 맙니다. 그리고 (손가락) 총구를 자신을 막는 모든 일본인을 향해 겨눕니다.    

 

이제 빌런 히로를 막아야 하는 이치로. 히로의 능력을 곁에서 봤던 안즈가 조력자로 나섭니다. 하지만 살인무기가 아닌 의료도구로만 변한 몸을 써온 데다, 원래 노쇠했던지라 히로를 상대하기에는 모자랑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딸을 비롯한 사람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그냥 볼 수는 없는 법. 둘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사람에게 무한한 능력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요? 영화 속 둘은 똑같은 능력을 반대 방향으로 쏟아냅니다. 활인을 택한 이는 히어로가, 살인을 택한 이는 빌런이 됐습니다.

로봇의 힘 자체가 선과 악의 성격을 지닌 게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인물의 목적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치로가 히로에 비해 더 나은 환경 가운데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뼈와 살을 태워 일하는데도 집과 회사에서는 무시만 당하고 여전히 갚을 대출금은 산더미 같은 데다 죽음까지 눈앞에 둔 그라면 사회에 쌓은 울분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히로만큼, 어쩌면 히로보다 더 강하게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하고,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실천해 갔지요. 어떤 상황 변화에도 변함없이 자신의 정언명령에 따라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일까요? 이를 보면 단순히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떨까요? 칸트를 얘기하며 절대적 善을 추구하는 척하지만, 마음속에 어떤 저의가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심 친절을 베풀며 보상을 떠올린다거나, ‘그딴 식으로 계속해봐. 나중에 가만두지 않겠어.’ 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는 능력과 지위가 생기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히로도 그저 엄마를 사랑하고, 왕따 당하는 어릴 적 친구를 도우려 했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는 걸 돌이켜보면 그와 저는 다르지 않습니다. 내게 위협이 되는 사람, 가치 없어 보이는 사람을 한 번 두 번씩 치워가다 어느덧 히로와 똑같아진 저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히로가 처음부터 일본인 모두를 죽이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한 번, 한 번의 살인이 쌓여 빌런이 되어버렸습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속 박새로이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지금 한 번, 지금만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또또 한 번…. 순간은 편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 한 번들로 사람은 변하는 거야.”

언제까지 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기도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저는 변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어쩌면 신의 능력이 제게 주어지지 않은 게 은혜고 행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득 ‘과연 사람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마음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던 이치로입니다만, 사실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근육이고 장기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변신(?)한 모습을 보면 뇌도 없는 듯합니다. 6백만 달러의 사나이나 아이언맨과는 달리, 단지 이치로의 겉가죽을 입힌 100% 기계입니다. 하지만 이치로와 히로 모두 그대로의 기억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과연 어디에 담겨있는 것일까요?

기필고 딸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무엇보다 강한 파워를 만들어냅니다. 그는 아빠입니다.

오래전에는 가슴으로 감정을 느끼고 머리로 생각한다고 여겼었습니다. 즉 가슴과 복부 어딘가에서 마음을 움직이고, 머리에 있는 뇌가 이성을 제어한다고 알았습니다. 영화 <음란서생>의 한 내시도 머리로부터의 명령과 가슴에서 나오는 명령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지금 시대는 마음 또한 뇌에 있다는 게 정설입니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근원도 뇌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죠. 하지만, 이 <이누야시키: 히어로 vs 빌런> 영화만으로 추정컨대 ‘사람의 마음은 표피에 깃들어 있다’고 새롭게 주장해 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마터면 깨달을 뻔> 등의 인지심리학 책들을 읽으며 머릿속이 복잡했던 질문들을 이 SF 오락영화를 보며 다시금 꺼내놓아 봅니다.     


평화가 찾아온 세상, 기계 이누야시키 이치로는 또 조용히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갈 겁니다. 이치로의 실체를 본 딸에게 그는 아빠일까요, 기계일까요? 뭐 그게 어쨌든 어떻습니까? 그는 기계지만,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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